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34년 8월 15일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를 위시한 파리대학 학생 7명이 몽마르트르의 한 교회에서 청빈, 순결과 순종의 서약을 함께한 것이 예수회(Societas Iesu)의 출발점이다. 이 모임은 1540년 교황의 인가를 받아 수도회로 출범했고, 급속한 성장으로 가톨릭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수회는 1773년 교황의 명령으로 해산될 때까지 교육-학술-선교의 여러 분야에서 큰 역할을 맡았고, 중국 선교는 그중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창립 7인의 한 사람인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는 인도에서 일본까지 아시아 여러 지역의 선교를 개척했고 중국 진입을 시도하던 중 광주(廣州) 부근의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2년 중국 진입에 성공한 그 후배 선교사들은 2백 년간 중국과 유럽 사이의 가장 뚜렷한 접점을 이루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만이 아니라 기하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럽의 학술과 문화를 중국에 소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유럽에 전달했다.
16세기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충격 속에서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또는 가톨릭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 불리는 흐름을 일으키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이 쓰이지만, 하나의 움직임의 두 측면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회는 두 측면 모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교황권의 확장-유지에 공헌함으로써 “교황의 근위사단”이란 별명을 얻었고, 그 해산은 국민국가의 성장으로 교황권이 위축된 결과였다.
선교는 예수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 분야의 하나였는데, 적응주의(accommodationism)를 도입한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종래의 선교는 개인의 구원에 목적을 두고 대상자를 소속 사회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예수회의 선교는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대상 사회의 관습과 풍속에 가능한 한 저촉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독교에 접근시키려 한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많은 지역이 가톨릭교회를 벗어나는 상황에서 근거 지역을 넓히기 위해 이런 포용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기도 했고, 인도와 동아시아의 포용적인 토착문명과의 접촉으로부터 자극받은 측면도 있었다.
1580년대 들어 선교사의 중국 진입이 이뤄진 것은 융경개관(隆慶開關)으로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이 풀린 덕분이었다. 진입과정을 지휘한 것은 동방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1539-1606)였고, 그가 중국에 투입한 십여 명 선교사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이 마테오 리치(1552-1610)였다.
발리냐노는 1573년 인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일본까지 동방 전 지역의 예수회 활동을 관할하다가 1590년대 어느 시점부터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관할 영역을 좁혔다. 예수회의 조직이 커지고 동방의 선교활동이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사비에르의 경건함과 대비되는 책략과 동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은 적응주의 원리였다. 선교 대상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자세였다.
30세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28년간 활동하다가 중국 땅에 묻힌 리치는 적응주의 노선을 독보적인 경지로 이끈 인물이다. 그의 중국어와 중국고전의 조예가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하는 둥 그에 대한 후세의 찬양 중에는 지나치게 부풀려진 면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비추어본다면 가히 초인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리치의 모습을 제일 잘 보여주는 연구로 조너선 스펜스의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1983)을 나는 꼽는다. 내 학위논문 “마테오 리치의 中國觀과 補儒易佛論”(1993)은 리치 자신의 상황 인식을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리치는 중국사회의 기독교 수용을 위해 기독교의 ‘진리’만 주장하기보다 윤리, 학술 등 기독교사회의 좋은 점을 소개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수용의 동기를 부여하는 방향을 잡고 많은 서적을 저술-편찬했다. 유클리드의 <Elements> 중 일부를 서광계(徐光啓)와 함께 번역한 <幾何原本>이 그 가운데 가장 큰 효과를 일으킨 작품이다. 이것을 발판으로 서광계가 역법 개정을 추진, <숭정역서(崇禎曆書)>(1634)를 편찬한 것이 청나라에서 시헌력(時憲曆)으로 채택되었다. 왕조의 간판 격인 역법의 기술자로서 선교사들의 역할이 청나라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ociety_of_Jesus#/media/File:Regimini_militantis_Ecclesiae.jpg 로욜라가 바오로 3세 교황의 칙서를 받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Xavier#/media/File:Franciscus_de_Xabier.jpg
https://en.wikipedia.org/wiki/Alessandro_Valignano#/media/File:Alessandro_Valignano_2.jpg 사비에르와 발리냐노. 대조적인 캐릭터이면서도 적응주의 노선을 위한 역할은 완벽하게 합쳐진 느낌을 준다.
https://en.wikipedia.org/wiki/Society_of_Jesus#/media/File:LifeAndWorksOfConfucius1687.jpg 1687년 파리에서 출판된 <라틴어로 설명하는 중국의 지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자의 사상을 소개한 책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ociety_of_Jesus#/media/File:Paradigma_XV_Provinciarum_et_CLV_Urbium_Capitalium_Sinensis_Imperij.jpg 1687년경의 중국 선교지도에 2백여 곳의 교회와 선교소가 표시되어 있다.
