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 작업을 진행하면서 역사의 교육만이 아니라 연구 자체가 유럽사에 편중되어 온 사실을 새삼 절감한다. 이유는 빤하다. 첫째, 유럽인이 근대문명의 전개를 주도하면서 유럽사의 흐름이 인류 역사의 본류라는 생각이 서양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머리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둘째, 근대역사학이 서양에서 발전하면서 그 기준에 부합하는 연구의 압도적인 분량이 서양인 연구자들에게서 나왔다.

 

두 가지 이유 모두 근년에 와서 완화되어 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이 떠오르면서 유럽사 중심의 진보사관 분위기가 억제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아닌 지역의 학술활동 발전에 따라 연구자의 분포가 보다 고르게 된 결과다. 두 가지 조건의 변화가 가시화된 1970년대부터 역사학계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노력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방향의 연구 성과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저기 좋은 실마리는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실마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실마리들을 타고 들어가 세계사의 실체를 새로운 구조로 보여주는 단계는 아직 가까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작업은 중국사 보는 시각을 넓히는 데 목적을 두고 시작한 것인데, 그 목적을 위해 어느 범위의 세계사를 새로 살펴보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계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기 힘든 데는 연구방법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틀에 묶여 있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을 보느냐에 앞서 어떻게 보느냐하는 데서부터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유럽의 경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가치관을 모든 역사의 원리에 적용시키려는 몰시대적(anachronistic) 태도가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다. “역사의 종말같은 해괴한 주장이 나오는 토양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중심주의가 세상을 휩쓰는 동안 많은 역사학자들은 유럽의 성공과 다른 지역의 실패를 합리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50년 전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까지 동양적 전제주의, 정체성론 등이 힘을 쓰고 있었다. 조지프 니덤과 그 동료들이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명나라 때까지 중국의 과학기술이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신기한 이야기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중국사와 관련해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많이 불식되어 왔다. 유럽문명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중국문명의 실적을 밝혀낸 니덤 등 선구적 연구자들의 공로가 큰 몫을 했거니와, 일본과 중국의 국력 성장이 배경조건으로 작용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강대국의 위상이 분명해진 두 나라가 포함된 동아시아의 역사를 더 이상 서양 중심의 역사에 억지로 종속시키는 것이 어색하게 되었고, 두 나라 학계도 성장해서 자국 역사의 자랑스러운 면을 부각시키는 노력이 늘어났다.

 

동아시아 역사의 복권(復權)에 비해 이슬람권의 역사는 백 년 전의 수렁에서 아직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중국문명과 쌍벽을 이루던 이슬람문명의 전통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집단에 전승되어 있다. 그런데 그 전통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맡은 역할은 아직까지 많이 밝혀지지도, 알려지지도 못하고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Islam#/media/File:Islam_percent_population_in_each_nation_World_Map_Muslim_data_by_Pew_Research.svg 국가별 무슬림 인구비율.

 

한 가지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근-현대 역사 연구가 국가사 중심으로 발전해 온 상황에서 이슬람권의 역사를 자기 역사로 내세울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수백 년간 이슬람권을 대표하던 터키제국이 분해되고 그 중심에 있던 터키가 유럽화의 길로 나아간 후 이슬람문명을 확실하게 대표하는 나라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제 뒤따라 떠오르는 생각은 유럽의 흥기 과정에 이슬람이 긴밀하게 얽히면서 타자(他者)’ 노릇을 맡아온 사정이다. 유럽이 정의롭고 유능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이슬람의 불의와 무능을 강변할 필요가 대목마다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은 유럽중심주의의 가장 큰 직접 피해자였고, 이슬람과 유럽의 관계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세계사의 새로운 정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역사를 바라보는 폭을 넓히려고 나름 애써 왔지만 이제 돌아보니 이슬람 역사에 관한 책 읽은 것은 한쪽 손가락으로 셀 정도다. 그나마 대개 과학기술사에 한정된 것이고 일반 역사에 가까운 것은 버나드 루이스의 <The Jews of Islam 이슬람세계의 유대인>이 기억날 뿐이다.

