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도양에 유럽인의 선단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97,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였다. 149778일 리스본을 떠난 네 척의 배는 1216일 남아프리카의 동남해안, 10년 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도달한 지점을 지나 인도양에 들어섰다. 동아프리카 해안을 북상해 414일 말린디(Malindi, 케냐의 항구도시)에 도착한 다 가마는 아랍인 항해사를 고용해서 인도의 칼리쿠트(Calicut, 지금의 Kozhikode)를 향해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424일 말린디를 떠나 520일 칼리쿠트에 도착했으니 매우 순조로운 항해였다.

 

거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가져온 상품도 예물도 현지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푸대접을 받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829일에 서둘러 칼리쿠트를 떠났다. 바람이 맞지 않을 때 억지로 떠났기 때문에 20여 일에 건너간 항로를 100여 일 걸려 아프리카 해안까지 돌아오는 동안 선원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남은 사람들 중에도 괴혈병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한 척의 배를 버리고 두 척만으로 귀로에 나서서 14997-8월에 포르투갈에 돌아왔다.

 

다 가마 자신은 이 항해를 실패로 생각한 것 같다. 그의 항해일지는 서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1499425일에 중단되는데, 그 직후 다 가마는 배 한 척을 먼저 귀국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산티아고 섬에서 병이 위중해진 동생을 돌보겠다며 마지막 배까지 부관에게 맡겨 귀국시켰다. 선장으로서나 함대 사령관으로서나 어울리지 않는 이 행동은 실패의 책임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막상 그가 몇 주일 후 다른 배에 편승해 리스본에 들어왔을 때는 열렬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교역을 벌이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주워오다시피 한 약간의 화물이(후추 등) 대단히 값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170명 가운데 55명이 살아 돌아온 이 항해를 성공으로 여겼기에 인도에 원정대 파견하는 것이 포르투갈의 연례 사업이 되었을 것이다. 1500년 출항한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는 칼리쿠트에 가서 협정을 맺고 상관(商館, factory)을 열었지만 곧 토착 상인들과 분쟁이 일어나 수십 명이 살해당했다. 카브랄은 이 사태를 현지 군주의 책임으로 돌려 항구의 배들을 약탈하고 수백 명을 살육하는 등 유럽 기독교인의 위엄을 떨치고 돌아왔다.

 

다 가마와 카브랄 이래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은 현지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번스틴은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그렸다.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시아의 교역 세계가 ‘평화의 낙원’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인들이 관세를 지불하고, 현지 군주에게 예물을 바치고, 해적의 활동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만 한다면 인도양은 ‘자유의 바다’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가 해상운송을 통째로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상인들에게나 군주들에게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1498년 어느 날 전투태세를 완비한 바스코 다 가마가 칼리쿠트 항구에 들어서면서 이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인도양에 유럽인이 나타났을 때 그 해상전투력이 현지인을 압도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은 짧은 시간 내에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150923일의 디우 해전(Battle of Diu)이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해권을 열어준 결정적 계기였다.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의 디우 포구에서 벌어진 이 해전은 현지세력과 포르투갈인 사이의 전면전이었다. 오토만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이 함대를 보내 구자라트 술탄과 연합함대를 만들었고, 베네치아도 많은 지원을 보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중동 지역을 거치는 기존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의 해로 개척을 저지하는 입장이었다.

 

양측 모두 카라크(Carrack)가 주력선이었다. 카라벨(Caravel)에 이어 개발된 카라크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대포를 적재하기 좋은 구조여서 카라벨과 함께 대항해시대 초기의 주역이었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지중해에서 계속되는 접촉과 충돌을 통해 대포도 카라크도 이슬람세계에 잘 보급되어 있었다. 디우 해전에 동원된 카라크는 현지세력이 10, 포르투갈이 9척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가 포르투갈 측의 완승으로 끝난 까닭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함선과 대포의 우열보다 임전 자세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전투의 준비와 진행 과정을 보면 포르투갈인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든 점이 제일 눈에 띈다.

 

 

2.