2.
마테오 리치의 진입 이후 2백년간 9백여 명의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서 활동했다. 같은 시기에 중국 선교를 시도한 다른 단체들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였다. 숫자의 차이보다도 활동 범위의 차이가 더 컸다. 민간의 신자 확보에만 매달린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예수회 선교사들은 청나라 조정에서 역법 운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며 상당 범위의 유럽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는 한편 중국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유럽에 전달했다.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역사상 가장 특이한 역할을 맡은 집단의 하나였다.
이 특이한 역할의 발판이 적응주의 노선이었다. 이 노선 덕분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복장과 예절을 따르며 중국인과 편하게 어울리고 중국사회에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황제의 신하 노릇을 할 수 있었고 지역사회에서는 주민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학술 성과와 제도, 문화를 출판을 통해 중국에 소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예수회의 중국 활동을 유리하게 해준 적응주의가 1630년대부터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례논쟁(典禮論爭, Chinese Rites Controversy)이다. 17세기 들어 중국에 침투하기 시작한 다른 수도회 선교사들이 예수회의 적응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할 정도로 지나치게 타협적인 것이라고 보고 교황청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교황에 대한 ‘순종’을 앞세우며 뛰어난 활동력을 가진 예수회에 대해 교황청은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근대국민국가 발전의 결정적 계기가 된 30년전쟁(1618-1648) 이후 가톨릭군주들과 교황청 사이에 이해(利害)를 다투는 측면이 차츰 커졌다. ‘교황의 근위사단’ 예수회는 세속군주들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1773년의 예수회 해산은 교황청의 자발적 조치라기보다 세속군주들의 압력에 의한 ‘교황의 무장해제’였다. 그 과정에서 전례논쟁은 예수회 공격의 꼬투리가 되었다.
포르투갈(1759), 프랑스(1764), 스페인(1767) 등 주요 가톨릭국가들이 교황청에 앞서 예수회를 탄압-추방하고 있었다. 영화 <The Mission 미션>(1986)이 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끌어온 원주민 공동체를 포르투갈 당국이 파괴하는 것을 교황청이 제지하지 못하는 장면이다.
전례논쟁의 첫 번째 쟁점은 하느님의 호칭이었다. 중국 진입에 앞서 일본 선교가 시작될 때 하느님을 “다이니치”라 부른 것은 일본인의 기존 관념에 점근하려는 뜻으로, 적응주의 노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본 전통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혼란의 위험이 느껴지자 라틴어 “Deus”의 음을 그대로 옮겨 “데우스”로 고쳐 불렀다. 중국에서는 “상제(上帝)”, “천(天)”, “천주(天主)”가 함께 사용되다가 전례논쟁을 거쳐 “천주”로 통일되었다.
더 큰 문제가 조상과 공자에 대한 제사였다. 예수회의 반대자들은 제사가 우상숭배라고 비판했다. 중국인 입교자에게 제사를 금지하는 것은 엄청난 장벽을 쌓는 일이므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제사가 사회적 관습일 뿐이라고 교인들을 가르치며 그 한도 내에서 제사를 허용했다. 이 문제가 중국에서 예수회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조선의 첫 가톨릭 순교자를 낳은 1791년의 진산(珍山)사건도 여기서 파급된 것이었다. 적응주의가 패퇴하고 예수회가 해산된 후 예수회 서적을 통해 뒤늦게 서학(西學)을 일으킨 조선 선비들은 책 내용과 당시 북경 교회의 지침 사이의 차이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 교회의 지침에 따라 신주를 파괴하고 제사를 폐한 선비들이 적발되어 처형당했고, 그들과 인척관계였던 정약용도 공격을 받았다.)
