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파미르고원 서쪽으로는 바로 가까운 곳까지 페르시아문명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동쪽으로는 자연조건이 척박하고 따라서 인구가 희박한 광대한 타림분지를 지나가야 중국문명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타림분지를 지나는 안정된 통로를 만드는 것이 실크로드의 열쇠였다.


타림분지는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어서 사람이 살 만큼 물 있는 곳이 드물다. 분지의 북쪽으로 천산(天山)산맥 기슭과 남쪽으로 곤륜(崑崙)산맥 기슭을 따라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있는 곳의 오아시스에 마을과 도시가 점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숙소와 식량 등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이 도시들을 잇는 두 개의 띠가 실크로드의 북로와 남로가 되었다.


이 두 개의 길을 통상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부르기도 하는데 혼란스러운 이름이다. 천산산맥의 북쪽과 남쪽을 지나는 길로 들리기 때문이다. 천산산맥 북쪽의 중가리아(Dzungaria) 지역을 지나는 길을 ‘천산북로’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길은 실크로드로서 기능을 발휘한 길이 아니다. 타림분지 남북의 길을 ‘타림 남로’와 ‘타림 북로’로 부르는 편이 좋겠다.


일부 학자들이 ‘초원의 길’이라 부르기도 하는 중가리아 지역은 타림분지보다는 강우량이 많고 따라서 인구도 많다. 그런데 왜 중가리아 아닌 타림분지를 실크로드가 지나가게 되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생각된다.


첫째는 타림분지를 거치는 길이 페르시아문명권 중심부로 가는 데 더 가깝다는 점이다. 분지를 지나 파미르고원만 넘으면 바로 페르가나 계속에 들어설 수 있다. 반면 중가리아를 지나면 끝없는 초원지대일 뿐이다.


둘째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생각을 떠올려보는 것인데, 타림분지 오아시스 도시들의 정착성이 중가리아 초원지대의 유동적인 유목사회에 비해 안정된 조건을 보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인원과 물자의 통과에는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은 통과지역의 세력에 대한 세금이나 선물, 또는 약탈 위험으로 나타난다. 통과 지역이 정착 세력의 장악 하에 있을 때 통관세를 내는 것이 장악 세력이 불확실한 지역에서 약탈의 위험을 겪는 것보다 상인들이 감당하기 쉬운 편 아니었을까?


실크로드를 포함하는 중앙아시아 지역 역사는 그 실제 의미에 비해 연구가 적은 상황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근대역사학 연구가 국민국가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지역에 강력한 국민국가가 근대 들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또 하나는 기록문화가 취약한 지역이어서 체계적 문헌자료가 적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설 무렵에 시작된 고고학 발굴과 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 역사 연구가 새로운 길을 열어 왔다.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을 배경으로 시작된 이 지역 연구가 2차 대전 후에는 소련과 중국 등 이 지역을 영토로 한 공산권 국가들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이후 국제적 협력 분위기가 자라남에 따라 연구가 더욱 발전하고 있다.


그 성과의 축적에 따라 문헌 연구만으로는 떠올릴 수 없던 과거 이 지역의 여러 가지 모습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그 새로운 성과를 잘 정리해서 보여주는 책 하나가 연전에 나왔다.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문헌을 곁들인 새 역사(The Silk Road, A New History with Documents)>. (류형식 번역으로 2015년 소와당에서 나온 번역판은 이 책의 구판인 듯)


책을 펼치기 전에는 “문헌(documents)”이란 말이 의아했다. 실크로드의 새 역사라면 고고학 연구에 의거한 것일 텐데 문헌이라니? 알고 보니 발굴을 통해 찾아낸 상당량의 문헌이 연구 확장에 활용되어 온 것이었다. 고고학 발굴로 출토되는 문헌은 대개 금석문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종이에 적힌 문헌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썩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종이가 귀해서 폐기된 각종 문서로 수의(壽衣)를 만든 사례가 많기 때문에 무덤 안의 시신에서 벗겨낸 종이옷에서 온갖 신기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이 연재 중에 이 방면 이야기를 또 할 때가 있을 텐데, 그때는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재미있는 것을 더러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