 

몽골제국 이전 서방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권의 역사를 더 넓고 깊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뿐 아니라 몽골제국 이후 세계사의 전개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유럽의 행로를 파악하는 데도 이슬람문명과의 관계가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그래서 몇 권의 책을 서둘러 입수한 중에 타밈 안사리의 <Destiny Disrupted 무너진 섭리>(2009, 류한원 옮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2011)에서 흥미로운 관점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안사리는 역사학자가 아닌 작가다. 196416세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후 이슬람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30대 들어 새로 관심을 키우게 되었지만 지적인 관심일 뿐, 신앙심을 키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국의 기나긴 내전과 혼란이 탈레반 사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역사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19-11 사태 이튿날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한 장의 메일이 그의 명성을 키워줬다고 한다.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자는 주장을 반박한 이 메일이 며칠 사이에 수백만 명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리뷰에 그 메일의 앞머리가 인용된 것이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놓자는 주장은 필요도 없는 일을 하자는 쓸 데 없는 주장 같다. 23년간의 전쟁을 통해 이미 이뤄져 있는 일 아닌가. 뉴욕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아프간 사람들이 아니다. 폐허에 기어드는 쥐떼처럼 쑥대밭이 된 아프가니스탄에 꼬여든 국적 없는 망나니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Afghan_Civil_War_(1992%E2%80%931996)#/media/File:Kabul_during_civial_war_of_fundamentalists_1993-2.jpg 1992년 내전 중 카불 시내

 

https://en.wikipedia.org/wiki/September_11_attacks#/media/File:September_17_2001.jpg 20019-11 뉴욕 테러 현장 

 

이슬람 역사에 대한 안사리의 설명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그가 중간적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슬람 신자이면서도 지적 활동에서는 교리에 구속받지 않는다. 소년기까지 매우 모범적인 이슬람사회 안에서 자라난 후 청년기부터 미국사회에서 활동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자세일 것이다. 둘째, 역사를 탐구하지만 역사학계에 제도적으로 묶인 입장이 아니라는 점. 역사학계는 유럽중심주의에, 또는 그에 대한 반작용에 휩쓸리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밝힌다.

 

나는 연구자가 아니지만 사료를 걸러내 결론을 도출하는 연구자들, 그리고 학술연구의 업적을 걸러내 큰 결론을 빚어내는 학자들의 업적을 활용한다. ... 연구자들이 이런(이슬람에 전승되는) 이야기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고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이슬람 자료보다 이슬람 외부의 자료에 더 의지하는 것은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밝히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내 목적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무슬림들이 생각하는지밝히는 데 있다. 그 생각이 역사를 통해 무슬림들을 움직여 온 실체이고, 그 생각을 밝혀야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xxi)

 

 

3.

 

안사리는 <무너진 섭리>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의 역사란 부제를 붙인 것처럼 이슬람 관점을 표방하면서도 외부인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더러 이슬람의 입장을 다소 앞세울 때라도 응원하는 팀의 멋진 플레이에 기뻐하는 관중처럼 어느 정도 절제를 보여준다.

 

이슬람권에 중앙세계(Middle World)”란 이름을 붙인 것이 그런 예의 하나다. 한 마디로, 기독교세계에 유럽이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는 것처럼 이슬람세계에도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은 것이다. 중국에서 유럽까지 펼쳐져 있는 여러 문명권 중 이슬람권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를 내놓는 것은 몰시대적이라는 점에서 억지스럽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중국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촉이 꽤 있던 문명권들(인도양과 지중해에 접한) 사이에서는 중앙이란 표현이 썩 합당하다. 이슬람의 발상지인 아라비아반도는 고대문명의 두 중심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이에 있는 곳이고 또 하나의 중심지 인도와도 교섭이 많던 곳이다. 무엇보다, 고대-중세 문명 전개의 큰 무대였던 인도양과 지중해의 중간에 있는 곳이었다. ‘중앙으로서의 이 조건이 이슬람문명의 성격에도 투영되었을 개연성은 염두에 둠직하다.