곡절 끝에 적응주의를 배척하는 클레멘스 7세 교황의 칙령이 1704년에 내려졌다. (1) “天主”라는 말을 쓰고 “天”, “上帝” 등 다른 말은 쓰지 않는다. (2) 봄가을의 공자 배향(配享)과 조상 제사를 신자들에게 금한다. (3) 공자 사당의 월 2회 전례에 중국의 관리 신자들의 참석을 금한다. (4) 중국 신자들의 조상 제사를 금한다. (5) 집에서든 묘지에서든 장례식에서든 중국 신자들의 조상 숭배 전례를 금한다. 등 내용이 담긴 칙령이었다.
교황은 칙령 반포에 앞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1710)을 사절로 파견했다. 1705년 봄 중국에 도착한 투르농은 그해 연말과 이듬해 6월에 강희제(康熙帝, r. 1661-1722)를 만났고,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투르농의 주장을 황당하게 여긴 황제가 교황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두 명의 선교사를 로마로 보냈는데 따로 떠난 두 사람이 모두 도중에 난파로 목숨을 잃었고, 투르농은 억류되어 있던 마카오에서 4년 후에 죽었다.
강희제는 오랫동안 선교사들에게 역법 운용을 비롯해 지도 작성도 맡기고 러시아와의 교섭에 통역과 번역도 맡기며 큰 신뢰를 주었지만, 선교사들이 예측해준 것과 다른 태도로 교황청이 나오자 그 신뢰가 많이 줄어들었다. 1706년 말 황제는 심사를 통해 선교사의 체류를 인가하는 정책을 세웠다. 두 개의 질문을 통한 심사였다. (1) “그대는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는가?” (2) “그대는 마테오 리치의 자세를 따를 것인가?” (라이엄 브로키 <Journey to the East, the Jesuit Mission to China, 1579-1724 예수회 동유기>(2007) 184-192쪽) 선교사들의 절대적 충성을 요구하는 교황에 맞서 황제도 그들의 충성을 확인하러 나섬에 따라 선교사들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몰렸다.
https://en.wikipedia.org/wiki/Pope_Pius_VII#/media/File:Pie_VII_Arrestation_par_le_G%C3%A9n%C3%A9ral_Radet.png 비오 7세 교황은 1809-1814 기간 중 나폴레옹에 의해 파리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가 로마에 돌아온 후 제일 먼저 한 일의 하나가 예수회의 재건이었던 것을 보며 예수회의 존재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가진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Pope_Clement_XI#/media/File:Open_letter_from_Kangxi_to_Pope_Clement_XI.png 강희제가 클레멘스 11세 교황에게 보낸 편지. 만주어, 한문,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Pope_Clement_XI#/media/File:Ritratto_di_Clemente_XI.jpg
https://en.wikipedia.org/wiki/Kangxi_Emperor#/media/File:%E6%B8%85_%E4%BD%9A%E5%90%8D_%E3%80%8A%E6%B8%85%E5%9C%A3%E7%A5%96%E5%BA%B7%E7%86%99%E7%9A%87%E5%B8%9D%E6%9C%9D%E6%9C%8D%E5%83%8F%E3%80%8B.jpg 투르농 사절단을 파견한 클레멘스 11세 교황(r. 1700-1721)과 접견한 강희제(r. 1661-1722)
3.
마리 파브로의 <La Horde d'Or et l'islamisation des steppe eurasiatiques>(2018) 영역판(<The Horde: How the Mongols Changed the World 금장한국이 바꾼 세상>, 2021)이 막 나왔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1182-1227)의 후손들이 이끈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이 유럽, 특히 러시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밝힌 책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금장한국은 외부의 침략자로서 이질적인 존재로만 인식되어 왔다. 파브로는 금장한국이 동유럽 일대의 문명 형성에 기여한, 그래서 그 자체가 유럽의 일부가 된 과정을 보여준다.
