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의 역사"작업에 참고하려고 읽는 책 중에 특별히 재미있는 것을 하나 만났습니다. 책 끝의 한 단락을 관심 있는 분들께 보여드리려고 옮겨봤습니다. 주변 출판사에 번역출판을 검토하도록 권해드리려고 합니다.
1992년 8월 25일 세르비아군대가 사라예보 국립도서관에 폭격을 시작했다. 일부러였다. 백만 권이 넘는 책과 십여만 점의 문서가 고의적인 파괴를 당했다. 그 석 달 전에는 그 군대가 그 도시의 동방박물관을 공격해서 5천여 점의 이슬람과 유대인 고문서로 이뤄진 훌륭한 컬렉션을 불태워 버렸었다. 왜였을까? 언제부터 도서관이 전략적 표적물이 되었나? 물론 전쟁에는 여러 방면의 전선이 있다. 사라예보의 그 기억의 궁전들에 대한 공격의 목적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많은 도서를 불태우고 알-안달루스의 수많은 기억의 궁전들을 망가뜨린 공격의 목적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책들은 건물들처럼, 미술품처럼, 노래처럼, 그리고 예배의 언어처럼, 관용과 문화적 정체성의 복잡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곤 한다. 이념적 순결주의자들은 그런 복잡성을 부정한다. 당장의 현실 속에서도 부정하고 미래의 가능성으로도 부정한다. 책을 비롯한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들은 아무리 엄혹한 공식적 억압 밑에서도 사회적-문화적 교섭은 어떻게든 이어져 나가려 한다는 사실을 종종 보여준다. 책과 건축물 등 살아남는 유물들은 그 자체가 관용이나 저항의 행위이거나 최소한 그런 노력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다.
공교롭게도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의 5백주년에 일어난 1992년의 끔찍한 파괴에서 살아남은 보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위대한 사라예보 도서관과 박물관의 폐허에서 건져낸 약간의 유물 중에 ‘사라예보 하가다’란 이름의 유명한 문서가 있다. 하가다란 기도문과 설화를 담은 책으로, 전승하는 설화들과 출애급기를 기념하며 유월절에 바치는 기도문이 이 하가다에 담겨 있다. 아름답게 채색된 이 사라예보 하가다는 하가다 중 일품으로 꼽히는 보물인데, 이름과 달리 사라예보의 물건이 아니다. 톨레도에 남겨진 두 개의 시나고그처럼, 정치적으로는 기독교권이되 문화적으로는 네오-이슬람권이던 중세기 스페인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한 줄 생략)
이 문서가 파괴의 위험을 모면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1492년 스페인을 탈출해 오토만제국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이 문서를 가지고 나왔다. 그곳에서 이 하가다는 5백년 가까이 애호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2차대전 때 또 한 차례 위기를 겪어야 했다. 사라예보 도서관의 무슬림 사서 한 사람이 이 하가다를 나치의 손길에서 구해냈다는 것은 학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여러 해 동안 나도 이 주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도 이름을 모르고 누구도 이름을 모르는 것 같은 그 무슬림이 이 아름다운 문서를 구출한 데는 그 유래를 안다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무슬림이 그러는 것처럼 그 사서의 마음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옛날 알-안달루스의 추억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세르반테스가 어느 날 톨레도에서 마주쳤던 이름 모를 무어인, 스페인의 어느 혼합어로 쓰여진, 돈키호테가 들어있는 그 책, 파괴를 앞두고 있던 그 진정한 역사를 번역한 그 무어인의 명예로운 후예라 할 만한 돈키호테 스타일의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 무슬림 사서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9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사라예보에서 문서가 구출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뉴욕타임스 제1면에 실린 기사에는 세르반테스 자신이라도 당당히 내어놓을 만한 진정한 역사의 편린이 담겨 있었다. 1999년 4월초 코소보에서 쫓겨난, “알바니아계”라고 흔히 표현되는 수천 명의 유럽인 무슬림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다. 다른 난민들처럼 아주 작은 소지품밖에 들고 나올 수 없었다. 모든 난민이 그러듯, 그 여인도 가장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갖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가방에도 넣지 않고 몸에 지니고 나올 만큼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은 한 장의 종이쪽이었다. 세르반테스가 봤다면 그 여인이 “알아보기는 하지만 읽지는 못하는” 언어로 된 서류라고 했을 것이다. 그 여인은 자기 아버지가 뭔가 상으로 받아 대단히 아끼던 서류라고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고달픈 여정 끝에 마케도니아 국경을 넘은 여인은 코소보 난민 구호에 나섰던 그 지역 유대인 집단에 그 소중한 서류를 보여줄 마음이 들었다. 그들에게 서류를 가져간 것은 히브리어로 적힌 것을 알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내용을 알아내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때문이었다.
도움이 될 내용이었다. 마치 알하미아도 문서가 잃어버렸던 돈키호테 이야기라는 사실을 세르반테스의 변사가 알아낸 것만큼이나 그 서류는 그 여인에게 소중했던 것이었다. 그 서류는 이스라엘 정부가 여인의 아버지에게 준 감사장이었는데, 그의 공적은 사라예보 하가다의 구출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지역 유대인들을 나치로부터 보호해준 것까지 있었다. 이 무슬림 사서는 수백 년에 걸친 중세 톨레랑스의 상징물을 20세기 야만의 공격에서 구해냄으로써 학계의 찬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라예보의 유대인 동료시민들을 2차대전 동안 자기 아파트에 감춰주기도 했던 것이다. 또 한 차례 20세기 야만이 만들어낸 수용소에서 수많은 난민들과 똑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한 여인의 아버지가 그 무슬림 사서였다는 사실이 1999년 5월에 밝혀졌다. 자기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던 그 여인은 그 어려운 시점에서 가족과 함께 얻은 특별한 피난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여인은 수용소 밖으로 안내받아 전란의 동유럽을 떠나 이스라엘로 모셔졌다. 텔아비브 공항에서 오래 못 본 친척을 맞는 것처럼 반겨주는 한 사람이 집으로 데려갔다. 선량한 사서가 유월절 기도문을 담은 위대한 문서와 함께 구출해낸 사람들 중 하나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진심으로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후에 보답이 돌아오는군요. ‘윤회’란 말이 생각납니다.” 윤회란 이 사서의 딸이 아마 상상하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안달루시아 궁전에서 아직도 다 파헤쳐내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그 고리 안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것 아닐까. 그곳에, 무너진 폐허 안에나 살아남은 건축물의 아름다움 속에나, 파괴된 책들 속에나 남겨진 책들 속에나, 우리 자신의 문화적 기억과 가능성들이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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