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서 열린 시스템닫힌 시스템에 관한 생각을 적으면서 칼 포퍼의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열린사회와 그 적들>(1945)이 생각났다. 40여 년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을까 생각하며 우선 <위키피디아>에 실린 요약을 읽어보니 읽을 생각이 없어진다. 요약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당대의 주요 플라톤 연구자들과 달리 포퍼는 플라톤의 사상을 소크라테스로부터 떼어냈다. 후년의 플라톤은 스승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성향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특히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전체주의를 옹호한 것처럼 플라톤이 그렸다고 포퍼는 비판했다. 포퍼는 사회의 변화와 불만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을 격찬하면서 그를 위대한 사회학자로 추켜세우면서도 그가 제안한 해법을 배척했다. 포퍼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으키고 있던 인도주의적 이념들을 그가 사랑하는 열린사회의 출산의 고통으로 보았다. 플라톤이 거짓말, 정치적 기적, 미신적 금기(禁忌), 진실의 억압, 그리고 야만적 폭력까지도 정당화한것은 그가 민주주의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포퍼는 주장했다. 플라톤의 역사주의 경향은 자유민주주의가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한 결과라고 포퍼는 느꼈다. 또한 귀족의 일원이며 한때 아테네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의 친척으로서 플라톤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공감하면서 평민을 경멸했다고 포퍼는 보았다.”

 

이 책이 나온 것은 온 세계가 전체주의의 충격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30년 후 내가 이 책을 읽을 때도 자유민주주의의 열린사회가 한국사회의 열망이었다. 그러나 45년이 더 지난 지금 나는 포퍼보다 플라톤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역사 공부 때문에 역사주의에 기울어진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열린사회의 한계와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자신 닫힌 것보다 열린 것을 좋아하는 끌림이 있다. 어쩌면 이 끌림은 타고난 성정보다 내가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린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에 따라 닫힌 것을 좋아할 때도 있고 열린 것을 좋아할 때도 있는 것이 사람의 성정이다. 생태계 위기를 어떻게 의식하느냐에 따라 열린 시스템닫힌 시스템의 선택도 갈릴 것이다.

 

지난 회에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에서 시간이 지나면 명나라 시대의 중국이 폐쇄적 성장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평화와 복지를 역사가들이 높이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대목을 인용했다. 명나라 때 고도로 발달했던 중국의 물질문명이 발전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유럽에 추월당한 사실을 하나의 실패로만 규정해온 것과 다른 관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성장의 길에 개방적 성장만이 아니라 폐쇄적 성장(self-contained growth)”의 길도 인정하는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술과 경제의 성장은 자연(nature)과 인성(human nature)에 변화를 가져온다. 궁극적으로는 성장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그에 따른 변화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완급을 조절해서 균형을 취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조절의 필요를 부정하고 빠른 성장만을 바라보는 개방적 성장과 적극적 조절에 노력하는 폐쇄적 성장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근세 이전 유라시아대륙 여러 문명권의 발전 양상을 보면 중국문명의 고립성이 분명하다. 파미르고원과 중앙아시아초원 서쪽의 여러 문명권이 서로 뒤얽힌 상황에 비해 동쪽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하나의 문명권이 하나의 제국으로 조직된 안정된 상태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안정된 상태 속에서 닫힌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천하(天下)’사상이 자리 잡았다. 인식 가능한 모든 세계의 질서에 제국이 책임진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의 영향 아래 발전-확장보다 질서-균형을 중시하는 것이 대부분 기간 중화제국의 운영 기조가 되었다.

 

한동안 많은 동아시아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를 찾는 데 몰두한 것은 발전과 확장을 숭상하는 근대세계에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발전과 확장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는 21세기에 와서, 문명의 역사 속에는 그와 반대되는 경향도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경향이 당시 사람들의 행복을 늘리고 고통을 줄이는 데 공헌한 측면을 찾는다면 지금 세상에도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Open_Society_and_Its_Enemies#/media/File:The_Open_Society_and_Its_Enemies,_first_edition,_volume_one.jpg <열린사회와 그 적들> 초판 표지. “열린사회를 열망하던 20세기 중엽의 시대 분위기를 대표한 책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Eurasia#/media/File:Asia-map.png

https://en.wikipedia.org/wiki/Eurasia#/media/File:Eurasia_(orthographic_projection).svg 유라시아대륙. 문명의 발생과 확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진 곳이었다는 사실을 재레드 사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2.

