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 실록(明 實錄)>에도 <명사(明史)>에도 오랑캐이야기는 동남방의 바다오랑캐보다 서북방의 유목민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명나라 당시에도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중화제국의 대외관계에서 서북방을 중시한 결과다.

 

만리장성부터 그렇다. 진 시황(秦 始皇)이 쌓은 것이라고 흔히 말하고, 그 전의 전국시대 장성(長城)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도 하며, 그 후 여러 시대에 쌓은 부분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명나라 때 쌓은 것이다. 그 전에 쌓은 구간의 길이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명나라 때 쌓은 부분은 훨씬 더 웅대하고 정교하다. 널리 알려진 장성의 이미지는 명나라 장성의 모습이다. 장성 전체 토목공사량 중 명나라 때 투입된 것이 90퍼센트가 넘는다.

 

명나라의 위기는 바다보다 초원에서 온 것이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북경 일대에 유목민이 쳐들어온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원정에 나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일까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왕조도 북쪽 오랑캐의 한 갈래인 만주족에게 넘어갔다. 반면 바다로부터의 위협은 성가신 해적 수준이었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임진왜란도 명나라 본토에 미치지 않았다. 유목민이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면 바다오랑캐는 피부병 정도로 여겨졌다.

 

서북방의 대외관계에 치중한 중화제국의 관점은 역사 경험의 관성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중화제국의 성립 시점부터 가장 중대한 위협이던 유목세력은 몽골제국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중화제국의 역사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중요한 작용을 해왔다.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낸 명나라가 몽골세력의 반격을 가장 큰 위협으로 여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긴 시간이 지난 뒤의 역사가의 눈에는 당시 사람들이 크고 중요하게 여긴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인식하는 시간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Epoque de Philippe II 펠리페 2세 시기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1949)에서 시간의 흐름을 세 개 층위로 구분했다. 바닥의 흐름은 자연의 시간. 인간이 거의 느낄 수 없이 유장하게 흘러간다. 다음 층위가 문명의 시간. 사회-경제-문화의 구조적 변화가 전개되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표면에 있는 사건의 시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건의 시간을 넘어 문명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브로델은 역사가의 임무로 보고 장기지속(la longue durée)’ 현상을 말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유목세력의 동정에 주의를 집중한 것은 사건의 시간 속에서였다. 더 깊은 충위에서 문명의 시간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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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9%95%BF%E5%9F%8E/14251/1/c8ea15ce36d3d5396400b83d3c87e950352ab00b?fr=lemma&ct=single#aid=0&pic=2f738bd4b31c8701ef013887217f9e2f0708ff18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문구(九門口) 장성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Wall_of_China#/media/File:20090529_Great_Wall_8185.jpg () 장성

 

 

2.

 

명나라에 대한 유목세력의 위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일이 토목지변(土木之變)’(1449)이다. 영종(英宗, 1435-1449, 1457-1464)이 오이라트(瓦剌)를 정벌하겠다고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라는 요새에서 참혹한 패전 끝에 포로로 잡힌 사건이다.

 

중국 황제가 유목세력에게 포로로 잡혔다! 한 고조(漢 高祖)가 흉노에게 포위당해 곤경을 겪은 평성지곤(平城之困)’보다도 더 극적인 사태다. 그러나 토목지변은 황제를 비롯한 몇몇 사람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중화제국과 유목세력 사이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 일이 아니었다.

 

오이라트 지도자 에센(也先, 额森, Esen)은 명나라 원정군을 격파한 후 승세를 타고 침공하는 대신 포로로 잡은 황제의 몸값을 요구했다. 황제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명나라의 방어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 포로로 잡힌 황제를 바로 포기하고 그 동생을 황제로 세워(代宗, 1449-1457) 임전태세를 갖추자 에센은 물러갔다가 1년 후 영종을 큰 보상 없이 돌려보냈다.

