8월 5일자 일기에서 좌익 합당의 과제 앞에 공산당의 내부 문제가 터져 나온 상황을 이야기했다. ‘간부파’와 ‘대회파’ 사이의 갈등으로 흔히 설명되는데, 이 설명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두 개 조직 사이의 대립이 아니었다. 간부파는 박헌영 중심의 조직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른바 대회파는 분파적 활동을 피하려고 극력 조심했다. 간부파의 독단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당 운영에 대한 일반 당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일 뿐이다. 그래서 간부파의 숙청에 아무런 조직적 반발 없이 개별적으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공산당은 1년 가까이 자유로운 환경을 누렸다. 미군정은 공산당을 직접 탄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군준비대, 학병동맹 등 비교적 중도적인 단체들이 탄압을 받았고, 좌익 신문사 습격과 흑색선전 등 극우파의 공격이 있었을 뿐이다. 본격적 탄압이라 할 수 있는 정판사사건도 조작된 것이든 어떻든 위폐사건을 핑계로 한 측면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이 창당대회조차 열지 않고 있었던 것은 박헌영 중심 당권파의 당 운영이 얼마나 편의주의적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5월 초 공개된 조봉암의 편지는 이에 대한 불만의 한 모퉁이가 불거져 나온 것이었다. 박헌영은 이에 출당으로 대응했다. 조봉암처럼 겉으로 드러난 경우가 아니라도, 불만을 표출하기만 하면 바로 쫓겨나는 분위기에 공산당이 묶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좌익 합당의 과제가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합당 전에 당 대회를 통해 당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합당 방침을 당원 총의에 따라 세우자는 것은 상식적인 요구였다. 합당 후까지도 지금까지와 같은 운영방식이 계속된다는 것은 크든 작든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헌영 일파는 여기에도 출당으로 대응했다. 일관성 하나는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다.


공산당의 내부 문제 돌출은 합당 상대당들에게도 파급되었는데, 신민당보다 인민당의 문제가 먼저 드러나기 시작했다. 8월 중순에 들어서며 합작 ‘추진파’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박헌영이 김세용과 김오성에게 ‘친서’를 보내고 추진파가 14일에 현우현의 집에서 별도 모임을 가진 사실이 알려지자 여운형이 위원장직 사표를 내고 지방으로 잠적했다.


인민당 지도부에 합당 반대자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공산당 내부 문제가 불거지자 여운형, 장건상 등 주류 지도자들은 신중론을 내세웠다. 공산당 내부 문제가 정리되기를 기다려 합당 작업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박헌영 일파가 공산당을(그리고 민전도) 운영해 온 방식에 품고 있던 의구심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순 들어 추진파가 ‘무조건 합당’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박헌영 일파의 문제점이 더 드러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공산당 문제가 ‘대회파’의 출당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이 사표를 내고 잠적한 것은 인민당 내부 문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추진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추진파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8월 16일의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추진파는 표결을 요구, 48 대 31로 무조건 합당을 의결시켰다. 사회를 맡은 장건상 부위원장이 여운형의 사임문제 토의를 요구하고 사표를 낭독하였으나 추진파는 그것이 진짜 사표가 아니라 반동분자의 모략이라고 주장하며 토론을 거부했다. 결국 추진파 외의 위원들이 퇴장하고 장건상마저 의장 사임을 선언하고 퇴장하자 남은 위원들이 현우현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합당의 구체적 방법을 토론했다. 퇴장한 위원들은 다른 방에서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인민당 확대집행위원회가 둘로 쪼개진 것이었다.


이 진행을 보며 여운형의 심중이 어떠했을까. 추진파의 핵심 인물 현우현, 김세용, 김오성 모두 해방 전 건국동맹 이래의 동지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1년간 자신을 당수로 받들어 온 이들이 자신을 버리고 박헌영을 따라 좌익을 망치는 짓에 나서다니. 사표를 내고 잠적할 때 그는 동지들의 반성을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8월 19일 서울에 돌아온 직후 김규식, 장건상, 버치 중위와 잇달아 만났다. 위원장직 사임 의지를 확인하고 장건상에게 당무를 넘겼다. 박헌영 일파와의 협력을 포기하고 좌우합작에 일로매진할 결심을 다진 듯하다. 21일 서울신문 기자와의 회견에서는 심경을 거침없이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문) 인민당 당수 사임설의 진상 여하?

(답) 그는 사실이다. 지난 16일 내가 사임 의사를 모씨를 통해 표시했던 바 그 사람의 대필로 나의 사임장을 확대위원회에 제출하였던 것이다.

(문) 그러면 인민당 당수를 사임한다는 것은 정계 제일선에서 물러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답) 그렇다.

(문) 그 이유는?