 

유라시아대륙은 약 5500만 평방km의 면적으로 전 육지의 36.2%가량이다. 지금은 세계 인구의 약 70%가 이 대륙 위에서 살고 있는데, 근세 이전에는 그 비율이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륙이 (북아프리카의 지중해-홍해 연안을 포함해서) 인류문명 발전의 주무대였다.

 

동서로 길게 펼쳐진 유라시아대륙의 가운데쯤, 동경 90도 언저리에 하나의 장벽이 있었다. 아열대 습지에서 산악지대와 사막을 지나 초원과 동토지대로 이어지는 이 장벽은 오랫동안 동서 간 교통을 어렵게 만들어 문명권의 경계선이 되었다. 이 경계선의 서쪽에서는 여러 문명권이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나란히 어울린 반면 동쪽에서는 기원전 3세기 이래 중화문명의 압도적 주도권이 2천 년간 이어졌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Guns, Germs, and Steel 총 균 쇠>(1997) 419-420쪽에서 중국문명의 고립성과 통합성을 설명했다. 황하 유역과 장강 유역의 생산성 높은 지역이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통합된 후로는 그 방대한 경제적-문화적 역량이 주변 지역, 나아가 동아시아 일대를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벽의 서쪽에는 그처럼 압도적 규모의 생산력을 가진 지역이 따로 없기 때문에 여러 문명권이 병립하던 상황과 대비된다.

 

중화문명권의 고립성이 물샐 틈 없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인도문명, 페르시아문명과 교섭이 제국 초기부터 있었고, 이 교섭의 크기는 (서방 문명권들 사이의 상호 교섭보다) 작았지만 장기간 축적되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중화문명권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곤 했다. 중국사의 흐름을 치란(治亂)의 반복으로 흔히 보는데, 의 상태란 장기간 축적된 서방문명의 영향을 소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의 상태가 어느 기간 지난 후 의 상태로 번번이 돌아간 것은 궤도이탈 사태에 이를 만큼 원심력이 구심력보다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세기 이후 장벽 서쪽에 이슬람문명이 확장되면서 중국과 서방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 관계에서 매체 역할을 맡아 온 중앙아시아 유목세력에 대한 중국 측 통제력이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대폭 약화된 것이다. 당나라 후기부터 중화제국에 대한 유목세력의 군사적 우세가 오래 계속되다가 13세기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으로 귀착되었다.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은 중화문명권의 고립성이 끝날 (적어도 전과 다른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 큰 계기였다. 몽골제국이 그 정복 영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했다면 중국은 그 한 부분이 되어 다른 부분들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4한국(四汗國)으로 분열되고, 중국은 원 왕조로 중화제국의 모습을 회복했다. 4한국의 분열 원인은 몽골 지도부의 불화보다 아직까지 세계제국의 형성을 위한 조건이 부족했던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원나라 초기 쿠빌라이 시대에는 아직도 세계제국의 꿈이 남아있었다. 아흐마드와 상가 등 재정 확장에 주력한 이재파(理財派)가 그 꿈을 대표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통치의 안정을 앞세운 한법파(漢法派)의 승리로 몽골세계제국의 꿈은 끝나고 말았다.

 

원나라가 초원으로 물러간 후 명나라는 닫힌 제국으로 돌아갔다. 영락제(永樂帝)가 정화(鄭和) 함대의 파견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든 대외관계를 국가의 통제 안에 두려는 기본 목적은 어디까지나 닫힌 제국을 지향한 것이었다. 발레리 한센은 자신의 중국통사에 <열린 제국(The Open Empire)>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적절한 제목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목의 취지를 한센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새로운 접근법에 따라 1800년 이전의 중국을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제국은 그 형성 과정에서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 후에도 긴 역사를 통해 외부의 영향에 열린 상태를 유지했다. 외부의 영향이 차단된 센트럴 킹덤이 아니었다.” (5)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과 비교하면 열린 모습이 맞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근대역사학이 도입된 후로는 그런 밀봉 제국의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가 없어졌다. 인도에서 지중해까지, 서방에 존재한 여러 제국들과 비교해서 볼 때 중국은 닫힌 제국이었던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hina#/media/File:China_satellite.png 거대한 농업문명권의 입지조건을 중국의 위성사진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Mongol_Empire#/media/File:Asia_in_1335.svg 1335년경의 정치지도. 원나라는 서방의 3한국과 분리되어 동양의 길로 돌아갔다.

 

 

3.