 

에센이 명나라를 망가트릴 목적을 갖고 있었다면 영종을 돌려보낸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귀환 후 실권 없는 상황(上皇)이 된 영종은 1457년 정변을 일으켜 황제위를 되찾고 8년 전 북경을 지킨 우겸(于謙, 1398-1457) 등 유능한 신하들을 자신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에센 자신이 그보다 먼저 몰락해버렸다. 휘하 세력을 만족시킬 당장의 이득을 가져오지 못한 그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1455년에 반란으로 살해당한 것이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토목보 사태의 어리석음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오이라트는 외경 전략(outer frontier strategy)’을 통해 외교와 교역 등의 방법으로 안정된 수입원을 명나라에서 찾은 것인데 강경일변도의 대응으로 양쪽 체제가 함께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오이라트 세력은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그 후 백여 년간 유목세력을 통제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장성 수축공사도 이 기간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몽골의 양대 세력은 오이라트의 서부(西部)와 타타르(韃靼)의 동부(東部)였다. (19세기 서양에서 만주족을 ‘Tatar’라 부른 관행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타타르를 ‘Eastern Mongols’로 부르기도 한다.) 명나라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우세했으나 에센의 몰락 후 타타르가 득세해서 다얀 칸(達延汗, Dayan Khan, 1474-1517)과 알탄 칸(俺答汗, Altan Khan, 1507-1582)의 영도 하에 장기간 명나라를 압박했다.

 

자그치드와 사이먼스는 <Peace, War, and Trade along the Great Wall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1989) 3변경 호시(互市)”에서 에센, 다얀 칸, 알탄 칸의 시기 명나라와 몽골 사이의 관계를 집중 조명했다. 이 시기 몽골의 주도세력들은 명나라와 전쟁보다 교역을 원하는 경향을 꾸준히 갖고 있었는데, 명나라가 이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피차 큰 피해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관점이다.

 

저자들의 관점이 명확하게 뒷받침되는 대목들이 많이 있다. 알탄 칸 시기의 흐름이 특히 분명하다. 알탄 칸은 큰 세력을 막 이룬 1541년에 사절을 명나라 변경의 대동(大同)에 보내 조공관계를 청원했다. 명 조정은 이를 거부했고 이듬해 다시 대동에 온 사절을 보고도 없이 바로 처형한 관리들은 조정에서 상을 받았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1546-47년 알탄 칸이 다시 사절을 보냈을 때 명나라 장수들은 경쟁적으로 사절을 잡아 죽였다. 역대 명신(名臣) 중에 이름을 남긴 옹만달(翁萬達, 1498-1552)은 무단히 사절을 죽인 장수들을 엄벌에 처하고 알탄 칸의 청원을 받아들일 것을 역설했지만 그 자신이 견책을 받았다.

 

방어 능력을 갖추지도 않은 채 적대적인 정책만 취하던 명 조정은 1550년 알탄 칸의 대거 침공 앞에서 아무 대책이 없었다. 대동 방면을 막고 있던 대장군 구란(仇鸞)은 알탄 칸에게 뇌물을 주며 다른 방면으로 진공하게 한 죄로 나중에 처형되었고, 병부상서 정여기(丁汝夔)는 적군이 북경 일대에 이르렀을 때 성문을 닫고 북경성만 방어하는 소극적 전략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정여기는 희생양으로 몰린 감이 있다. 처형에 임해 엄숭 때문에 망했다(嚴崇誤我)!” 외쳤다는 말이 전해진다. 정여기의 소극적 전략은 당시의 권신 엄숭이 주도한 것이었는데 꼬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대책 없는 상황은 여러 해에 걸친 무책임한 정책이 누적된 결과였지 몇몇 당사자의 책임으로 볼 수 없다.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 불리는 1550년의 위기는 101년 전의 토목지변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구조적 위기가 아니라 황제의 무능을 둘러싼 조정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449년의 위기는 황제가 잡혀가는 덕분에 조정의 정비를 위한 한 차례 기회를 가져왔지만 1550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암군(暗君)의 하나인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7)는 황제 자리를 지켰고, 손꼽히는 간신의 하나인 엄숭도 십여 년간 더 권세를 누렸다.

