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교류에서 매개자(intermediary)의 역할을 생각하며 용해(dissolution)라는 화학 현상에서 용매(solvent)의 역할을 떠올린다. 용해란 서로 다른 물질이 분자 차원에서 고르게 섞이는 상태다. 서로 용해되지 않는 용질(solute)들이 적절한 용매 안에서 용해가 가능하다. 커피와 설탕이 함께 물에 녹을 수 있는 것처럼.

 

문명권의 중심부는 문화적 생산이 활발한 곳이지만 다른 문명권과의 교류에서는 보수적 태도가 일반적이다. 전통의 힘이 강해서 다른 요소들을 쉽게 용해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문명권 외곽의 주민들은 높은 용해도(solubility)를 보여주는 일이 많고, 그들의 영향력이 클 때는 중심부까지 녹여내는 용매 역할을 맡기도 한다. 불교가 전파될 때 중앙아시아 지역에 먼저 자리 잡은 다음 516국 시대에 중국을 휩쓸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용매로서 몽골인의 특성은 종교 측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몽골비사>를 비롯한 몽골 문헌에는 하늘신 텡그리(Tängri) 신앙이 두루 깔려있다. 특이한 점은 하늘신과 소통하는 특정한 방법에 대한 집착이 약하다는 것이다. 전통적 소통방법은 무당(shaman)을 통하는 것인데, 칭기즈칸이 가장 강력한 무당 테브 텡게리(Teb Tenggeri)의 탐욕을 응징하기 위해 허리를 부러뜨린(씨름을 빙자해서) 일이 <몽골비사>에 적혀있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194)

 

1254년 몽케의 조정을 방문한 뤼브룩의 여행기에는 여러 종교 대표자들이 모여 교리를 토론하는 종교회의를 대칸이 주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어느 종교든 같은 하늘신을 받드는 것으로 인정하면서 제일 잘 받드는 길을 찾자는 토론이었다. 몽골인은 다신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일신교로 인정받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가 이 토론에 참여했다. 몽골 지도부의 이런 노력은 포용성이 큰 보편종교를 지향하는, 여러 용질을 용해하는 용매와 같은 것이었다.

 

1274년의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일-칸국의 아바카 칸이 사절단을 보냈다. 맘루크 술탄국을 협공할 십자군을 일으키도록 청하는 목적이었다. 회의 진행 중 일-칸국 수석대표가 공개적 기독교 입교로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고, 그 덕분인지 십자군 방침이 결정되었다. 같은 종교 내에서도 교파끼리 용납하지 못하던 기독교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에큐메니즘이었다.

 

올슨은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 전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4부에서 여러 부문 문화 교류의 상황을 개관했다. 역사서술, 지리학-지도, 농업, 음식, 의약, 천문학, 인쇄술로 장을 나눴는데, 어느 부문에서나 공통되는 인상은 종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전통에 대한 집착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올슨이 제시한 여러 부문 중 가장 많은 생각을 새로 일으키게 되는 것이 농업이다. 두 문명권의 기반산업이 농업이었다. 몽골제국을 통한 농업기술의 교류는 두 지역에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 페르시아 역사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적지만, 중국사에 관해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한 가지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명나라 이후 중국 인구의 꾸준한 증가다. 페어뱅크와 골드먼은 <China, a New History 신중국사>(1992) 168-169쪽에 이렇게 썼다.

 

신뢰할 수 없는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1368년 이후 6백 년 동안 경작지와 곡물 생산량의 총합을 인구 기록에 비교하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 드와이트 퍼킨스는 1400년 중국 인구를 약 8천만 명으로 가정하고 1960년대의 7억 명까지 늘어난 것은 곡물 공급의 꾸준한 증가 덕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4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5~6배 늘어난 것이 분명하고 1800년에서 1965년 사이에 다시 50%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중국 인구는 북송 시대에 1억 명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사회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구밀도에 도달한 것이다. 1800년경까지 그로부터 다시 다섯 배로 인구가 늘어난 데는 경작지의 확장보다 농업의 집약화가 더 큰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의 후반부에는 옥수수, 감자 등 신대륙 작물의 도입이 큰 몫을 하지만 품종의 확장은 몽골제국에서 널리 시작되고 있었음을 <집사>의 한 대목에서 읽을 수 있다.

 

[가잔 칸은] 타브리즈에 존재하지 않고 그곳 사람들이 본 적이 없던 갖가지 과일과 향초와 곡물의 씨앗을 모든 나라에서 가져와 심고 가꾸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일에 사람들이 매달려 애쓴 결과 이제 모든 것을 타브리즈에서 보게 되었고 나날이 늘어나는 그 소출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게 되었다. (...)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 보내는 사신에게 [가잔 칸은] 그 나라의 특색 있는 작물의 씨앗을 모아 오게 하였다. (올슨, 같은 책 121쪽에서 재인용)

 

라시드는 일-칸국의 조치를 기록한 것이지만 원나라 쪽에서도 상응한 조치가 없었을 리가 없다.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에는 장건(張騫) 시대 이래 꾸준히 문물의 교류가 있어 왔다. 그러나 상인과 사절들을 통한 교류가 물 몇 바가지씩 떠서 옮기는 수준이었다면, 원나라와 일-칸국이 교류를 위한 관서까지 만들고(의약, 농업, 천문역법 등) 기술자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등 지속적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송유관을 건설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제국-국가 차원의 교류 활성화가 발휘한 힘은 이미 들어와 있던 전래품의 재발견에서 확인된다. 면화가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원나라 때 도입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었는데, 사실은 남북조시대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원나라 때 면포의 생산이 크게 확대되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당시 막 개발된 첨단상품이었다. 중국의 통제를 피해 몰래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재미를 위한 이야기일 뿐이다. 원나라 조정의 눈에 고려는 제국의 일부였고, 제국의 일부에게 무명옷의 편리함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원나라가 취할 정책이 아니었다.

 

https://baike.baidu.com/pic/%E7%BA%BA%E8%BD%A6%E5%9B%BE/1891323/0/d31b0ef41bd5ad6e326d8a918dcb39dbb6fd3c31?fr=lemma&ct=single#aid=0&pic=d31b0ef41bd5ad6e326d8a918dcb39dbb6fd3c31

https://en.wikipedia.org/wiki/Spinning_wheel#/media/File:Wang_Juzheng's_Spinning_Wheel,_Close_Up_2.jpg

(북송시대 왕거정(王居正)의 방거도(纺車圖). 면사(綿絲)를 뽑는 데 종래보다 월등히 효과적인 방법이 된 물레는 11세기에 처음 만들어져 13세기까지 중국-이슬람권-인도에 두루 보급되었다. 문익점이 활동한 14세기는 면화 종자보다 물레 기술의 도입이 중요하던 시점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pinning_wheel#/media/File:Gandhi_spinning.jpg (마하트마 간디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에 물레의 상징성이 나타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