 

중화제국은 황하 유역 북중국과 장강 유역 남중국의 통합으로 세워졌다. 한나라 때는 북중국의 비중이 컸지만 남북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남중국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자라나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송나라 때 복건(福建), 광동(廣東) 등 영남(嶺南) 지역의 개발이 진척되면서 이를 포괄하는 남중국의 경제력이 북중국을 압도하게 되었다.

 

영남 지역의 경제력은 자체 생산력만이 아니라 해외교역에도 근거를 둔 것이었다. 해외교역은 농업생산에 비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기 쉽다. 중국의 동남해안 지역에는 교역의 이득을 발판으로 한 민간세력이 크게 발달했다. 홍무제(洪武帝)가 공신들을 대거 살육한 옥사(獄事)가 두 차례 있었는데, 그중 호유용(胡惟庸)의 옥사(1380)가 일어난 계기는 참파(占城)의 조공사절이 온 사실을 황제에게 감춘 일이었다. “조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교역이었고, 교역의 이득을 중간에서 가로챈 문제였던 것이다. 명나라 공신 집단이 대부분 남중국 출신이어서 교역의 이득에 밝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정화 함대를 일으킨 것도, 남중국의 민간세력을 견제하려는 뜻으로 이해할 측면이 있다. 건국 공신으로 조정을 장악한 남중국 세력의 확대를 막기 위해 북경으로 옮겨가고 남중국의 교역경제를 통제하기 위해 대함대를 건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화 함대의 활동기간에도 계속되었던 해금(海禁)정책은 국가의 교역 통제를 꾀한 것인데, 남중국의 민간세력 억제에도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로는 정책의 실행력이 약화되어 밀무역이 늘어나고, 명목만 남은 해금정책은 밀무역 세력들의 경쟁 배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정제(1521-1566) 시기의 왜구 문제를 보면 밀무역의 이권이 조정을 뒤흔드는 듯한 모습이 종종 보인다. 가정제가 죽은 직후의 융경개관(隆慶開關, 1567)은 밀무역을 둘러싸고 누적된 비리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밀무역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은()의 수입이었다. 폰 글란은 <중국의 화수분> 133-141쪽에서 1550-1645년 기간 동안 중국에 유입된 은의 총량을 7천여 톤으로 추정했는데, 그 대부분이 밀수품이었다. 금과 대비한 은의 가격이 다른 지역보다 50% 가까이 높았던 명나라에서 은 수입은 밀무역업자와 그 배후세력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 비단, 도자기 등 중국 백성의 노고가 들어간 수출품의 대가는 대부분 은의 형태로 들어와 부호와 세력가의 수중에 쌓이면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힘을 키웠다.

 

<중국의 화수분> xiii쪽의 지도1에 명나라 때 동전경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북직예(北直隸, 북경 일대)와 남직예(南直隸, 남경 일대), 그리고 그 사이의 산동(山東)성과 하남(河南)성 일부가 포함되는 정도다. 동전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은 소민(小民)의 경제활동이 활발했다는 뜻인데 그 범위가 매우 좁다. 명 말기의 민중봉기가 섬서(陝西)성과 산서(山西)성을 휩쓴 다음 장강 유역으로 번져간 흐름도 동전경제가 취약한 곳일수록 민생이 불안하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명 말기 정치가들도 은의 과도한 지배력을 걱정했다. <중국의 화수분> 199쪽에 서광계(徐光啓, 1562-1633)<농정전서(農政全書)> 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를 논하려면 먼저 그 뜻을 밝혀야 한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 는 동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와 달리 오로지 은만이 부의 척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동전도 은도 그 자체가 부가 아니다. 부의 표시일 뿐이다. 옛날 성왕들이 말씀한 부는 백성을 먹일 곡식과 입힐 옷감이었다. 그래서 부를 늘리는 큰 길은 부를 생산하는 백성을 늘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제 은과 동전이 부를 대신한다면, 은과 동전을 늘림으로써 민생이 윤택해질 것인가? 한 집안을 놓고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온 천하를 놓고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은과 동전이 늘어나면 곡식과 옷감의 값이 올라가고 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중농주의 성향의 이 논설에 상업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아쉽다는 논평도 가능하겠지만, 중농주의는 중화제국 이념의 한 중요한 축이었다. 국가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무력만이 아니라 경제력도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은을 매개로 한 민간 경제력의 무질서한 성장이 명나라 제국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Xu_Guangqi#/media/File:Kircher_-_Toonneel_van_China_-_Ricci_and_Guangqi.jpg 서광계와 마테오 리치. 자크 제르네가 1982<Chine et christianisme, action et réaction 중국과 기독교: 작용과 반작용>에서 리치가 서광계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측면만이 아니라 서광계가 리치를 유교로 개종시킨 측면도 봐야 한다고 한 지적이 당시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 “Gernet shock”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충격적이었다.