 

https://en.wikipedia.org/wiki/Tumu_Crisis#/media/File:Tumu_Crisis.jpg 토목지변이 일어난 장소

https://en.wikipedia.org/wiki/Altan_Khan#/media/File:Altan_Khan.png 알탄 칸의 세력 범위. 명나라와의 가장 중요한 접점이던 대동(大同)이 북경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3.

 

명나라 조정에서는 북방 유목세력을 늘 큰 위협으로 여겼다. 그러나 후세의 연구자들은 원나라가 물러간 후 몽골세력에게는 중국 정복의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여긴다. 아나톨리 카자노프가 <Nomads and the Outside World 유목민과 외부세계>(1983, Eng. tr. by J. Crookenden) 202-212쪽에서 유목사회의 특성에 입각해 이 점을 밝혔고, 자그치드와 사이먼스도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에서 이 관점을 따랐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와 상호보완의 관계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 사이에 자족성(autarchy)의 비대칭성이 있다. 농경사회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내부에서 생산하는데 유목사회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교역의 필요성이 유목사회 쪽에 더 강한 것인데, 농경사회에 통제력이 강한 체제가 세워질 때는 이 차이를 이용해서 갑질을 하려 든다. 유목세력의 불리한 조건이 어느 한도를 넘을 때 폭력을 쓰게 되지만 교역 등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는 평화적 방법이 주어지면 폭력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유목세력이 중국의 농경사회를 전면적으로 지배하려 든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 관점을 뒷받침해 준다. 원나라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 예외가 성립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얼마간의 실마리는 나타나 있다.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한 원나라 건국세력이 수십 년 정복 과정을 통해 유목세력의 특성을 벗어나 정착문명의 틀에 서서히 접근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만이 아니라 이슬람 등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늘어나 융합문명의 길이 열린 것도 이 변화에 작용했을 것 같다.

 

1368년 명나라의 진격 앞에 아직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고 있던 원나라가 쉽게 대도(大都)를 내놓고 초원으로 물러난 것은 다른 왕조들에 비해 제국의 정체성에 아직 가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재정이 엉망이 된 제국에 집착하기보다 백여 년 전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나의 선택지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중원을 포기한 뒤에는 반격의 길을 찾을 수 없었고, 중국에 대한 원 왕조의 지배력은 그 후 20년 동안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북원(北元)의 권위가 사라진 후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성쇠는 전형적 유목세력의 양상으로 돌아갔다.

 

오이라트의 에센도, 타타르의 다얀 칸과 알탄 칸도, 중국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경제적 이득을 원했을 뿐이다. 알탄 칸이 1540년대에 여러 차례 보낸 사신을 명나라에서 죽인 후 1550년 북경 일대에 진공해 명 조정을 공포에 몰아넣었지만 호시(互市) 개설의 약속 등 약간의 양보를 얻자 쉽게 물러갔다. 그 결과 1551-2년에 대동과 선부(宣府)에서 호시가 열렸지만 명나라 측의 성의부족으로 곧 중단되고 적대관계로 돌아갔다.

 

수십 년에 걸쳐 명나라를 괴롭히던 알탄 칸이 1570년 명나라와 화친을 맺는 과정이 <장성을 둘러싼 평화와 전쟁과 교역> 96-105쪽에 소상히 그려져 있다. 알탄 칸의 부인이 무척 사랑하는 손자가 개인적인 문제로 (약혼자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는 데 불만을 품고) 명나라로 달아났을 때 명나라의 현명한 지방관이 그를 보호하며 조정에 주청하여 화친이 이뤄지게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고 나는 본다. 화친을 원하는 알탄 칸의 태도는 수십 년간 일관된 것이었고, 명나라의 어리석은 황제가 사라진 덕분에 그 뜻이 이뤄졌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정제를 이어받은 목종(穆宗, 재위 1566-1572)은 이미 융경개관(隆慶開關)’으로 남쪽에서도 합리적인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명나라에게 북로(北虜)심복지환이 아니었다. 잘못 다루면 찰과상을 입을 수 있고 심해야 골절 정도에 그치는 외과적 문제였다. 정말 심복지환에 가까운 것은 경제체제의 혈액이라 할 수 있는 화폐 문제였고, 북로보다 남왜(南倭)가 이 문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Tumed#/media/File:Mongolia_XVI.png 16-17세기 몽골 정치세력도. 중앙에 북원(北元), 서쪽에 오이라트, 남쪽에 타타르(“Tumed"란 이름으로), 동쪽에 차하르(Chahar)와 우량카이(Uriangkhai), 북쪽에 칼카(Khalkha)가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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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동전 중심의 화폐체제가 자리 잡았다. 한 무제(漢 武帝)가 기원전 118년 발행한 오수전(五銖錢)7세기 초 수()나라 때까지 통용되었고 당 고조(唐 高祖)621년 발행한 개원통보(開元通寶)는 더 오래 사용되었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 자체 화폐를 아직 가지지 않은 주변 지역에서 가져가 화폐로 쓰기도 했다.