 

중앙과 변방의 차이가 종교적 분위기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얼른 든다. 유럽의 기독교가 타 종교에 대해서만 아니라 기독교 내 교파들 사이에도 극심한 불관용의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초기의 이슬람은 포용적이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개종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했다.(피렌느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51) 이교도에게만 주민세(jizya)를 거두기도 했지만 무슬림에게만 부과되는 여러 의무와 비교할 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도 아니었다.

 

관용에 관해 자오팅양의 <천하체계>(노승현 옮김, 2010) 한 대목이 생각난다.

 

관용은 서양의 논조이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어떤 일에 매우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떤 신념에서 출발하여 그런 일을 참고 용서하려고 결심할 때가 비로소 이른바 관용이거나, 자크 데리다의 논조에 근거하여 관용할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에는 결코 관용의 이러한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관용은 중국의 사유 방식도 아니고 중국의 방법론도 아니다. 중국에 관용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관용의 사유는 없다. 중국의 사유 방식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大度]이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寬容]이 아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지만 참는 것이다. (...) 중국의 기본 정신은 변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타자를 변화시키고 타자를 나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양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다양화는 오히려 통일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양성은 반드시 어떤 전체적인 틀이 규제하는 가운데에서의 다양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규제를 잃어버린 다양성은 단지 혼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5)

 

관용의 마음이라 함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관용의 사유는 다름을 싫어하면서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오팅양이 서양과 대비시키는 중국의 대도(大度)’는 이슬람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교도 역시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알라의 뜻에 따르는 존재이지만, 예언자(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얻지 못해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운명의 깨우침은 오직 알라만이 주시는 것이니 이웃으로서 무슬림은 자비와 연민으로 그들을 대하며 그들의 깨우침을 기다릴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포용성이 중앙의 위치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명의 중앙지역에서는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나타나고 유행했다. 그런 지역에서 이슬람 아니라 어떤 움직임이라도 상당 수준의 포용성 없이는 어느 범위를 넘어 세력을 넓히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의 주변 세력들의 중국화에도 이슬람 주변 세력들의 이슬람화에도 이 포용성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프랑크왕국의 서유럽에서는 동방에서 들여온 종교 하나를 로마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후 교리를 조금씩 달리하는 같은 종교의 다른 교파들까지 이단으로 배척하며 유아독존의 길로 나아갔다. 사상적 경쟁이 빈약한 변방의 분위기였다.

 

 

4.

 

이슬람의 역사는 서양사에 속할까, 동양사에 속할까? 아시아 지역의 이슬람사는 동양사, 유럽-아프리카 지역의 이슬람사는 서양사로 취급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를 소속 대륙에 따라 분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역사학계가 자국사-동양사-서양사의 3부 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특색이다. 이 구조를 일제의 잔재로 여겨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 생각에는 두 나라 입장에서 타당성 있는 구조다.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문명권 소속이 분명한 만큼 자국사-자문명권사-타문명권사의 3중 동심원 구조가 역사인식의 틀로 합당하다.

 

문제는 동양사-서양사의 관계를 동심원이 중첩하는 입체적 구조가 아니라 아시아-유럽의 평면적 분할로 보는 데 있다. 유럽중심주의에 휩쓸린 관점이다. 유라시아 대륙을 유럽과 아시아로 양분한 것이 원래 유럽중심주의였다. 자기네 동네를 유럽으로 이름붙이면서 나머지 전부를 아시아에 쓸어담은 것이다. 유럽인의 일반적 역사인식이 자국사-유럽사-세계사의 3중 구조로 이뤄지는 것은 우리와 대칭되는 같은 틀인데, 그들이 유럽사와 세계사의 관계를 입체적 구조로 보는 것과 달리 우리가 동양사-서양사를 평면적 분할로 보기 쉬운 것은 유럽사에 너무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동양사-서양사의 구분을 그대로 둔다는 전제 아래서는 이슬람사, 특히 근대 이전의 이슬람사를 서양사 영역으로 보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다. 더 동쪽에 있으면서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힌두문명권도 마찬가지다. 이슬람권과 힌두권, 기독교권 사이의 상호 접촉에 비해 동아시아문명권은 오랫동안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서방의 문명권들끼리 서로 주고받은 영향에 비하면 그들과 동아시아 사이의 상호 영향은 미미했다.