 

 

4.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청 왕조의 시조로 알려졌지만, 그 자신에게는 제국 창업의 야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파멜라 크로슬리가 <The Manchus 만주족의 역사>(1997) 3(47-70)에서 소상히 밝혔다. 명나라의 조공국 정도 독립성을 바라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주족 흥기 초기 상황에 대한 크로슬리의 실증적 고찰이 가치 있는 것은 만주족의 정복 의지를 부풀린 전통적 역사서술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청나라 관변 기록은 청 왕조의 천명(天命)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만주족에 반감을 가진 한족주의자들은 그 침략성을 강조하기 위해, 서로 다른 목적으로 같은 주장을 함께 해왔다.

 

몽골제국 초창기부터 만주 지역은 몽골 세력 아래 놓여 있었고 누르하치 시대까지 여진족은 몽골에게 눌려 지내고 있었다. 중원에서 물러난 북원(北元)은 몽골 동부, 만주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만주 지역에는 세력을 지키고 있었다. 1582년 알탄 칸이 죽은 후 투멘 칸(Tumen Khan, 圖們汗, 1539-1592)이 세력을 확장하고 세첸 칸(Sechen Khan 徹辰汗)을 거쳐 리그단 칸(Ligdan Khan 林丹汗, 1588-1634)에게 이어졌다.

 

여진족은 명과 몽골 두 세력의 틈새에 끼어 있었다. 만주 방면의 명 세력은 1570년대 이후 이성량(李成梁, 1526-1618) 군벌로 변모하고 있었다. 15세기 중엽에 조선에서 이주한 집안 출신인 이성량은 40세에야 관직에 나섰으나 곧 요동(遼東) 총병(總兵)이 되어 수십 년간 지역을 호령했다.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의 주축은 요동병이었고 그 대장 이여송(李如松)은 이성량의 아들이었다.) 1591년에 수많은 비리가 적발되어 면직되었지만, 그가 지휘권을 내놓자 지역의 군사적 통제가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1601년에 복직되었다.

 

누르하치가 초년에 (위협적 존재가 될 것을 알아보고) 자기 목숨을 노리는 이성량의 마수를 기적적으로 벗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후견 아래 세력을 키웠다. 1583년 이성량의 작전 중에 그를 따르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은 일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명나라에 대한 칠대한(七大恨)’ 중에 첫 번째로 들어있지만 두 사람을 죽인 것은 누르하치 집안의 경쟁세력이었고 이성량의 뜻이 아니었다. 그 사건 후에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를 받았고, 얼마 후 두 사람을 죽인 원수를 이성량이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어 복수를 하게 해주었다. 누르하치가 1590년 북경에 조공을 간 것도 이성량의 후견 덕분이었다. 후금 건국은 1609년 이성량의 은퇴 후 와해되는 그의 세력 안에서 누르하치가 지분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크로슬리는 누르하치 세력의 초기 상황을 밝히는 데 1595년 조선 사신으로 누르하치를 방문한 신충일(申忠一)<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많이 인용했다. 이 기록은 누르하치가 아직 집권적 군주권을 확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바필드 역시 <Perilous Frontier 위태로운 변경>에서 누르하치가 죽을 때까지 집권적 군주제가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8기제를 만들고 그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집중한 것을 보면 그는 부족 정치의 뛰어난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은 지역에 그칠 뿐, 제국 차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258) 후금 건국을 전후한 세력 확대도 확고한 군사적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본다. (254-255)

 

1626년 누르하치를 계승한 훙타이지(Hung Taiji 皇太極, r. 1626-1642)가 비로소 군주권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1636년 대청(大淸)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직도 명나라 천하를 빼앗겠다는 뜻은 아니고 요나라와 금나라가 송나라와 천하를 나눈 것처럼 대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것이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조선과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 것이었고, 1636년의 병자호란은 조공국 조선을 명나라로부터 빼앗겠다는 목적이었다.

 

1644년 청군의 북경 점령 상황에 관한 기록도 만주족의 정복 의지를 꾸며 보이는 것이 많다. 청나라 기록에는 청의 천명(天命)이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고, 반청(反淸) 논설에서는 청나라의 야욕이 확실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1629년 훙타이지의 북경 공격을 양쪽 다 그 근거로 거론한다. 그러나 이 공격의 진짜 표적은 북경이 아니라 원숭환(袁崇煥)이었고 그 목적은 만주 지역의 확보에 있었다.