 

중세 이전 다른 문명권에서 귀금속(-) 주화가 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중국에서 동전이 널리 쓰인 것은 상인집단의 활동만이 아니라 서민의 일상생활까지 화폐경제로 조직된 사실을 보여준다. 화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한다. (1) 교환의 수단. (2) 가치측정의 기준. (3) 가치보존의 수단. 가장 본원적 기능인 (1)에서 동전은 금-은화보다 뛰어난 효용을 가진 것이었다. 다른 문명권에서 서민의 경제활동이 물물교환에 그치거나 곡식, 직물 등 대용 화폐를 이용하는 동안 중국 농민은 자급자족을 벗어나 환금작물 재배로 나아가고 있었다.

 

11세기까지 경제 팽창과 시장의 고도화에 따라 동전 체제의 효용성이 한계에 이르면서 재화를 대신하는 문서의 사용이 민간에 유행하자 송나라에서는 같은 성격의 문서를 교자(交子)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발행하기 시작했다. ---명 여러 왕조에서 이를 따라 교초(交鈔), 회자(會子) 등 이름으로 시행했다. 세계 최초의 지폐였다. 처음에는 경화(硬貨)로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의 성격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법정화폐(fiat: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고 교환가치를 법적으로만 보장받는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리처드 폰 글란의 <Fountain of Fortune: Money and Monetary Policy in China, 1000-1700 중국의 화수분>(1996)에는 근세 초기 중국 화폐제도의 굴곡이 그려져 있다. 동전 체제의 대안으로 지폐 체제가 시도되었으나 오래 계속되지 못하고 결국 () 체제로 낙착되는 과정이다.

 

폰 글란의 책에서 내가 얻은 부수입 하나는 경제사 방면을 이해하기 어려운 데 대한 오래된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된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읽다 보니, 경제사 분야의 중요한 연구 중에는 특정한 경제발전 이론을 의식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경제사는 20세기 이데올로기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과도한 이론화 경향은 유럽중심주의와 함께 근대역사학의 한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사학에도 어느 학문분야나 마찬가지로 이론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론과 실험-관찰이 나란히 진행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학에서는 현상의 파악이 어느 정도 확실해질 때까지 성급한 이론화를 삼갈 필요가 있다.

 

화폐론에서 통상 거론되는 세 가지 기능 외에 전통시대 중국의 중요한 화폐 기능 또 한 가지를 덧붙이는 데서 근대적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폰 글란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4) 조세와 녹봉 등 국가의 출납 기능. 시장의 힘이 국가를 능가하게 되는 것은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전의 국가는 시장의 관리자일 뿐 아니라 참여자로서도 비중이 큰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리는 중국 화폐체제의 변화 과정은 시장 참여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위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가는모습이다.

 

화폐의 기능 중 교환의 수단가치 보존의 수단에는 상치되는 측면이 있다. 민간에서 재산 축적을 위해 화폐를 쌓아놓기만 하면 교환 수단으로서 기능이 약화된다. 사유재산의 과도한 축적은 유교 정치이념에서 꺼리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토지를 왕토(王土)’ 사상에 묶어놓은 것도 그 까닭이다. 재력(財力)은 인간사회에서 무력(武力) 못지않게 강한 힘을 가진 것이므로 그 통제에 질서의 중요한 원리가 있었다.