 

양측의 임전태세가 왜 이렇게 달랐을까? 포르투갈 측이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상황에 처해 있던 사실부터 생각해야겠다. 다 가마의 제1차 원정대의 170명 중 55명이 살아 돌아온 사실을 앞서 말했다. 카브랄의 제2차 원정대 역시 13척의 배 중 6척만이 돌아왔다. 이 시기 장거리 항해에 나선 유럽인 중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 숫자보다 폭풍이나 괴혈병의 희생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몸 사린다 해서 살아 돌아갈 희망이 크지 않고, 돌아가기만 하면 팔자를 고칠 소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하나의 대륙으로 알고 있지만 유럽인에게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이남(Sub-Saharan Africa)’이 별개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로코에서 이집트까지 지중해에 면한 지역과 홍해에 면한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까지는 유럽인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곳이었다. 이슬람이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남쪽으로 사막 너머에는 산업이 미개하고 정치조직이 느슨한 광대한 초원과 열대우림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아프리카대륙의 중-남부에 농업문명 전파가 늦었던 까닭은 다이아몬드가 <Guns, Germs, and Steel , , > 179-180쪽에서 설명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포르투갈에게 적대적인 지역이었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곳이었고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었다. 반면 사하라이남 지역은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었다. 15세기 중엽에 포르투갈인은 서아프리카 지역에 진출했다. 서아프리카는 상아해안, 황금해안, 노예해안등 이름이 붙은 것처럼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곳이었다. 오랫동안 사하라사막의 대상(隊商)을 통해 다량의 황금과 노예를 이슬람권에 공급해 온 이곳에 포르투갈이 해로를 뚫으면서 해상활동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까지는 이슬람권의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초원지대(sahel)를 넘어 열대우림부터는 이슬람도 아직 침투하지 못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링컨 페인은 <The Sea and Civilization 바다와 문명> 387쪽에 아프리카 남부 지역 진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이슬람의 영향과 아랍어 사용자가 있는 지역을 넘어서면 항해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보 수집에 지장이 생겼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들이 대륙 남단을 돌아 동아프리카의 아랍어 사용 지역에 도달할 때까지 이 문제가 계속되었다. 언어 소통이 안 되고 참고할 만한 현지인의 연안항해 경험도 없는 지역에서 14세기 후반 내내 포르투갈인의 활동이 확장되기 어렵다가 인도양에 들어서자 확장이 빨라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는 이슬람 항구도시들이 적도 이남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남아프리카를 돌아 해안을 따라 북상하던 다 가마 함대는 모잠비크에서 이슬람권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무슬림을 가장하고 현지 군주에게 접근하다가 실패했다. 그러나 일단 이슬람권에 들어와서는 이용할 만한 틈새를 찾을 수 있었다. 케냐의 몸바사(Mombasa)에서는 쫓겨났지만 몸바사와 적대관계에 있던 인근의 말린디에서 인도양 횡단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1487년 디아스의 항해 이래 포르투갈 원정대는 서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사이를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는 대신 서남쪽으로 남대서양 깊이 들어갔다가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1500년 카브랄의 함대는 이 항로를 예정보다 서쪽으로 벗어나는 바람에 뜻밖에 브라질에 상륙하게 되었고, 후에 스페인이 독점하는 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을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차지하는 단초가 되었다.

 

남대서양을 크게 우회하는 이 항로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항로보다 거리는 멀지만 당시의 범선 항해에 적합한 조건이어서 유럽인의 인도양 진출에 큰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위험이 큰 항로였다. 다 가마 함대는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레온을 떠난 후 90여 일 만에 남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 기간이 괴혈병의 한계선이었다.

 

괴혈병은 30일 이상 비타민C 공급이 끊기면 증세가 나타날 수 있고 90일 이상이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렇게 긴 기간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은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귤류 섭취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널리 확인되어 영국 해군에서 제도화된 것은 179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3백년간 약 2백만 명의 선원이 괴혈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화 함대가 선상에 채마밭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남대서양 항로는 풍랑도 예측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난파의 위험이 컸고, 일정이 조금만 길어지면 괴혈병의 위협이 크게 늘어났다. 인도양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런 위험이 줄어들었다. 그 위험을 뚫고 인도양에 들어선 포르투갈 선원들이 어떤 상황에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자세로 임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인도양 사정에 익숙해진 후 포르투갈인들이 본국과의 무역보다 현지의 중계무역에 더 힘을 쓰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3.

 

인도양 진입 초기 포르투갈인의 폭력성을 대표한 인물이 바로 다 가마였다. 1502년 제4차 포르투갈 원정대를 이끌고 갔을 때 특히 엽기적인 소행이 많이 전해진다.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는 짓이 예사였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칼리쿠트 군주가 사절로 보낸 승려를 첩자라 하여 혀와 귀를 자르고 개의 귀를 꿰매 붙여 돌려보낸 일이다. 4백여 명 순례자를 태운 배를 바다 한가운데서 나포해 참혹하게 약탈한 다음 사람들이 탄 채로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다.