 

유럽세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던 근대의 역사를 바라보는 데는 세상을 유럽과 비-유럽으로 갈라서 보는 유럽인의 관점이 상당히 유효하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서양사를 유럽 중심으로만 보는 관점은 유럽인들에게나 맡겨놓고 시야를 더 넓혀야 제대로 된 세계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보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무슬림들이 생각하는지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는 안사리의 입장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다. 무슬림들의 생각보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사리의 설명이 내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유럽인의 통념을 벗어나는 데 적절한 출발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유럽다운 유럽의 출발점으로 앙리 피렌느가 보는 카롤링거 시대 이래 유럽의 역사는 이슬람권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받으며 펼쳐졌다. 한국의 역사가 중국과의 관계에 영향받으며 펼쳐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솔직히 한-중 관계의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하지만, 틀은 같고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관계에 대한 연구와 서술은 유럽인의 손으로 이뤄진 것이 압도적이고, 그중에는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것이 극히 적다. 근대 이전의 세계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유럽 관계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 급선무로 보인다.

 

동양인의 관점에서 서양사의 틀을 짜려는 시도는 참고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랑캐의 역사작업을 위해 내 나름대로 짜 보려 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힘들여 연구해 온 영역을 고작 수십 권 책을 통해 얻은 식견을 갖고 가위질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주제넘는 짓이다. 하지만 해묵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무나 절실한 일이므로 당장의 작업을 위해 필요한 한도 내에서 시도하는 것이다.

 

 

5.

 

유럽과 이슬람권, 그리고 인도까지를 서양사의 무대로 설정해서 근대 이전의 역사를 더듬어보려 한다. 이 지역의 문명 전파 통로로서 지중해와 인도양의 큰 역할에 따라 지중해권과 인도양권의 두 권역을 설정할 수 있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수상교통이 육상교통보다 원활했던 사실은 앞 회에서 설명한 바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Guns, Germs, and Steel , , >(1997, 2017 / 김진준 옮김 2005) 437쪽에서 육상교통의 비용이 수상교통의 약 7배였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체로 합당한 추정으로 보인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문명은 두 권역의 경계 지역에서 발생해 양쪽으로 퍼져나갔다.

 

안사리는 <무너진 섭리> 허두에서 이슬람의 본거지 중앙세계를 육로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해로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지중해의 서방문명과 대비한다. 수긍이 가는 관점이다.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에는 특성의 차이가 있다. 풍랑이 적고 짧은 항로가 많은 지중해에서는 작은 배들이 연중 거의 아무 때나 다닐 수 있는 반면 인도양에서는 꽤 큰 범선들이 계절풍에 맞춰서야 (인접 지역 사이가 아닌 대부분 항로에서) 항해할 수 있었다. 교통망으로서 인도양과 지중해의 성격 차이는 철도망과 자동차도로망의 차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Galley#/media/File:Galley-knightshospitaller.jpg 돛보다 노젓기로 추진력을 얻는 갤리선이 지중해에서는 16세기까지 해운의 주종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Junk_(ship)#/media/File:Situs_civitatis_Bantam_et_Navium_Insulae_Iauae_delineatio.jpg 동남아시아에서 개발된 정크선이 인도양의 항로에서는 제일 많이 사용되었다

 

