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번 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그려 온 중국사의 모습을 새로 그려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려운 문제에 마주치게 된 것이, 유럽사의 그림도 자꾸 새로 그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중국사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과 맞춰볼 때 어려서부터 배웠던 유럽사와 잘 맞지 않는 구석이 계속 나타난다. 하지만 전공분야도 아닌 유럽사를 내 멋대로 그릴 수는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런 참에 마주친 귀인(貴人)이 백 년 전의 벨기에 역사학자 앙리 피렌느(1862-1935)였다. 그가 유고로 남긴 <Mohammed and Charlemagne 마호메트와 샤를마뉴>(1937)를 정리해서 출간한 아들 자크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모든 책을 두 차례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초고에서는 형식에 관계없이 내용을 끌어 모아 놓았다. 거친 형태의 초고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한 완성고는 초고를 수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쓰는 글로서, 객관적이고 공들여 간결하게 다듬은 형식을 갖추면서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그 형식 뒤에 숨겨놓는 것이었다." (10)

 

피렌느는 객관성과 엄밀성에 매우 충실한 역사학자였다. 그런데 이 책은 평소의 기준을 백퍼센트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여러 해 전에 원고를 완성하고도 죽을 때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 기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표할 가치는 있는 글이라고 여겼기에 아들이 정리해 낼 수 있는 형태로 남겨놓은 것일 텐데.

 

이번에 참고한 또 하나 피렌느의 책 <Medieval Cities 중세의 도시>(1927)는 평소의 기준을 지킨 작품으로, 건조할 정도로 엄정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는 그와 달리, 발랄한 생각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저자 본인이 만년의 작품에서는 역사학자의 기준을 벗어난 사상가의 역할을 추구한 것 같다. 다만 그 역할을 생전에는 자임하지 않고 사후의 업적으로만 남긴 것으로 이해한다.

 

오래 전에 써놓은 채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아들에게 일거리로 남겨 둔 더 큰 책이 있다. <A History of Europe - from the Invasions to the 16th Century 유럽중세사>. 19163월 독일 점령군에 체포되어 191811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32개월간 독일의 몇 개 수용소를 전전하는 동안 집필한 책이다. 수용소에 함께 있던 러시아 유학생들을 위해 사설 강단을 열어 경제사를 강의하다가 유럽의 역사를 정리할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과 토론은 물론, 참고자료도 구해 볼 수 없는 환경에서 기억에 의지해 이 책을 쓰면서 평소와 같은 고증의 기준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에도 서문을 쓴 아들 자크는 원래 원고의 연도 표시가 대부분 빈 괄호로 붙어 있었던 데서 참고자료 없이 작성된 원고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과연 예전과 같은 연구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학인(學人)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유럽사를 새로 그려보는 데 피렌느의 저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에게 받아들인 생각 중 가장 기본이 된 것은 무엇보다 유럽지중해세계를 구분해서 보는 시각이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의 첫 문단이 이런 내용이다.

 

"인간이 빚어낸 경이로운 구조물인 로마제국의 모든 특성 가운데 가장 강렬하면서 또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지중해성이다. 동쪽의 그리스 문화권과 서쪽의 라틴 문화권으로 갈라지지만, 지중해에 속한다는 그 특성이 제국의 모든 주(province)들을 하나의 통일성으로 묶어주었다. 우리들의 바다, Mare nostrum의 의미를 가득 품은 이 내해는 사상과 종교와 상품이 움직여 다니는 통로였다. 벨기에,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라이티아, 노리쿰, 파노니아 등 북쪽의 주들은 단지 오랑캐를 가로막는 울타리일 뿐이었다. 문명의 생명은 거대한 호수의 기슭에 응축되어 있었다. 지중해 없이는 아프리카의 밀이 로마에 공급될 수 없었다. 해적이 사라진 지 오래되어 항해의 안전이 확보된 이제 지중해의 혜택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모든 주로부터 바다로 나오는 길을 통해 로마제국의 모든 교통이 지중해에서 합쳐졌다. 바다로부터 멀리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문명의 농도는 점차 희박해졌다." (17)

 