 

테러리즘은 전쟁에 늘 이용되어 온 전술-전략이다. 문제는, 인도양의 현지인들은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러 들어온 것이다. 디우 해전의 경위를 봐도 현지세력의 상황 인식이 허술했다. 이집트와 오토만이 함대를 보낸 것은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통한 기존 교역로가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우 항구의 장관은 두 길 보기를 했다. 이집트-오토만 함대에 협조하는 시늉만 하다가 포르투갈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얼른 발을 빼고 잡아둔 포로를 바로 반환했다. 디우 입장에서는 포르투갈 배든 무슬림 배든 교역이 이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레반트 지역 침공 때도 대다수 현지세력은 이슬람-기독교의 대립의식 없이 미시적 득실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십자군에게 틈새를 만들어주었다. 당시의 무슬림에게는 이교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면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큰 압력을 일으키고 수십 년이 지나자 비로소 전면적 항전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인도양의 현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포르투갈 세력이 짧은 시간 내에 항로의 주요 거점들을 모두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어느 항구에도 성곽 등 견고한 방어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고 일반 선박의 무장 수준이 낮은 이유도 있었다. 유럽인의 교역활동에는 무력이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에 선박도 항구도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인도양은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약간의 해적이 있었지만 선박을 납치해도 적정선의 몸값을 요구하는 정도로, 적극적인 토벌의 필요성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양의 교역은 많은 이득을 창출하는 사업이었고, 상인과 무역업자들도, 항구를 관리하는 공권력도, 간간이 끼어드는 해적들도, 이 교역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교란시키는 일 없이 자기 몫을 누리며 지내고 있었다. (차우두리는 <Trade and Civilisation in the Indian Ocean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5장에서 인도양 일대에 안정된 형태로 널리 자리 잡은 이 교역 패턴을 거점 교역(emporium trade)’으로 설명했다.) 15세기 초에 명나라 함대가 큰 규모의 무력을 싣고 나타났지만 이 생태계를 교란하기보다는 참여해서 한 몫을 맡는 데 그쳤다. 그런데 그 백년 후에 나타난 포르투갈 함대는 가장 큰 것이 정화 함대의 10분의 1이 안 되는 규모였음에도(인원 기준), 그 힘으로 모든 경쟁세력을 파괴하고 교역을 독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인도양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악질 해적의 출현이었다.

 

그러나 인도양의 교역로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포르투갈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했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는 <Power and Plenty 권력과 풍요>에서 여러 연구자의 분석을 종합, 16세기에 말라바르(인도 서해안) 지역산 후추 중 30%만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그중에도 절반은 포르투갈 함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레반트 지역을 통해 수송되었다고 밝혔다. (157) 인도양 향료 교역무대에서 포르투갈의 몫은 20%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수가타 보세도 <A Hundred Horizons 1백 개의 수평선>에서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유럽세력)이 인도양 교역체계를 바꾸기보다 그에 적응하여 편입된 것으로 보았다.

 

“16-17세기 유럽인의 인도양 초기 진출이 그 지역의 경제적-사회적 통합성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무너트렸는가? 포르투갈인이 무장교역의 새로운 형태와 해상주권이라는 낯선 주장을 인도양 해역에 들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세기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파트너십의 시대’ 또는 인도와 인도양에서의 ‘억제된 분쟁의 시대’로 해석된다. 이 시기 동남아시아 역사의 연구를 통해 경제적-사회적 쇠퇴라는 단순한 관점은 부정되었다.” (19쪽)

 

포르투갈인은 향료의 유럽시장 공급만을 생각하며 인도양에 들어왔고, 처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 무력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현지 사정에 익숙해지면서 그보다 위험이 적으면서 수익성이 높은 사업 영역에 눈뜨게 되었다. 폭풍과 괴혈병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복에 2년씩 걸리는 본국과의 교역보다 아시아 각 지역 사이의 중계무역이 더 수지맞는 사업이 된 것이다. 1540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게 된 것은 그 결과였고, 현지 여러 세력과 거래관계를 맺으면서 무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던 태도도 얼마간 바뀌게 되었다.

 

 

4.

 

차우두리는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에서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활동을 하나의 해상제국으로 규정하면서 그 역사를 세 개의 단계로 구분했다. (65-67) 1515년까지의 개척기에는 그 지역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허를 찔린 상태에서 중요한 항구 여러 곳을 삽시간에 점령할 수 있었다.

