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多民族)국가’를 표방하지만 인구의 91.5%를 점하는 한족(漢族)의 국가에 55개 소수민족이 곁들여져 있는 모양새다. 두 개 이상의 공용어를 나란히 쓰는 일반 다민족국가와 달리 중국의 전국적 공용어는 한어(漢語) 하나뿐이고, 각 소수민족의 언어는 자치구역 안에서만 공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민족’의 의미도 고르지 않다. 서남방 산악지대에는 “골짜기 하나에 민족 하나씩” 있다고 할 정도로 작은 규모의 민족들이 구분되어 있는 반면 회족(回族), 위구르족(维吾尔族), 만주족(满族) 등 구성이 복잡한 민족들도 있다. 민족 개념이 중국에 도입되던 20세기 초에 각지 주민들이 처해 있던 상황에 따라 민족이 획분되면서 그 역사적 배경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감이 있다.

 

무엇보다 ‘주체민족’인 한족의 범주가 민족의 일반적 정의에 비해 대단히 포괄적이다. 전통시대의 ‘한인(漢人)’이 그대로 한족의 범위가 되었는데, 한인은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중화인(中華人)’의 뜻이었다. 중화체제에 포섭되어 한어를 쓰고 중국식 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혈통에 관계없이 한인으로 인식되었다. 

 

인구 1천여만 명으로 규모가 큰 편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의 경우, 20세기 초가 아닌 21세기 초에 민족을 획정한다면 한족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만주족의 고유한 생활방식은 민속촌에나 남아있고 만주어는 생활에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만주어를 쓰는 극소수 지역 중에 신장(新疆) 한 구석의 스버족(锡伯族) 자치구역이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진다. 만주지역에 있던 스버족의 일부가 청(淸)나라의 실변(實邊)정책에 따라 이주했던 것이다.

 

황싱타오(黄兴涛)의 <重塑中华(다시 만든 중화)>(2017)는 근대 중국의 ‘중화민족’ 관념 형성 과정을 해명한 책이다. 민족의 개념을 19세기 중엽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소개했지만 그 개념을 중국인 자신에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19세기가 끝날 무렵 변법(變法)운동 단계에 와서야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양 물질문명의 성과물만을 도입하려 하던 양무(洋務)운동 단계와 달리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를 인식하면서 중국의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초기의 중국 민족주의에는 배타적 성격이 강했다. 중국이 처한 곤경의 책임을 이민족 왕조에 떠넘기고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공화제 혁명의 한 목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이 1930년대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워 동북지방을 점령할 때 국민당 정부의 반발이 강하지 않았던 데는 이런 경향도 작용했다.

 

공산당이 국민당에 비해 포용적인 민족정책을 취하게 된 데는 대장정(長征, 1934-36)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인민을 위한 복무”라는 단순한 이념을 넘어 민족 간 협력이 국가의 성립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공산당 제1세대는 소수민족 지역을 전전하는 동안 투철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공산당은 서양을 본받기에만 급급하던 국민당에 비해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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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