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국과 주변 오랑캐의 관계사를 볼 때 중국이 상수(常數)처럼, 오랑캐가 변수(變數)처럼 느껴지기 쉽다. 중국은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랑캐는 언제 어느 오랑캐가 나타나 어떤 짓을 할지 예측불허로 느껴지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중국 측에서 남긴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기록의 주체인 중국인들은 자기 위치와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한편, 객체화된 오랑캐는 자기네 눈에 비쳐진 모습으로만 기록에 남겼다. 20세기 이래 중국사 연구가 고고학과 인류학의 도움으로 문헌기록에 대한 압도적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이 편향성이 얼마간 보정되어 왔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의 막대한 규모와 장구한 지속성에 있다. 중국은 진 시황의 통일 이래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전후를 점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존재해 왔다. 제국이 일시적으로 와해될 때도 결속력이 강한 문명권으로서 존재는 계속되어 제국의 복원이 거듭거듭 이뤄졌다. 그래서 여러 종족이 명멸한 유목민 오랑캐들이 중국이라는 꺼지지 않는 등불 주변을 맴돈 부나방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를 극복하기 위한 가설 하나가 인류학 쪽에서 나온 것이 있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A History of Russia, Central Asia and Mongolia (러시아, 중앙아시아와 몽고의 역사)>(1998, 2책)에서 제시한 ‘내부 유라시아(Inner Eurasia)’ 개념이다.

 

크리스천은 유라시아대륙을 내부 유라시아와 외부 유라시아(Outer Eurasia)로 쪼개서 본다. 외부 유라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 대서양에 접하고 강우량이 넉넉한 온대-아열대 지역이다. 주요 문명들이 발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외부 유라시아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면 강우량이 적어 농업문명을 정착시키기 어려운 지역이 펼쳐진다. 동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이 광대한 건조지역에서는 어느 시기에도 선진문명이 발달한 적이 없었고 서로 다른 언어와 풍속을 가진 많은 종족들이 얽혀서 살아왔다. 

 

유라시아대륙의 절반 가까운 면적의 이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볼 것을 크리스천은 제안하는 것이다. 가능한 일일까? 가장 큰 규모의 역사공동체로 여겨져 온 것이 ‘문명권’이다. 문명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통합시키는 힘을 가진 현상이다. 그래서 발전된 문명을 가졌을 때 대규모 정치조직도 성립되고 넓은 지역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묶어서 역사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이 문명권으로 구분되어 인식되고 각 문명권의 특성이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에 비해 문명 수준이 낮았던 보다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보자는 제안이 일견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크리스천의 제안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그 제안의 주된 기준은 기후조건과 그에 따른 생태조건이다. 각 문명권의 특성이 그 기후조건에 좌우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농경의 확산이 어려울 만큼 강우량이 작다는 것은 강우량이 어느 계절에 어느 정도로 집중되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의 확연한 기후조건이다. 그 조건을 공유하는 지역이라면 강우량이 넉넉한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경제적-문화적 특성을 공유할 개연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인류문명은 농경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자연을 길들여 식량 확보를 쉽게 만든 것이 문명의 핵심인데, 동물자원을 확보하는 목축보다 식물자원을 확보하는 농경에서 더 큰 성공이 이뤄졌다. (식물이 동물보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어서 대량 확보가 쉬웠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일이 있다.) 농경을 통한 잉여생산이 빠르게 자라나 고등문명의 발판이 되었다. 강우량이 작은 내부 유라시아의 문명 발달이 늦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흉노제국을 한(漢)제국의 ‘그림자 제국’으로 본 메타포를 연장해서 내부 유라시아에 하나의 ‘그림자 문명’을 설정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중원에서 농업생산의 발달로 하나의 제국이 이뤄졌을 때 그 힘이 이웃한 유목사회에 투영되어 흉노제국이 성립된 것처럼, 외부 유라시아에서 발달한 문명의 힘이 내부 유라시아의 광대한 공간에 투영될 때, 원래의 문명권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특이한 피드백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문명권들 사이에도 늘 얼마간의 접촉과 교섭이 있었다. 그 교섭의 범위는 각 문명의 기반구조(인프라)의 차이에 제한받았다. 불교사상이 중국에 전파될 때 현세를 중시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중국 지식층의 반발이 있었고 다신교의 전통을 가진 로마에서는 유일신을 받드는 기독교가 박해받았다. 내부 유라시아의 여러 사회에서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이런 편협성이 훨씬 드물게 나타난다. 외부 문명과 길항하는 같은 층위의 기반구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空) 문명’의 성격을 가진 하나의 문명을 내부 유라시아 여러 사회가 공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외부 유라시아 여러 문명권과 같은 층위의 기반구조를 갖지 않았다는 조건 때문에 내부 유라시아의 여러 사회는 상당 수준의 포용성을 나름대로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포용성이 인류문명 발전의 몇몇 고비에서 ‘그림자 문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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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