 

말라바르 해안의 고아(Goa)에 인도총독부(Estado da India)가 자리 잡은 후 1560년까지 전성기는 항로의 독점이라는 애초의 목표에 상당히 접근한 시기였다. 요새화된 일련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정기적으로 항로를 시찰하는 포르투갈 함대에 정면으로 맞설 다른 해상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도양을 항해하는 대부분 상선이 포르투갈인의 통제를 받았다. 인도총독부의 제1 과제는 유럽 시장을 향한 경쟁 노선인 중동 방면 교역의 봉쇄였다. 이 과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유럽 시장에서 향료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60년 이후 쇠퇴기의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차우두리는 지적한다. 하나는 현지인의 도전에 의해 항로의 독점이 약화된 것이다. 말라카해협을 장악한 포르투갈세력을 피해 순다해협(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을 무슬림상선이 많이 이용하게 되었고 그 거점이 된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Aceh) 술탄국이 강력한 함대를 갖추게 되었다. 무슬림상선이 중동 지역을 통해 지중해로 보내는 향료 때문에 유럽의 향료 가격이 떨어지고 포르투갈의 이익도 줄어들었다.

 

차우두리가 지적하는 또 하나 포르투갈 세력 쇠퇴기의 변화는 포르투갈 선단의 현지 교역 참여 비율이 커진 것이다. 중심 상품인 향료만 하더라도 유럽의 소비는 세계시장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도양의 해상교역에서 향료는 많은 상품 중 하나일 뿐이었다. 동아프리카,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주변 여러 지역 사이의 교역이 항로의 장악력을 확보한 포르투갈에게 갈수록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사업의 입체화라는 점에서 발전의 의미도 있는 변화였지만 참여자의 다변화라는 점에서 경쟁의 격화를 불러옴으로써 네덜란드와 영국 등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쉽게 해주는 조건이 되었다.

 

포르투갈인은 1513년부터 중국 연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40년 동안 교역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해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554년에 교역 허가를 받고, 3년 후에는 마카오 기지의 임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점에 포르투갈인의 중국 교역이 공식화된 데는 일본과의 교역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인은 1543년에 일본 교역을 시작했고, 1550년부터는 매년 한 차례 고아와 나가사키(長崎) 사이의 운항이 시작되고, 마카오에 기항하게 되었다.

 

고아와 나가사키 사이를 운항한 배는 카라크였는데, 처음에는 5백 톤급 배가 다니다가 점점 커져서 1천 톤급이 다니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처음 보는 이 큰 배를 구로후네(黑船)’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은 ()의 배(nau da prata)'라 불렀다. 일본에서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별명이다. 1526년 개발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아메리카의 거대 은광이 가동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고, 이 시기 일본의 은 생산은 전 세계 생산의 3분의 1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에서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51이었는데 유럽에서는 121이었다고 한다. (핀들레이와 오루어크, <권력과 풍요> 214-216) 중국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외국상품은 많지 않았는데, 은 하나만은 거의 무한정의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제 시기에(1522-1566) 왜구 활동이 늘어난 것도 일본의 은 생산 급증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포르투갈인이 왜구 대신 중국의 은 공급을 맡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은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원인을 나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경제의 팽창에 따라 화폐 유동성의 수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경제학자들의 설명도 알 듯 말듯하다.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명-청 시대의 중국에 막대한 양의 은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중국의 우월한 생산력이 뒷받침하는 수출초과 현상이 은의 수입으로 채워지면서 이 기간 동안 유지된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 은의 세계적 이동 상황은 핀들레이와 오루어크의 위 책 212-226쪽에 개관되어 있다.)

 

중국의 은 수요가 이끌어낸 또 하나의 현상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를 연결한 마닐라 갈레온(Manila Galleon)’이다. 초기 대항해시대의 주역이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494년 교황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어 대서양 상의 어느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영역으로 했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는(브라질 제외) 스페인,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포르투갈의 몫이 되었는데, 스페인은 동쪽 끝의 향료제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마젤란의 항해(1519-1522) 이래 아메리카로부터 아시아에 진입하는 길을 찾아 태평양 항해를 시작했고 결국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었다. 1560년대에 태평양 항로가 안정되면서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 상선의 왕래가 잦아졌고, 아메리카의 은과 중국의 비단이 그 주된 교역품이었다.

 

 

5.