(답) 정계 제일선에서 물러가겠다는 것을 전에 몇 번 비공식으로 한 바 있었는데 그 숙제를 이제 와서 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전선에서 전연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늙은 병졸의 한 사람으로서 창을 끌고 대중의 뒤를 따라가겠다. 나의 60평생에 최근같이 심경의 슬픔을 느껴본 적은 또 없었다 할 것이다.

(문) 좌익3당 합동문제와 귀하의 은퇴와의 관련 여하?

(답) 합당은 나의 원래부터 포회하고 있었던 지론이었으며 지난 10일 발표한 기본테제와 같이 어디까지라도 이는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과 인민당 내부에 있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되고 있으나 이는 합하기 전에 각자 내부에 있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발생되고 있으나 이는 합하기 전에 당연히 있어야 할 하나의 순화작용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합당 전야의 분열은 절대로 삼가야 할 것이다.

(문) 사임 후 다른 어떠한 정치적 세력과 다시 손을 잡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억측이 있는데 여하?

(답) 3·4십년 걸어온 길을 이제 와서 바꿀 리는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6. 8. 23일자)


여운형의 결단이 좌우합작의 희망을 되살린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귀경한 19일부터 우익 측 대표들이 몇 차례 회합을 가지더니 22일에 우익 대표단 이름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뒷부분을 옮겨놓으며, 그중 박헌영 일파를 합작에서 배제하려는 뜻이 나타난 부분에 밑줄을 쳤다. 우익 대표단이 이런 뜻을 밝힌 것은 이제 박헌영 일파에 구애받지 않고 합작에 임하겠다는 여운형의 의지를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 제1회 정식 합작회담이 7월 25일에 있는 후 1주 2회식 회담하기로 규범을 정하였지마는 좌측은 삼당합동 등등으로 분주함인지 오늘까지 이행을 해오지 못했다. 그리고
조공 일부가 편파적인 불합리한 소위 5원칙을 그나마 비공식으로 전달하고 일절 발표에 대한 약속과 규정이 있음도 불구하고 독자 발표한 것은 그를 책하지 아니 할 수 없으나 우리는 성심으로 기본대책 8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이것을 답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신문지상으로 반박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합작에 대한 성의를 의심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희구하는 좌우합작은 정치적 야합이 아니요 역사적 현 단계에 의한 행동통일을 하여 현하 국제적 관련성에서 실천 가능한 타당성에 따르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금후도 우리의 임무를 포기하려고는 아니한다. 다만 어떤 일방의 지령이나 사주를 받아 국가독립을 불원하는 반민족 비애국적 분자를 제외하고 진정한 좌측 지도자와는 본래의 우리의 종지와 기도대로 적극적으로 제휴할 용의를 가졌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시국의 타개를 희도하고 있다.”


8월 29일자 <서울신문> 기사에서 합작 분위기의 발전 방향을 알아볼 수 있다. 여운형이 공산당 배제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공산당 배제가 당시의 일반적 관측(또는 구구한 억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운형, 좌우합작회담의 진전 상황 언급”

지난 22일 좌우합작 우방대표단에서 진정한 좌익하고 합작하기에 최선을 다 하겠다는 요지의 성명발표가 있은 후 이의 구체적 표현인 것 같이 좌익의 일부인사와 우익의 중요인물들이 빈번히 왕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8일 오전 10시에는 백남운 장건상 양씨가 김규식 거소를 방문하여 극비밀리에 요담을 하였는데 이날 여운형도 동 회담에 참가예정이었으나 동씨는 전일의 인민당 확대위원회 석상에서의 과로로 불참석하였다. 이에 기자는 28일 오전 11시반경 시내 모처로 여 씨를 방문하였던 바 씨는 최근의 이와 같은 좌우요인 왕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토로하였다.

“좌우합작 문제는 쌍방이 원칙만을 제시하였을 뿐 아직 양방에서 이 문제를 전연 포기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태로는 정식으로 더 진전될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서 나는 김 박사와의 개인적 친분관계상의 이 문제를 여하히 하였으면 좋을까? 하는데 대하여 순전히 개인적 입장에서 자주 만나고 있으며 백 씨나 장 씨도 역시 나와 같은 입장에서 김 박사와 만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공산당 대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일반이 구구한 억측을 내리는 것은 너무 신경과민한 탓이다. 공산당 내에 반간부파가 있다고 해서 공산당이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공산당을 제외하고서는 좌우합작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최근의 우리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일반은 너무 각자의 입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 같으나 아직 하등의 구체적 진전도 없으며 앞으로 어떤 결과가 있게 될 시는 민전 의장단의 결의로서 여러분에게 발표하게 될 줄 안다.”


민전 공동의장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의 5인이었다. 박헌영과 허헌을 제한 3인이 좌우합작을 원하는 입장이었다. 아마 그 밖의 지도부에서도 박헌영 일파는 소수였을 것이다. 소수이면서도 조직력과 책략을 통해 주도권을 행사해 온 박헌영 일파에게 구애받지 않고 좌우합작의 한 쪽 주체로서 민전을 지키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