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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쳐서 오래되면 갈라지고, 갈라져서 오래되면 합쳐진다.(合久則分 分久則合)”

중국사에서 왕조의 성쇠와 치란의 반복을 설명하는 데 속담처럼 널리 쓰여 온 말이다. 달의 차고 기움, 계절의 바뀜 같은 자연현상과 같은 이치로 정치의 굴곡을 설명한 것이다. 일견 그럴싸한 말이지만 너무 간명한 이치에는 함정이 있기 쉽다.


중국사에서 왕조의 교체는 계절이나 삭망(朔望)의 순환처럼 규칙적인 것이 아니었다. 큰 혼란 없이 간판만 바꾸는 식의 교체가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이나 심지어 수백 년의 분열 상태를 겪으며 천하제국의 회복 자체를 기약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왕조 교체에 따르는 사회의 고통이 찰과상이나 타박상 정도에 그칠 때도 있었고, 환골탈태(換骨奪胎)의 큰 변화를 몰고 올 때도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 통일 이후를 더듬어볼 때, 진-한(秦漢) 교체는 작은 변화였다. 왕조가 영(嬴)씨에서 유(劉)씨로 바뀌었지만, 중화제국 창건이라는 큰 과업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나눠 맡은 셈이다. 두 왕조 사이의 공백도 길지 않았다. 전한과 후한 사이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또한 한 차례 외척의 찬탈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국 성립 이후 첫 번째 대란(大亂)의 시대는 4백여 년 한 왕조가 쇠퇴한 뒤에 시작되었다. 220년부터 3국의 분열이 벌어졌다가 60년 만에 진(晉)나라의 재통일로 수습되었지만 치(治)의 시대가 제대로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30여 년 후인 316년 진나라가 한 차례 망하고 남쪽으로 도망가 명맥을 유지하는 동안 원래의 중국이라 할 수 있는 북중국은 5호16국(五胡十六國), 오랑캐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1백년이 지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하고 남쪽의 진나라가 송(宋)나라로 넘어가면서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접어들었다. 북위의 한 갈래로 출발한 수(隋)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589년, 한나라 멸망 후 370년 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긴 분열기는 중화제국의 역사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수-당(隋唐) 교체는 진-한 교체와 비슷한 작은 변화였다. 근 3백년 지속된 당나라의 멸망 후 5대10국(五代十國)의 분열기는 50여 년에 그쳤다. 960년 개국한 송(宋)나라가 1127년 금(金)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가면서 남북조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다가 1279년 몽골의 중국 정복 완성으로 원(元)나라 시대에 들어섰다. 1368년 건국한 명(明)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1644년 청(淸)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하는 과정에는 상당한 혼란이 있었지만 긴 분열기는 없었다.


한나라 멸망 후 삼국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긴 분열기가 그 후 중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면밀한 검토 이전에, 중화제국이라는 정치조직에 아직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도 서아시아에서도 고대제국이 무너진 후 문명권 전체 또는 대부분을 포괄하는 제국 체제는 회복되지 않았다. 고대제국에 이어 중세제국이 성립한 것이 중국사의 독특한 특징이고, 중화제국의 본질은 수-당 중세제국에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 역사학에서는 3세기 초에서 6세기 말에 이르는 대분열기 연구에 몇 가지 제약이 있었다. 첫째, 치세 아닌 난세였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는 시대였다는 편견. 둘째, 이 시대의 상황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오랑캐’를 역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통론. 그 위에 오랑캐에 관한 자료가 전통적 문헌자료의 형태를 취한 것이 적다는 문제가 겹쳐져 있었다.


최근 백년 동안 이 제약들이 많이 극복되었다. 서양 근대역사학의 도입에 따라 역사학자들의 관심이 왕조의 정통성에서 풀려나 난세의 동태적(dynamic) 고찰에 큰 비중이 놓이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다민족국가를 표방함에 따라 오랑캐를 멸시하던 풍조도 억제되었다. 그리고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의 발전에 따라 자료의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