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은 정치조직의 가장 기본 소프트웨어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도 한 부족이 공유하는 과거의 기억은 주술사의 푸닥거리를 통해 부족 정체성의 발판이 되었다. 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국가 형성 단계에서는 역사를 문자에 정착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1240년대에 나온 <몽골비사(元朝秘史)>는 푸닥거리의 문자 정착을 통한 국가 형성 단계를 보여준다. 우리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에 가까운 형태로 신화-설화와 국가형성사가 결합되어 있다. 이후 대몽골국이 다문명제국으로 나아감에 따라 세계사형태의 역사서술이 필요하게 된 데 부응한 것이 라시드 알-딘의 <집사>였다.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세계사가 왜 대칸의 조정인 원나라가 아니라 그 조공국인 일-칸국에서 나오게 된 것일까? 두 가지 기술적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원나라가 자리 잡은 중국에는 역사 편찬의 강력한 전통적 형태가 있었다. 원나라의 역사가들은 초기부터 <요사(遼史>, <금사(金史)>, <송사(宋史)> 등 정사(正史) 편찬에 착수하면서 중국의 전통적 역사 편찬을 따라가는 길로 들어섰다.

 

둘째, -칸국은 동쪽 끝에 치우쳐 있던 원나라에 비해 대몽골국에 속하는 다른 칸국들과도 접촉이 많고 대몽골국 밖의 다른 지역에 관한 정보도 얻기 쉬운 조건이었다. 원나라에서도 다양한 출신의 색목인이 등용되고 있었지만 소수파에 그친 반면 일-칸국 관리들은 출신 성분이 훨씬 더 다양했다.

 

-칸국은 다른 조공국과 달리 종주국과 한집안으로, 종주국의 할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위치였다. 가잔 칸이 재상(vizier)인 라시드에게 맡긴 <집사> 편찬은 일-칸국 차원의 사업에 그치지 않고 대몽골국 차원의 사업으로도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최고 관직의 라시드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일-칸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mi%27_al-tawarikh#/media/File:Mongol_siege_Jami_al-Tawarikh_Edinburgh.jpg

https://en.wikipedia.org/wiki/Jami%27_al-tawarikh#/media/File:Battle_of_Badr2.jpg (<집사>의 내용 일부. 정교한 삽화가 풍부한 데서도 이 편찬에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칸국에서도 라시드 이전에 역사 편찬이 있었다. 1260년까지의 <세계정복자의 역사>에 대몽골국 역사를 담은 주베이니(Juvayni, 1226-83)는 호라즘 출신으로 훌라구 밑에서 대신을 지낸 사람이었다. -칸국 자체만을 위한 역사라면 주베이니 수준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집사>는 이와 다른 차원의 작업이었다.

 

가잔 칸의 10년은(1295-1304) -칸국 왕권 재확립의 시기였다. 1291-95년 게이하투와 바이두의 4년간을 <위키피디아>에서 살펴보면, (https://en.wikipedia.org/wiki/Gaykhatu, https://en.wikipedia.org/wiki/Baydu, https://en.wikipedia.org/wiki/Ghazan) 왕실 내의 반목으로 일어난 싸움이 아니라 귀족들의 쟁투에 왕족들이 말려든 느낌이 든다. 혼란의 진행에 따라 영토와 군대에 대한 귀족의 장악이 계속 확대-강화되었다. 가잔은 20세 때 숙부 게이하투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어렸을 때부터 총독을 맡고 있던 호라즘의 통치에 전심했다. 호라즘에서 키운 실력이 귀족의 전횡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가잔은 바이두 토벌에 나선 후에 이슬람에 입교했다.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주민과 군대의 지지를 받기 위해 필요했던 조치로 이해된다. -칸 즉위 후 국가 정비도 이슬람국가 건설에 기본방향을 두었지만, 배타적인 원리로 삼지는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이슬람국가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대몽골국의 일원이라는 2중 정체성을 구축했다. 대몽골국의 일원이라는 측면을 지키는 데 볼라드가 큰 역할을 맡았을 것이고, <집사> 편찬을 돕는 것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한 길이 되었을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Jami%27_al-tawarikh#/media/File:Mongol_siege_Jami_al-Tawarikh_Edinburgh.jpg (<집사> 중 가잔의 이슬람 입교 장면)

 

이슬람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적은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이미지가 깔려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조금씩 알아가는 데 따라 이 이미지가 씻어진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 말 안 되는 얘기라는 버나드 루이스의 지적이 재미있다. 이슬람교도에게 왼손은 더러운 일을 맡는 손이므로 그 손에 코란을 들 수 없으니 모두 왼손에 칼을 들고 싸웠겠냐는 것이다. (<The Jews of Islam 이슬람세계의 유대인>(1984) 3) 이슬람의 신축성과 포용성을 알게 되면서, “칼과 코란의 얘기는 기독교인들이 칼과 십자가를 든 자기네 십자군의 모습을 뒤집어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슬람의 포용성에 관한 루이스의 설명을 보면서, 그런 포용성이 이슬람만이 아니라 당시의 여러 문명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딤미(dhimmi)’ 제도가 있었다. 이슬람세계의 이교도는 다소의 차별은 받더라도 신앙의 근본적 자유를 위협하는 박해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제국에서도 몽골 정복 이전의 중국에서도 특정 종교를 강요한 일은 거의 없었다.

 

유럽 기독교의 편협성이 그 시대의 예외적 현상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5세기에 두 차례 공의회(431년 에페소스, 451년 칼케돈)를 계기로 큰 분파를 겪었고, 갈라져 나온 네스토리아파와 오리엔트정교회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많이 퍼져 있었다. 이집트와 시리아 등 비잔틴제국의 영역에서는 이 동방교회들이 심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는데, “이슬람의 등장과 이 나라들의 이슬람화에 따라 상황이 크게 좋아지고 종래보다 더 큰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18) 루이스는 이슬람권의 중심부에서는 포용성의 원리가 확실한 반면 주변부에서는 그 원리로부터의 일탈이 더러 나타났다고 하는데,(같은 책 40-41) 십자군시대 기독교의 편협성도 주변부 현상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가잔이 추구한 일-칸국의 2중 정체성(내부적으로는 이슬람국가이면서 대외적으로는 대몽골국의 일원)은 라시드의 <집사>에도 비쳐져 나타난다. 김호동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224-232쪽에 <집사>의 내용과 구성이 설명되어 있는데 <위키피디아> “Jāmiʿ al-tawārīkh조의 설명과 다소의 차이가 있다. 두 설명에 공통되는 중요한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1) 몽골과 투르크 제 부족의 기원, 역사와 설화.

(2) 가잔 칸에 이르기까지 대몽골국의 역사.

(3) 올제이투 칸의 치세(1310년까지).

(4) 창세기 이래 모든 문명과 국가의 지도자들.

 

이 네 부분은 4중의 동심원처럼 보인다. 제일 안에 일-칸국(3), 그 밖에 대몽골국(2), 그 밖에 초원 세계(1), 그리고 제일 밖에 전 세계(4). 이것이 3부로 이뤄진 <집사> 1-2부 내용이고 제역도지제국도로지를 담은 제3부는 전해지지 않는다고 김호동은 설명하는데, 그가 말하는 제국도로지대신 이스탄불 톱카피박물관에 소장된 Shu'ab-i panjganah<위키피디아>는 제시한다. 아랍-유대인-몽골-프랑크-중국의 5족 세계도를 담은 것이라 한다. 확인된 내용만 보더라도 <집사>세계 속의 일-칸국의 역사를 그리는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