 

원숭환이 1622년 요동에 부임할 때는 사얼후(薩爾滸) 전투로 명나라의 방어력이 무너진 뒤였다. (1619년의 이 전투에 광해군이 보낸 조선군도 참전했다.) 원숭환은 요하 서쪽으로 물러난 방어선을 강화했고 1626년 누르하치의 이례적인 패배와 그 부상으로 인한 죽음도 원숭환의 방어력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방어에만 전념하는 원숭환군을 서쪽으로 우회해 내몽골 방면에서 북경을 공격했고 원숭환은 그 책임으로 처형당했다. (1550년 알탄 칸의 침공을 뇌물로 회피했다가 처형당한 구란(仇鸞)과 같은 죄목이었다.) 훙타이지는 명 조정의 어지러운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원숭환이 제거된 후 명나라의 요하 방어가 무너지고 산해관(山海關)-영원(寧遠)이 대치선이 되었다. 청군의 침범을 명군이 저지하는 양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과에 따른 소급 해석일 수 있다. 요동 탈환을 위한 명군의 진공을 청군이 방어하는 양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군대 규모는 전 중국의 정복은커녕 북경 공략조차 바라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북경이 민중반란으로 무너진 후 바라지도 않는 천명(天命)이 청나라에게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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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ike.baidu.com/pic/%E8%A2%81%E5%B4%87%E7%84%95/132662/1/476217f7f17d5f7b720eecae?fr=lemma&ct=single#aid=0&pic=6159252dd42a283459e4deee52b5c9ea14cebf91 원숭환은 한족 영웅으로 극도로 미화된 인물이라서 관련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대략 통설에 따라 서술했다.

https://baike.baidu.com/pic/%E6%B8%85%E5%A4%AA%E7%A5%96%E5%8A%AA%E5%B0%94%E5%93%88%E8%B5%A4/9523044/1/55e736d12f2eb9380c1aad66df628535e5dd6f2b?fr=lemma&ct=single#aid=1&pic=55e736d12f2eb9380c1aad66df628535e5dd6f2b 누르하치의 야심은 천하제국은커녕 동북지역의 패권도 아닌, 여진족의 독립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https://baike.baidu.com/pic/%E7%88%B1%E6%96%B0%E8%A7%89%E7%BD%97%C2%B7%E7%9A%87%E5%A4%AA%E6%9E%81/1323439/1/8435e5dde71190ef7733d99fc51b9d16fcfa60a1?fr=lemma&ct=single#aid=1&pic=8435e5dde71190ef7733d99fc51b9d16fcfa60a1 훙타이지는 대청(大淸)제국을 선포했지만 명나라의 천하를 몽땅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gdan_Khan#/media/File:NEAsia_1620-1630.jpg 1620년대 명-여진-몽골의 각축 상황. 여진이 만주를 석권하고 리그단 칸의 몽골이 밀려나 있다.

 

 

5.

 

16444월 청군의 진군 과정을 살펴보면 청나라에게 아직 천하 제패의 뜻이 세워져 있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이자성(李自成)군이 1644319(당시 역법 기준) 북경 점령 후 가장 서두른 일 하나가 산해관의 오삼계(吳三桂)군 접수였다. 도르곤(多爾袞, 1612-1650, 순치제(順治帝, r. 1643-1661)의 숙부이자 섭정)의 청군이 심양(瀋陽)을 출발한 것은 49일이었다. 422-23일 산해관에서 오삼계군과 함께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52일 북경에 입성했다. 심양에서 북경까지 불과 24일간의 전광석화 같은 진군은 청군의 능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삼계군의 향배가 결정적인 열쇠였고 청군은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다.

 

얼떨결에 북경을 차지한 후 청나라 지도부의 노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천명 같은 것 쳐다볼 필요 없이 만주 귀족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앞세웠고 또 한 갈래는 명나라보다 더 멋지게 천하를 꾸려나가기를 바랐다. 후자는 황제를 중심으로 모였고 전자는 섭정을 중심으로 세력을 뭉쳤다. 순치제와 강희제(康熙帝, r. 1661-1722)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섭정 기간이 길었고, 섭정을 맡은 도르곤과 오보이(鳌拜, 1610-1669)는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다.