기원전 330년대 알렉산더의 정복이 서양의 동양 정복으로 통상 인식되지만, 그의 정복이 육군에 의해 육로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동방식 육상 제국의 틀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 후 아케메네스 왕조의 계승자를 자처했으며, 그 후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마케도니아 전통을 버리고 페르시아 문화에 물들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올슨은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 82쪽에 기원전 327년의 시동의 음모를 소개한다. 알렉산더의 시동 몇이 암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는데, 주모자 헤르몰라우스는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당신이 걸치기 좋아하는 것은 페르시아 저고리와 가운이고 당신 고향의 풍속을 싫어하게 되었지요. 그러니 우리가 죽이려 한 것은 마케도니아인의 왕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의 왕이며 우리는 전쟁 규범에 따라 탈영병인 당신을 처단하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크의 기록에는 알렉산더 이전의 마케도니아 조정에 페르시아 망명자들이 여러 명 들어와 있던 것이 보인다.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가까이 있었지만 육로를 통해 페르시아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지, 알렉산더에게 정복의 진정한 대상은 페르시아의 풍요로움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케도니아가 기원전 5세기 초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정벌을 앞두고 그에 복속했었고 알렉산더 당시에도 인접한 트라키아가 페르시아제국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케도니아를 그리스권의 일부로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평정은 육상세력의 해양세력 제압으로 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실패한 일을 알렉산더가 해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단계의 지중해 신흥세력은 육상세력의 영향권에서 멀리 벗어난 서쪽 변방에서 일어났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쪽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문화-기술 자원을 물려받고 변방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큰 세력을 일으켰다.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의 경쟁을 물리친 로마가 동쪽으로 나아가 지중해에 접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더의 후계자들로부터 빼앗음으로써 지중해제국을 세운 것은 육상세력에 대한 해양세력의 반격이었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패권이 이뤄진 후 동쪽의 육상세력과 서쪽의 해양세력 사이에는 7백년 가까운 지구전이 이어졌다. 기원전 54년에 시작되어 로마(및 동로마)제국과 파르티아 및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사이에 간헐적으로 이어진 이 장기간의 적대관계를 로마-페르시아 전쟁이라고 한다. 4세기에 로마가 동쪽으로 옮겨간 데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Roman%E2%80%93Persian_Wars#/media/File:Byzantine_and_Sassanid_Empires_in_600_CE.png 600년경 동로마제국과 사산제국의 대치 상황

 

두 제국이 수백 년에 걸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그 사이의 경계선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피차 정복의 강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해상제국과 육상제국의 성격을 가진 두 제국이 각자의 영역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차의 명운을 건 전면적 충돌에 이르지 않고 경계 지역의 소소한 이득만을 다투는 국지전의 양상이 계속된 것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두 제국의 교착 상황이 그 틈새에서 일어난 제3세력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이슬람의 흥기였다. 불과 1백 년 동안에 동쪽의 육상제국은 무너져 새로 일어난 이슬람제국에 흡수되었고 서쪽의 해양제국은 바다 건너의 거의 모든 영토를 빼앗기고 포위당한 모습이 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Early_Muslim_conquests#/media/File:Map_of_expansion_of_Caliphate.svg 이슬람의 초기 확장 영역. 마호메트 당시(622-632), 올바로 인도받은 칼리프 시대(632-661), 옴미아드 칼리프조 시대(661-750)의 확장 영역이 서로 다른 색깔로 표시되었다.

 

 

6.

 

이슬람 신앙의 창시자 마호메트(c.570-632)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을 제창하면서 최후의 예언자를 자처했다. 더 이상의 예언자가 나올 가능성을 차단한 것은 교리와 교단의 통일성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가 세운 신정(神政)국가를 29년간 이끈 네 명의 칼리프를 올바로 인도받은 칼리프라 부르고, 661년 이후 칼리프를 세습화하여 일반적 제국의 성격으로 옮겨간 것이 옴미아드조()였다. 750년 옴미아드조가 아바스조로 넘어갈 무렵에는 동쪽으로 페르시아제국, 서쪽으로 이집트로부터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와 모로코까지 이슬람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앙리 피렌느는 이슬람세계 팽창의 신속함보다도 그 결과의 지속성에 경탄한다. 신속한 정복으로는 알렉산더제국, 아틸라의 훈족, 몽골제국 등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광대한 지역에 이슬람처럼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킨 사례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특히 앞서 일어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 동화되어 간 것과 달리 소수의 아랍족이 거대한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그 종교의 포용성에서 찾는다. (<샤를마뉴와 마호메트> 149-153)