파브로의 책을 보며 근대유럽의 출현 배경을 살피는 범위가 너무 좁았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 고전문명을 되살려낸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인의 손만으로 근대유럽을 일궈냈다고 보는 통설이 아직도 힘을 지키고 있다. 르네상스를 일으킨 이탈리아 도시들의 경제적-문화적 기반조건이 이슬람세계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사실이 주목받게 된 것은 근년의 일이고, 르네상스 지혜의 원천을 그리스 고전문명만이 아니라 중세 이슬람세계에서도 찾게 된 것은 더 최근의 일이다. 이제 파브로는 르네상스만이 근대유럽의 진입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도널드 라크의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유럽 속의 아시아>(3권 9책, 1965-1993)는 시대를 앞선 책이었다. 라크의 “아시아”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으로 구성된, 통상적 의미의 ‘아시아’ 중 이슬람권 동쪽만을 가리킨 것이다. (라크의 책에서 다루는 시대의 인도와 동남아시아는 이슬람화 이전 내지 진행 중이었다.) 근대유럽의 형성 과정을 고작해야 이슬람권과의 각축을 통해 바라보던 관행을 벗어나 시야를 크게 넓히는 시도였다. 라크의 서론 첫 문단에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되새겨볼 의미가 담겨 있다.
“애초에 르네상스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유럽을 둘러싼 바다 너머 미지의 여러 세계로 달려 나가게 만든 추동력은 무엇이었는가? 그 후 4백년간 지구 위에 더 정복할 대륙이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유럽의 팽창이 힘을 지속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유럽 팽창의 특이성에 경탄한 역사가들은 외부를 향한 이 분출을 뒷받침한 문화적 동력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리상의 발견을 유럽인의 활동력과 독창성의 승리로 보는 데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만, 해외활동을 일으킨 추동력에 관해서는 연구자들의 종교와 국적에 따라 이해와 평가가 크게 엇갈려 왔다. ... 그러나 그 발견 내용이 서양문명 자체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탐구한 사람은 극히 적다.” (1권 1책 xi쪽)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라크에 앞서 떠올리고 유럽중심주의 반성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조지프 니덤(1900-1995)이다. 1954년 제1권이 나온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중국의 과학과 문명> 편찬사업은 많은 후원자와 참여자를 결집시켜 애초에 니덤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큰 규모로 자라났다. 지금까지 7권 27책이 출판되었는데 니덤의 유업을 이어받은 니덤연구소는 편찬을 계속하고 있다. (니덤 자신은 7책을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 출범한 1950년대는 유럽(서양)중심주의가 더할 수 없이 강고할 때였다. 그럼에도 이 사업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을 다루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유럽이 탄생시킨 근대문명의 본질로 여겨지는 분야다. 그리고 가치기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는 다른 분야들에 비해 과학기술의 비교는 오해의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15세기까지 중국의 과학기술이 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하는, 당시의 중국인들조차 생각지 못했던 니덤의 관점이 설득력을 갖고 퍼져나가자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니덤의 수수께끼(the Needham Question)’라 불리게 되는 질문이다: “중국의 과학기술이 15세기까지 유럽보다 높은 수준에 있었다면 왜 그 후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이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유럽에서 일어나게 된 것인가?”
니덤의 수수께끼가 1960년대에 제기될 때는 학술적 연구주제라기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역사학에서 따질 필요가 있는가?”) 뜻밖의 연구 성과가 일으킨 충격의 한 표현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떠오른 ‘유럽의 기적(European Miracle)’의 주제가 1990년대에 ‘대분기(Great Divergence)’로 이어진 것은 제3세계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근대세계에서 유럽의 우위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상대화해서 보게 된 결과였다. 지금은 1970년대 이후의 세계적 변화(경제적 격차축소)를 ‘대수렴(Great Convergence)'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수렴‘의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앞 단계의 ’분기‘를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설명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현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유럽의 기적’ 또는 ‘대분기’를 해명하려는 시도는 21세기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연구자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다. A. G. 프랑크의 <ReOrient 리오리엔트>(1998)와 N. 퍼거슨의 <Civilization 문명>(2011)이 유럽중심주의를 배격하는 태도와 옹호하는 태도를 각각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크와 퍼거슨의 책을 비교하면 퍼거슨 쪽의 논증이 더 치밀하다. 그런데 프랑크의 책이 더 재미있고 배울 것이 많아 보이는 것은 유럽중심주의에 반감을 가진 내 편향성 때문일까? 그런 탓도 없지 않겠지만, 주제의 연구가 확장 단계에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학술연구의 ‘문제해결(problem-solving)’ 기능보다 ‘문제제기(problem-raising)' 기능이 더 중시되는 것이다.
