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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제가 즉위 직후인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 목적이 흉노에 대항하기 위한 월지와의 동맹에 있었다고 <사기> 등 사서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사명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을 것 같지 않다. 사마천 등 사가들에게 흉노와의 대결이 워낙 크게 보였기 때문에 서역에 대한 관심을 모두 흉노와의 관계에 종속시킨 것 같다.


중시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당시의 정황이란 한나라의 서방 교역 증대였다. 거대한 제국을 향한 정치적 통합은 거대한 시장을 향한 경제적 통합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정책에서 도로 건설과 도량형 정비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도 그 까닭이었다. 다음 단계의 경제적 통합은 한 무제의 염철(鹽鐵) 전매정책으로 나타났다.


통일 이전에는 변경의 여러 제후국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 오랑캐와 교역을 벌이기도 하고 어느 제후국의 통제도 받지 않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많았다. 그러나 한나라의 치안이 자리 잡는 데 따라 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중앙조정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오-초 칠국의 난 때 거상(巨商)들의 지지가 조정의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까지는 천하 형세를 좌우할 만한 재력이 민간에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앞선 시기에 여불위(呂不韋)가 재력을 발판으로 통일 직전의 진나라를 농단한 일도 그 시대 민간자본의 위력을 보여준 바 있다.


중앙집권의 강화에 따라 재정이 크게 늘어나고 대외교역도 조정의 주도하에 확장될 길이 열렸다. 종래 사방의 외이로부터 중국에 수입되던 물자는 각 방면의 자연조건에서 나온 토산품이 대부분이었다. 외이의 문명-기술 수준이 중국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서쪽에서는 다른 문명권에서 나온 특이한 물품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광대한 사막과 험난한 산악지대 저쪽에 페르시아제국이 있기 때문이었다. 멀고 험한 여정 때문에 엄청난 운송비가 필요했지만 수십 년 평화 속에 한나라 사회의 소비수준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갈수록 커졌다.


중국에서 서방으로 향하는 길로 이른바 실크로드가 선택된 것은 지형보다도 길 저쪽에 적합한 교역 상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타림분지의 사막과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을 지나는 길이 지형으로는 매력적일 수 없다. 페르시아제국이 만들어놓은 매력적인 시장이 파미르고원 바로 바깥까지 들어와 있기 때문에 파미르고원을 넘는 길이 뚫린 것이다.


그리스를 공격한 ‘다리우스 대왕’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가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서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발칸반도, 동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걸치는 거대한 제국을 경영했다. 이 제국은 강역 내에 튼튼한 도로망을 건설했고, 그 일부가 실크로드의 서반부를 이루게 된다. 알렉산더가 이 제국을 정복하고 죽은 후 제국의 강역 대부분은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로 넘어갔다가 기원전 130년대에는 한 지방 세력이던 파르티아(Parthia)가 자라나 이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치는 영역을 차지했다. 아르사케스(Arsacid) 왕조의 파르티아제국이 한 무제 당시 파미르고원 서쪽을 장악하고 있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한나라의 교역 상대였다.


파미르고원 서북쪽으로 펼쳐진 페르가나 계곡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에 걸쳐있는 지역으로 아케메네스 시대에 페르시아문명이 자리 잡고 셀레우코스 시대에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알렉산더 정복 때 그 이름을 딴 몇 개의 알렉산드리아 중 하나가(Alexandria Eskhata) 이곳에 있었던 사실에서 당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알아볼 수 있다. 한 무제 당시에는 파르티아제국의 판도 안에 있었는데 안식(安息)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진 파르티아와 별도로 이곳은 대완(大宛)으로 알려졌다. 장건이 찾아간 대월지가 페르가나 남쪽의 박트리아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장건은 이곳을 거쳐 갔고, 한나라에서 가장 중시하는 교역 상대가 되었다. 장건이 대완을 처음 방문한 지 20여 년 후 무제가 대완에 정벌군을 보내기도 했는데, 군대를 이끈 이광리(李廣利)가 ‘이사(貳師)장군’이란 별명으로 통하게 된 것을 보아도 당시 중국인이 대완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댜. ‘이사’는 대완의 왕도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