그리스-로마인에게는 지중해세계가(특히 그 동쪽 일대) 곧 문명세계였고, 그중에서 동쪽의 페르시아 문명권, 남쪽의 이집트 문명권과 대비해서 지중해 북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이라 불렀다. 지금 기준으로 유럽의 동남부 지역에 해당하며, 후에 유럽을 이끌 서북부는 아직 문명세계의 바깥에 있어서 페르시아나 이집트보다도 더 먼 곳으로 여겨졌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에야 서서히 이뤄져가는 유럽의 진정한 탄생을 다룬 책이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4.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인도에서 발생한 농업문명의 다음 단계 확장-발전에서 지중해와 인도양이 주축이 된 것은 교통의 기술적 조건 때문이었다. 고대세계에서 수상 교통은 육상 교통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이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되어 가면서 그리스권, 라틴권, 이집트권, 페르시아권 등 지역 간 차이는 문화적 차이에 그치게 되었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출발한 지중해문명이 서쪽으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북쪽 연안의 로마와 남쪽 연안의 카르타고가 신흥세력으로 자라났다.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제국이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면서 팍스 로마나가 이뤄졌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문명이 중화제국으로 조직된 것처럼 지중해문명은 로마제국으로 조직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375년경 시작된 게르만 대이동을 통해 무너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무렵(395)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 이뤄진 사실이 주목된다. ‘-서 분열이라고 배워 왔지만, 이제 돌아보면 로마제국의 동진(東進)’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겨우 80여 년간 존재한 서로마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천년 넘게 계속된 동로마제국과 비길 것이 아니다. 330년 콘스탄티노플을 제2의 수도로 정할 때 로마제국의 동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쪽 변방에서 출발한 로마제국이 문명 중심부인 동쪽으로 옮겨가는 과정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남하해서 서쪽에 남겨진 로마제국의 껍데기를 넘겨받는 과정이 나란히 진행되었다. (북중국 일대를 516국에게 남겨주고 남진한 중화제국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미개한 게르만 부족들이 훈 족 등 더 미개한 부족들의 서진에 밀려 로마제국으로 들어왔다가 제국을 탈취하기에 이른 것으로 배워 왔다. 이것 또한 근년 인류학계의 유목세계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게르만 일부 부족이 로마에 복속한 것은 토머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말하는 내경 전략(inner frontier strategy)’과 같은 모양이다. 용병 역할로 제국에 포섭된 오랑캐가 상황 변화에 따라 왕조를 탈취하거나 정권을 세우는 것은 중국 역사에서 수없이 일어난 일인데, 이른바 게르만 대이동도 비슷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렌느는 470년대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되었다는 종래의 통설과 달리 게르만 여러 종족이 휩쓴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의 틀이 수백 년간 더 계속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8세기 중엽 메로빙거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랑크왕국을 비롯한 게르만 제 세력은 로마제국의 제도를 원용하고 라틴어를 비롯한 라틴문화를 고급문화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지중해 연안의 선진지역에 중심을 두었다.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뒤에야 갈리아 내륙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지중해문명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유럽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피렌느는 보는 것이다.

 

유럽의 중세가 8세기에야 시작되었다고 보는 피렌느의 관점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에 나는 큰 관심이 없다.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에 지금까지의 통념처럼 막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느의 관점에서 지중해문명과 유럽문명의 구분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7-8세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 제해권 장악이 프랑크왕국으로 하여금 지중해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했다고 보는 점에도 함축하는 의미가 커 보인다. 내가 흉노제국을 그림자 제국으로 보는 것은 한나라가 주도하는 시대 변화에 이끌려 이뤄진 제국이라는 뜻인데, 8세기 이후의 프랑크왕국 역시 지중해문명권의 상황 변화에 떠밀려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렌느는 카롤링거 왕조를 유럽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나는 이것을 유럽문명의 출발점으로 이해한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 문명을 유럽문명의 기원으로 여겨 왔지만, 그리스-로마 문명은 지중해문명의 일부였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지중해 북쪽 연안의 자기네 영역을 유럽으로 인식한 것은 동쪽의 페르시아, 남쪽의 이집트와 대비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지금 유럽의 동남쪽 귀퉁이만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슬람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한 후 갈리아 등 배후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키워낸 프랑크인들이 수백 년 후 본격적 문명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지중해문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러 나선 것이 르네상스였고, 그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표방하기 위해 유럽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인 것이다. 8-9세기의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때 사람들이 말하던 유럽은 로마교회의 당시 영역을 가리킨 것으로, 동로마제국도 배제하는 이 영역은 아직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지 못하고 지중해문명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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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29 11:10

    글에서 언급하신 내경전략의 개념이 유럽에서도 흡사하게 적용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물리학의 엔트로피 개념과도 유사하게 느껴지는 것이 한 도시, 지역이 인적 그리고 물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번영을 이룩한 후 그 과정동안 내재적으로 축적된 모순들이 거의 손쓸 수 없을 정도에 이렀을 때, 제국들은 새로운 지역에 그동안의 축적된 기술과 재원으로 보다 향상된 도시를 건설하는 패턴이 보입니다.
    언급하신 고대 중국과 유럽도 그렇고 근대와서는 미국의 서부 개발도 큰 그림에서는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패망하긴 했지만 일제가 서울을 제2의 동경으로 삼아 건설하려 했던 것도 그렇지 않을까요?
    물론 전제는 물리적인 제국의 범위가 넓어야 새로운 부지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겠지요.

    뜬금없긴 하지만 현재 서울의 부동산 폭등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한국은 제국이 아니라서 곪은 종기가 터질 곳이 없다는 차이겠지요.

    • 2021.02.07 14:10 신고

      재밌는 생각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논증할 엄두까지는 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생각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