 

포용성은 상대적인 기준이다. 초창기의 이슬람은 분명히 같은 시기 다른 종교들에 비해 큰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기독교가 이교도를 통상 적대시한 것과 달리 이슬람은 이교도를 연민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교도들이 무슬림을 무서워하기보다 부러워하도록 이끌었다. 동로마제국과 사산제국 치하에서 박해받던 소수집단에게는 이슬람의 차별이 반가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정복 사업에 호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슬람의 이교도 차별은 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다. 직업 선택에도 제한이 많지 않았다. 버나드 루이스는 이슬람세계에서 유대인의 직업으로 상인과 의사가 두드러진 사실을 놓고 유리한 조건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향으로 해석했다. 한편 식량, 가축, 무기 등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범위의 사업에 유대인의 활동이 거의 없었던 사실은 지배집단의 의심을 사기 쉬운 영역을 기피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슬람세계의 유대인> 90-92)

 

이슬람세계의 팽창은 분열로 이어졌다. 칼리프의 세습화에 따라 신앙공동체 움마(Ummah)’에서 제국으로 조직의 성격이 바뀌면서 권력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750년 아바스조로 넘어갈 무렵부터 국가 형태의 지방정권이 나타나고 10세기 이후에는 독립적인 술탄국(Sultanate)이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옴미아드조의 후예가 칼리프조의 부활을 선포해서(929) 칼리프의 분립에까지 이르렀다.

 

분열-분화의 단층선 형성에는 종족의 차이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코란의 권위를 통해 아랍어와 아랍문화가 공유되면서 종족 간 간격을 줄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긴 시간을 지나는 동안 여러 갈래 교파가 일어나 지역과 종족에 따른 차이와 어울리면서 분화를 촉진하게 된 것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서방 이슬람권의 사정은 접어두고 서아시아 지역을 먼저 살펴본다면,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이 중요한 종족으로 부각된다. 이슬람의 평등 원리 아래서도 아랍인은 종교와 사회의 지도적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산제국에서 넘어온 페르시아인은 생산력과 문화의 우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위를 선점하고 있던 두 종족에게 군사력을 앞세운 투르크인이 도전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투르크인은 중국의 남북조시대 말기에 인근의 초원지대에서 강성한 세력을 키워 돌궐 제1제국(552-630)과 제2제국(687-745)을 경영하다가 제2제국 멸망 후 서남방으로 대거 진출, 이슬람세계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중국사의 맥락에서는 돌궐(突厥)으로 지칭했지만 더 넓은 맥락에서는 투르크인으로 부른다.) 가즈나 술탄국(Ghaznavid Dynasty, 977-1186)과 셀주크 제국(Seljuk Empire, 10371194)을 세우고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를 넘어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의 상당 부분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탈취하기도 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황제 로마노스 4세를 생포하기까지 해서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Ghaznavids#/media/File:Ghaznavid_Empire_975_-_1187_(AD).PNG 1030년경 최대에 이른 가즈나 술탄국의 판도

https://en.wikipedia.org/wiki/Seljuk_Empire#/media/File:Seljuk_Empire_locator_map.svg 1092년 셀주크 제국의 판도

 

13세기 초-중반 몽골제국이 서방으로 진격할 때 그 첫 번째 공격 대상은 이슬람세계의 투르크 세력이었다. 문명에 먼저 포섭된 유목세력을 배후에서 새로 일어난 세력이 공격하는 것은 초원세계에서 반복된 현상이었다. 한편 이슬람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투르크인의 침래와 몽골제국의 침공은 같은 방면에서 밀려온 거듭된 물결이었다. 가잔 칸의 이슬람 개종(1295) 후 일-칸국은 이슬람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동쪽에서 원나라가 중화세계의 일부가 된 것과 나란히 진행된 일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