중국의 화폐제도를 살펴보기 위해 구해 본 쉬진(徐瑾, Jin Xu)의 <Empire of Silver 은의 제국>(2017)은 퍼거슨 쪽이다. 퍼거슨이 제시한 “권력의 4각형(Square of Power, 행정부, 중앙은행, 채권시장과 의회제도)”을 인용하면서 왕조시대의 중국이 이 4각형을 갖추지 못했고 개인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지 못했던 점을 지적한다. 동어반복(tautology)의 느낌을 받는다. 유럽의 성공 원인을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곳의 실패 원인을 따진다면 새로운 시각을 얻을 길이 없다. 근대적 가치관의 틀에 묶여서는 근대 이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피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생각한다.
4.
‘대분기’의 원인에 관해서는 많은 논설이 나와 있고 수많은 요소가 제시되었다. 케네스 포메란츠의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대분기>(2000)가 그중 잘 정리된 책이다. 포메란츠는 유럽 측 석탄자원의 유리한 분포와 신대륙의 확보를 중시하면서 에너지집약적 기술발전을 통한 산업혁명의 조건이 되었다고 본다. 18세기 중엽까지 유럽과 중국의 발전 수준에 결정적 차이가 없다가 산업혁명이 곧 ‘대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포메란츠의 주장은 경제사 측면의 핵심을 짚은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결정론의 느낌이 든다. 중국의 석탄자원 분포도 크게 불리하지 않았고, 신대륙 활용의 기회도 중국 쪽에 없지 않았다. 유럽의 석탄자원과 신대륙 활용이 필연적 지정학적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 측면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 프란체스카 브레이의 <The Rice Economies 벼농사 경제체제>(1986)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 농업편(6권 2책, 1984)의 저자인 브레이는 이 책에서 노동집약적 발전을 지향하는 벼농사의 내재적 특성을 규명했다. 산업혁명에 나타난 에너지(자원)집약적 발전만을 기술발전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며, 노동집약적 발전도 생산성 향상이라는 기술발전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크 엘빈이 <The Pattern of the Chinese past: A social and economic interpretation 중국사의 패턴>(1973)에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라 부른 송나라 시대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관점이다.
브레이는 농업기술 발전 방향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인구밀도, 타 부문의 노동 수요, 소작관계의 형태, 경작방식 등을 예시했다.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근세 초기 유럽과 중국을 얼른 비교해 보더라도, 인구가 희박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유럽에서 노동력을 절약하는 에너지집약적 발전 방향을 선택한 조건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세계관의 차이가 기술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겠다. 열린 세계의 믿음을 가진 사회는 외부 자원의 획득을 통해 자원집약적 발전의 길을 택할 수 있다. 반면 주어진 세계의 한계를 인식하는 사회에서는 자원 절약에 기술 발전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 일찍이 농업의 포화상태에 이른 중국에서는 인구 증가로 늘어나는 노동력을 제한된 면적의 토지에 투입하면서 (노동력 대비) 생산성을 유지하는 기술 발전에 주력했고, 15세기까지 기술 수준과 조직 수준이 낮은 단계에 있던 유럽인은 외부 자원의 획득에 주력하다가 신대륙의 획득이라는 대박 덕분에 산업혁명이라는 자원집약적 발전의 길을 찾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열린 세계관과 닫힌 세계관 사이의 우열과 득실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현대 일본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서 ‘새옹지마’의 느낌을 받는다. 메이지유신 이후 대동아전쟁까지 일본인은 중국을 깔보다가 패전의 충격 속에서 공산중국의 성립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일본의 번영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교차되는 상황에서 다시 중국을 깔보게 되었다가 G-2의 자리를 중국에 빼앗기는 단계에서는 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굳이 비교한다면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열린 시스템을, 중국은 닫힌 시스템을 바라본 셈이다.
5.
1793년 영국 사절 조지 매카트니(1737-1806)가 북경에 와서 건륭제(乾隆帝)를 알현할 때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국교 수립과 교역 확대였다. 국교 수립에 대해 건륭제는 영국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말했다.