 

흉노제국이 진-한 통일과 동시에 나타난 이유를 생각하다가 그림자 제국의 개념을 떠올리고 무척 흡족했었다. 자체 동력에 의해서 제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중원의 통일에 따른 상황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의 결과로 흉노제국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인데 흥기에서 쇠퇴까지 흉노제국사의 굴곡이 잘 설명되는 해석이다. 내 공부가 깊지 않은 영역에서는 독창적인 생각을 내놓기가 조심스럽지만, 이 개념은 설명력이 좋아서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리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The Shadow Empires: imperial state formation along the Chinese-Nomad frontier 그림자 제국: 중국-유목세계 접경에서 제국체제의 형성이란 제목의 토머스 바필드의 논문이 있다는 사실을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 (수전 앨코크 등 엮음, <Empires 제국>(2001) 소수) 그의 1989년 책 <위태로운 변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개념인데 그 사이에 다듬어낸 모양이다.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다. 내가 직접 연구하는 영역에서는 독창적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지만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독자들에게 설명해드리는 작업에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린다면 헛것을 본 것이기 쉽다. 그래도 이번 작업에서는 학계에서 융화되어 있지 않은 여러 영역에 걸친 주제를 다루려니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꽤 있다.

 

논문을 읽어보니 발표 후 20년이 되도록 널리 파급되지 않은 (그리고 본인의 후속 연구도 보이지 않는) 까닭을 알 듯하다. ‘그림자 제국의 특성을 너무 넓게 일반화하려 한 것 같다. 바필드는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반사형 제국(mirror empires)’, ‘해상-교역 제국(maritime trade empires)’, ‘포식형 제국(vulture empires)’, ‘추억의 제국(empires of nostalgia)'의 네 개 유형을 포괄하려 했는데, 이 유형들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 보인다.

 

포식형 제국추억의 제국은 지속성이 약하다. 제국의 해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포식형 제국의 사례로 요, , 청 등 만주세력이 세운 왕조들을 예시하는데, 그 왕조들은 이른 단계에서 본격 제국(primary empires)’의 틀을 갖추었으므로 그림자 제국의 범주에 머무른 것은 짧은 과도기에 불과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흉노, 돌궐 등이 포함되는 반사형 제국그림자 제국개념의 표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비추어 해상-교역 제국에 관해 생각할 점이 많이 있다. 서양 고대의 페니키아와 아테네, 근세의 포르투갈 해상제국과 대영제국 등 해상제국의 이름이 그럴싸한 현상이 많이 있었다. 중세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도 이 범주에 들어갈 것 같다.

 

본격 제국그림자 제국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생산력의 자족성(autarchy) 여부에 있다. (바필드는 본격 제국의 조건으로 (1) 다양성의 포용, (2) 교통수단, (3) 통신수단, (4) 폭력의 독점, (5) 통합의 이념을 꼽았지만, 생산력의 자족성이 더 근본적인 조건으로 생각된다.) 상업세력의 해상제국은 유목민의 초원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조직의 유지에 필요한 기초자원을 생산력을 가진 주변의 정착사회로부터 취득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상제국은 몇 가지 초원제국과 다른 조건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자원 취득의 기본 수단이 초원제국에게는 무력인데 해상제국에게는 교역이다. 해상세력에게는 항구의 범위를 넘어 육지를 공략하고 점거하는 데 적합한 무력이 없으므로 교역의 이득을 제공해야 필요로 하는 자원을 취득할 수 있다. 해상세력의 무력은 해상의 경쟁세력을 상대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둘째, 초원제국이 한두 개 본격 제국에만 의지해 성립-유지되는 반면 교통로가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는 해상제국은 여러 개 육상세력과의 거래관계를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육상세력에게 교역의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경쟁의 문턱이 낮아서 해상제국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조건도 된다.

 

16세기 인도양의 포르투갈 해상제국이 상당 기간 유지된 것은 본국의 국력이 압도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지의 교역 조건에 잘 적응한 결과였다. 무장 함대에 의한 공격적 항로개척은 현지의 잠재적 교역 수요를 불러일으킴으로써 교역의 이득을 크게 늘렸다. 그리고 1540년대부터는 일본과 아메리카에서 생산이 늘어난 은을 중국과 인도 등 생산력이 높은 지역에 유입시키는 사업에 앞장섬으로써 교역의 주도권을 지킬 수 있었다. 17세기 들어 인도양의 현지세력 아닌 네덜란드와 영국 등 다른 유럽세력이 이 해상세력의 경쟁자로 부각된 데는 아메리카 은의 유럽 공급이 크게 늘어난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