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당나라의 쇠퇴와 위구르제국의 소멸로 혼합형 오랑캐를 위한 틈새가 또 한 차례 나타났다. 840년 위구르제국 멸망 후 그에 눌려 지내던 여러 세력이 자라나는 가운데 하나가 거란이었다. 거란이 그중 특출한 성과를 거둔 조건을 그 흥기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거란은 초기에 8()가 느슨한 연맹을 맺고 있었다. 이 느슨한 연맹을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그 흥기의 관건이었다. 일라(迭剌)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907년 연맹의 수장인 가한(可汗)에 취임했다가 임기제의 그 자리를 종신직으로 만들고 916년에 이르러 거란의 국호를 내걸었으니, 907년 아보기의 가한 취임이 거란 통일의 고비였다고 볼 수 있다.

 

일라부의 패권이 아보기의 조부 때부터 산업 기반을 확장한 데 있었다고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설명한다. 아보기의 조부 때라면 위구르제국 멸망 직후의 시기다. 거란 8부 중 서남쪽 모퉁이, 중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일라부가 농업을 확장하고 야금, 직조 등의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나라와 위구르제국의 통제력이 굳건할 때라면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바필드는 구양수(歐陽脩)<오대사기(五代史記)>를 인용해서 아보기가 농업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고 소금의 독점권을 발판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169-170) 거란 내부에서 일라부의 패권이 중국 농경사회와의 인접성에 기인한 것처럼 거란이 요() 제국 건설에 성공한 이유도 같은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초기부터 남정(南廷)과 북정(北廷)을 함께 둔 요나라의 2중 체제는 농경과 목축을 포괄하는 혼합형 국가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유목민의 부족사회 질서를 보존한 북정은 다른 유목세력의 도전을 물리치는 군사력을 담당했는데, 936년 연운16(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면서 요나라의 농경지역이 장성 이남으로 확장됨에 따라 경제력을 담당한 남정의 비중이 자라났다.

 

112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진(女眞)의 금()나라는 요나라보다 북중국의 영토를 크게 늘리면서 요나라의 2중 체제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여진도 거란과 같은 혼합형 산업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승계가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란과 여진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완전히 서로 다른 종족이었을까?

 

중국 주변 제 종족의 이름은 중국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기록을 남긴 중국 주류사회의 인식이 현실과 맞지 않는 상황이 많이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족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있고 같은 종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경우도 있다. 숙신(肅愼)과 말갈(靺鞨)과 여진은 대략 같은 범위의 종족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각 시기 중국사회의 인식이 연결되지 못해서 시기마다 다른 이름이 쓰인 것이다.

 

숙신과 말갈을 여진의 조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호(東胡)와 선비(鮮卑)를 거란의 조상으로 볼 수도 있다. 흉노제국이 일어서기 전에 몽골고원 동쪽 초원지대는 동호의 영역이었다. 흉노에게 격파된 후 동호의 일부가 오환(烏桓)과 선비 등 작은 세력을 이루고 있다가 흉노제국이 무너질 때 선비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흩어진 흉노 무리들이 선비로 모습을 바꾸는 정황이 그려져 있다. 선비족이 초원의 주류가 되는 상황에서 주변 세력들이 그에 포섭되는 것이다.

숙신과 말갈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가리키는 범위가 막연했다. 우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도 나타나는 시기와 위치가 들쑥날쑥한 것이 중국의 지칭을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북쪽 일대에 많이 나타나지만 한강 상류 유역 등 남쪽에서도 나타난다. ‘말갈이란 이름만 갖고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데는 의문이 있다.

 

10세기의 여진도 범위가 막연하다. 여진 중에서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은 부류를 숙()여진, 낮은 부류를 생()여진으로 구분했다고 하는데, 거란으로부터 동쪽과 북쪽에 있는 종족을 모두 여진으로 부르다가 그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됨에 따라 구분하게 된 것 같다. 여진 중에는 발해(渤海) 유민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일반 거란인보다 문화 수준이 높더라도 피정복자로서 억압받았을 것이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보다 북중국의 통치 영역을 늘렸을 뿐 아니라 문화와 제도 전반에서 중국화가 더 빠르고 철저했다. 거란인보다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백지처럼 쉽게 중국 문화를 흡수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중국에서 멀수록 문화 수준이 낮았으리라는 선입견에 얽매인 것으로 보인다. 거란과 여진은 대체로 비슷한 문화 수준과 산업 형태를 갖고 인접 지역에 어울려 있었는데, 발해라는 역사적 경험에 의해 갈라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훗날 여진족이 청()나라를 세울 때 그 일대의 여러 종족이(거란의 후예 포함) 만주족(滿洲族)으로 통합될 수 있던 것과 같은 공통분모가 만주 지역의 오랑캐들 사이에는 10세기 무렵에도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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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