 

도르곤은 섭정 7년 만에 사냥 중 사고로 죽었는데 그 직후의 대대적인 탄핵을 보면 그 죽음이 과연 사고였는지 의문이 든다. 오보이는 섭정 8년 만에 16세 소년황제의 친위쿠데타로 무너졌다. 1669년 오보이가 제거된 후 청나라의 천하제국 건설은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청나라의 새 천명을 인정하는 자세에 지역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민란의 파국을 처절하게 경험한 북중국 주민들은 청나라 통치를 최선의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중화제국을 모방한 제국 체제를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온 청나라가 민란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믿음직했다.

 

그러나 강고한 민간세력이 자리 잡고 있던 남중국은 달랐다. 청의 정복에 대한 남중국 지역의 치열한 저항은 화이관(華夷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화이관에는 남북 간의 차이가 없었다. 그보다는 민간세력의 강약 차이로 이해할 측면이 커 보인다. 명나라 때 남중국의 민간세력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실력을 키웠고 말기의 민란 중에도 자기 지역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청군의 진군 앞에 명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데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물론 왕조를 위해, 중화문명을 위해 순절한 열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 체제에 유격장군으로 편입되어 있던 해적 수령 정지룡(鄭芝龍)이 명나라 황실을 받드는 시늉만 하다가 청나라에 붙어버린 것도 당시 지방 실력자의 또 하나 전형이었다.

 

청나라는 1662년까지 명나라의 판도를 모두 수습했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鄭成功)이 대만(臺灣)에 근거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대만은 중화제국의 판도 밖에 있었다.) 남방 정벌의 주축은 항복한 명나라 군대를 편입시킨 한인팔기(漢人八旗)였다. 그들이 유용했던 것은 전투력이 뛰어나서보다 현지세력과 타협-절충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1645년의 변발령(辮髮令) 시행에 융통성을 두는 등) 정벌이 끝난 뒤에도 정벌군 사령관에게 정벌 지역의 통치를 맡긴 것이 삼번(三藩)의 단초였다.

 

삼번이란 운남(雲南)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尚可喜)와 복건의 경중명(耿仲明)이었다. 그들은 평서왕(平西王), 평남왕(平南王), 정남왕(靖南王)의 왕호를 받고 각자의 지역을 독립국처럼 통치했다. 해상교역의 이권을 끼고 있거나(광동, 복건) 광물자원이 풍부하다는(운남) 특성 때문에 중화제국의 경제구조에 큰 영향력을 가진 지역들이었다.

 

오보이가 이끌던 청나라 귀족세력은 중앙집권화를 꺼리는 입장에서 삼번의 분권화를 방조했다. 강희제는 오보이 제거 후 삼번에 대한 통제를 서서히 강화해 나갔다. 167370세의 상가희가 은퇴와 함께 번국(藩國)을 아들 상지신(尙之信)에게 물려줄 것을 청하자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불허했다. 2년 전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의 세습을 허락한 것과 다른 조치였다. 이 변화에 경계심을 품은 번왕들이 조정을 떠보기 위해 짐짓 번의 철폐를 주청했다가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반란에 나섰다.

 

한나라가 창업 근 50년 만에 오-7국의 난을 제압하고 제국의 본궤도에 오른 것처럼 청나라는 입관(入關) 40년 만에 제국의 본궤도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희제의 61년 치세에 이어 옹정제(雍正帝, 1722-1735)와 건륭제(乾隆帝, 1735-1795)의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 중화제국의 번영은 인구가 약 15천만 명에서 약 3억 명까지 곱절로 늘어난 사실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제국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완성 뒤에는 무엇이 따라올까?

 

https://en.wikipedia.org/wiki/Li_Zicheng#/media/File:Southern_Ming.png 1644년 말 중국의 군사적 상황. 하남-섬서의 이자성 세력, 사천의 장헌충(張獻忠) 세력이 남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Qing_dynasty#/media/File:Qing_Empire_circa_1820_EN.svg 청 제국의 중국 평정과 주변부 통제력의 확대 과정

https://baike.baidu.com/pic/%E4%B8%89%E8%97%A9%E4%B9%8B%E4%B9%B1/616398/1/8435e5dde71190ef52a0ffedc01b9d16fdfa60ac?fr=lemma&ct=single#aid=1&pic=bba1cd11728b47104bcc1be5c1cec3fdfc03233c 삼번의 난 형세도. 짙은 녹색이 삼번의 본거지이고, 한때 장강 이남과 서부지역 대부분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