 

()은 민간의 사유재산권을 강화하는 데 효과적인 매체였다. 중국의 부호들이 재산을 보유하는 전통적 형태는 토지와 전호(佃戶)였지만 그 과도한 보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았다. 서화, 골동품, 보패 등 고가품은 가치 보존의 수단은 되지만 보유자의 권력을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화폐의 기능을 갖춘 귀금속이 소유자의 권리와 권력을 제일 효과적으로 보장해주는 사유재산의 형태였다.

 

전 세계의 은 생산량은 1500년까지 연간 50톤 수준이었다가 16세기 동안 600톤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폰 글란은 위 책 133-141쪽에서 1550-1645년 기간 동안 중국에 유입된 은의 총량을 7천여 톤으로 추정했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도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2007) 212-216쪽에서 이 추정을 받아들였다. 그 이전에 중국인이 보유하고 있던 은의 총량은 확실한 추정을 보지 못했지만, () 세기동안 들여온 분량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공급량이 엄청나게 크던 수백 년간 수요-공급의 법칙에 불구하고 은의 높은 가격이 중국에서 유지된 것은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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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Flavian_dynasty_Aurei.png 1세기 후반 로마의 금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MithridatesIParthiaCoinHistoryofIran.jpg 기원전 2세기 파르티아의 은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Al-Mu'tamid-coin.jpg 11세기 아바스 칼리프조의 금화.

https://en.wikipedia.org/wiki/Coin#/media/File:Potos%C3%AC_8_reales_1768_131206.jpg 18세기 스페인 은화. 은의 전 세계 확산에 매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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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Banknote#/media/File:Yuan_dynasty_banknote_with_its_printing_plate_1287.jpg 원나라 교초와 인판(印版)

 

 

5.

 

16-18세기 수백 년 동안 중국을 은 먹는 하마로 만든 엄청난 수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국에서 은의 용도가 확장된 것을 생각해야겠다. 은은 문명 초기부터 귀금속으로 용도를 가졌고, 화폐로서 용도가 뒤이어 자라났다. 그런데 근세 초기의 중국에서 은은 역사상 드물게 큰 힘을 가진 슈퍼화폐가 되었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달러와도 차원이 다른 엄청난 그 힘은 아직까지 결합되어 있지 않던 여러 문명권을 휩쓸면서 국가권력에게 침해받지 않는 사유재산권의 강화를 뒷받침해주었다.

 

17세기 말 명나라에 온 마테오 리치에게는 사람들이 무기를 갖지 않고 다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민간의 무기 소지 금지는 중화제국의 오랜 전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무기는 국가의 통제 밖에 있었다. 국가가 동전을 발행하며 녹봉과 납품대금을 은 한 량에 700 ()으로 지불해도 시중에서는 1500 , 2000 잎으로 거래되었다. 국가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만 손해였다. 그래서 관리들은 녹봉 외의 부수입을 얻기 위해 부정을 행해야 했고 납품업자들은 뇌물을 써 가며 올려치기를 해야 했다.

 

명나라 후기의 동전은 모두 시중에서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통용되었다. 어쩌다 마음먹고 품질 좋은 동전을 만들어도 동전을 천시하는 풍조에 휩쓸려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구리의 재활용을 위해 가마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가치 보존의 기능은 은이 절대적이었고, 교환 수단의 기능도 은이 중심이 되었다. 중국의 은 수요가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부의 축적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었고 축적된 은은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민간권력이 되었다.

 

중국의 왕조가 멸망할 때 왕조를 배반하고 침략자에게 협력하는 한간(漢奸: 매국노)에게 책임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명나라의 멸망을 놓고도 오삼계(吳三桂)를 비롯한 한간들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오삼계가 청군을 이끌고 북경을 점령한 것은 명나라가 민란으로 멸망한 뒤의 일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진정한 한간은 외부 침략자에게 충성을 옮긴 몇몇 사람이 아니라 국가보다 재물에 충성을 바친 수많은 재력가들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은의 축적을 통한 경제력의 집중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결과가 걷잡을 수 없는 민란이었다.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2006)는 최신 연구 성과를 적극 수용하기보다 기존 학설을 잘 정리한 보수적성격의 통사다.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논하는 데도 ()유교의 이념적 경직성 때문에 발전의 길을 스스로 등졌다고 하는 해묵은 관점의 소개에 치중하지만,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말미에 붙이기도 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20세기 말의 맥락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 전 세계 인류의 생활 모든 측면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명의 전면적 파괴를 늦출 만한 새로운 질서의 원리들이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면 명나라 시대의 중국이 폐쇄적 발전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평화와 복지를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실패로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 나름의 성공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139-140)