"그대 나라 사람 하나를 천조(天朝)에 보내 그대 나라를 대표하게 하고 그대 나라와의 교역을 감독하게 해 달라는 그대의 요청은 모든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고 들어줄 수 없는 것이요. 천조에 봉사하는 유럽인들이 북경에 살도록 허락받아 온 것은 사실이요. 그러나 그들은 중국 복장을 입어야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할 수 있으며 제 나라로 돌아갈 허락을 받는 일이 없소. 그대도 관습을 잘 알 것이요. 그대가 보내려 하는 사신에게 북경의 유럽인 관리들과 같은 위치를 부여할 수도 없으며, 자유로운 활동이나 본국과의 연락을 허용할 수 없소. 그러니 그가 이곳에 있더라도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요."
교역 확대 요청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뜻을 두는 것은 오직 훌륭한 통치를 행하고 천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뿐이요. 진기한 물건이나 값비싼 물건에는 관심이 없소. 그대가 보내 온 공물을 내가 가납하는 것은 머나먼 곳에서 그것을 보내온 그대의 마음을 생각해서일 뿐이요. 이 왕조의 크나큰 덕은 하늘 아래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모든 왕과 부족들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귀한 공물을 보내오고 있소. 그대의 사신이 직접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없는 물건이 없소. 나는 기이하고 별난 물건에 관심이 없으며 그대 나라에서 나는 물건을 필요로 하지 않소."
영국은 7년전쟁(1756-1763) 승리를 계기로 제국주의 팽창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레나다 총독(1776-1779)과 마드라스 총독(1781-1785)을 지낸 매카트니는 그 선봉장의 하나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란 말로 유명한 그는 북경에 다녀오면서는 비망록에 이렇게 적었다.
"중화제국은 낡고 다루기 어려운 초대형 전함과 같은 존재다. 운이 좋아서 뛰어난 선장과 유능한 선원들을 계속해서 만나 왔기 때문에 지난 150년간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었고, 그 덩치와 생김새만 가지고도 그 이웃들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능한 선장에게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기강이고 안전이고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아마 바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동안 난파선으로 떠다니다가 어느 날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그 배의 바닥 위에 고쳐 짓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중화제국의 침몰은(상당히 유력한 전망이다.) 아시아에서 교역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중국인들의 근면성과 재능은 위축되고 약화되겠지만 아주 없어질 수는 없다. 중국의 항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나라의 모든 모험가들이 시장을 찾아 중국의 구석구석을 파고들 것이다. 상당 기간 갈등과 혼란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정치적으로나 해상활동으로나 상업상으로나 세계 제일의 강국을 이룩한 영국이 이런 변화 앞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고 다른 모든 경쟁자를 앞서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매카트니가 고두(叩頭)의 예를 거부했기 때문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많이 떠돌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2년 후에 건륭제를 알현한 네덜란드 사절단은 고두의 예를 행하고도 같은 결과를 맞았다.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세계를 바꾸러 나선 영국과 천하를 있는 그대로 지키려는 중국의 입장이 전혀 어울리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cartney_Embassy#/media/File:LordMacartneyEmbassyToChina1793.jpg 건륭제의 매카트니 사절 접견 장면
https://en.wikipedia.org/wiki/Macartney_Embassy#/media/File:The_reception_of_the_diplomatique_and_his_suite,_at_the_Court_of_Pekin_by_James_Gillray.jpg 영국의 상시 만평가가 상상한 접견 장면
https://en.wikipedia.org/wiki/Macartney_Embassy#/media/File:Henry_William_Parish_-_Plan,_Section_and_Geometrical_Elevation_of_the_Great_Wall_and_a_Tower,_near_the_Pass_at_Cou-pe-keou.jpg 매카트니 일행이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가는 도중 고북구(古北口)에서 장성을 지나갈 때 그린 장성 구조도. 이 구조대로 1만 리 길이라면 유럽의 모든 석조물을 (건축물과 성곽)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석재가 들어간 것이 아닐까 경탄했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acartney_Embassy#/media/File:The_Approach_of_the_Emperor_of_China_to_His_Tent_in_Tartary_to_Receive_the_British_Ambassador_(brightened).jpg 매카트니를 접견할 장막으로 들어가는 건륭제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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