 

-청 교체는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6813()의 난이 진압되고 1683년 타이완(臺灣)의 정()씨 세력이 평정됨으로써 청 왕조의 중국 통치가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1644년 직후 청군에 앞장서서 중국 남부를 평정하고 그곳을 분봉(分封)받았던 오삼계 등 3번이 청 제국의 통합성에 걸림돌로 남아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정씨 세력의 중요성은 간과되기 쉬운데, 경제 측면에 대단히 의미가 큰 존재였다. 바다를 통한 대외관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 글란은 1660~1690년의 30년간 청나라의 디플레이션 현상에 주목한다. 물가의 극심한 하락으로 경제가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그 결정적 원인으로 폰 글란은 중국의 은 수입 감소를 지적한다. 1640년대 이후 종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수분> 232쪽 표23) 3번의 난과 정씨 해양세력을 평정한 뒤 경제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청나라의 안정된 중국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씨 세력의 창업자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복건성 천주(泉州) 출신으로 마카오를 거쳐 일본 히라도(平戶)에서 활동기반을 쌓았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인의 하청을 받아 일하다가 1627년까지 강력한 해적단을 키워 명나라 수군과 네덜란드 세력을 모두 물리치고 남중국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는 기근 때 해안 주민에게 구휼사업을 벌이고 빈민의 타이완 이주를 도와주는 등 좋은 평판을 누리며 명나라에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함을 받기도 했다. 명나라 후기의 해적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정지룡은 쇠약해진 명나라와 공생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들어설 때 명 황실 후손 하나를 옹립했다가 청군이 닥치자 큰 저항 없이 항복한 것은 청나라와도 공생 관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장남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은 함께 투항하지 않고 핵심세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정지룡을 후대하면서도 감시 하에 두었다가 1660년대 들어 정성공이 3번과 결탁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굳히자 그를 처형했다(1661).

 

본토 안에서 큰 군대를 일으킨 3번에 비해 주변부에 있던 정씨 세력은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었지만, 중화제국 체제에 대한 위협은 더 심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번의 난이 사건의 시간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면 정씨 세력의 성쇠는 문명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번 평정에 따른 영토 통합보다 정씨 세력의 격파로 해양주권을 확보하고 화폐시장을 통합하여 30년 디플레이션을 극복한 것을 대청제국완성의 더 중요한 계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https://baike.baidu.com/pic/%E9%83%91%E8%8A%9D%E9%BE%99/2180310/1/4e4a20a4462309f790520e31ff451bf3d7ca7bcb78f6?fr=lemma&ct=single#aid=0&pic=4bed2e738bd4b31c23ebc07f8ad6277f9f2ff81b 정지룡 초상. 일본에 거점을 두고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과 연계하면서 해적사업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명성이 후세에 아들 정성공만큼 떨치지 못한 것은 명나라 충신이라는 포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청나라에 투항한 진의는 확인할 길이 없다.

https://baike.baidu.com/pic/%E9%83%91%E6%88%90%E5%8A%9F/142/1/d8f9d72a6059252d4b568766379b033b5bb5b90b?fr=lemma&ct=single#aid=0&pic=d4239b355f6f5e5d91ef3924 타이난(臺南)의 정성공 동상. 서양에 “Koxinga"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실이 재미있다. 정씨 세력이 옹립한 융무제(隆武帝)에게 황실의 성을 하사받았다 하여 국성야(國姓爺)“를 자칭했는데 그것을 후젠(福建)지방 발음으로 적은 것이다. 청나라로부터 독립된 세력임을 주장하고 반청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명 왕조와의 관계를 과장해서 선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