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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내가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와는 중국사의 풍경이 적지 않게 바뀌어 있다. 그중 크게 바뀐 영역의 하나가 3~6세기의 대분열기다. 위에 말한 20세기 후반 학계의 변화가 가장 큰 성과를 가져온 영역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통 왕조들의 위축된 모습만 안타깝게 그려지던 이 영역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활기차게 부딪치고 어울리는 모습을 이제 볼 수 있게 되었다. 근년에 나온 연구 성과를 훑어보며, 이 시대가 중국의 진로와 성격을 결정하는 데 전국시대 못지않은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역의 새 모습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이 오랑캐의 역할이다. 김호동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2010)에서 이렇게 말한다.

“(...) 이제까지의 실크로드 연구에서도 유목민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아무래도 부차적인 의미밖에는 지니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유목민들은 국제상인들을 종종 약탈하거나 아니면 가끔씩 대가를 받고 안전을 보증해 주는 존재로 묘사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사회를 그 남쪽에 위치한 농경민들의 사회와 함께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두 요소’로 꼽고 있으니, 말하자면 세계사를 움직인 두 개의 수레바퀴의 하나인 셈이다.”(25쪽)

부수적 존재로 경시되어 온 유목민의 역할을 살려낸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두 개의 수레바퀴의 하나”라는 것은 좀 지나치다. 앞에서 나는 흉노 제국을 하나의 ‘그림자 제국’에 비유했는데,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교섭에서 궁극적인 주도권은 농경사회 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철기시대에 들어선 이후는 분명히 그렇다. 생각해 보라. 철기의 등장으로 농경사회에서 삼림 개간, 수리(水利) 공사, 밭 갈기 등 얼마나 큰 생산력 향상이 일어났는가? 유목사회에도 생산력 향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농경사회와 비교될 수준은 아니었다.


춘추시대까지는 이른바 중원(中原) 지역에도 오랑캐가 뒤섞여 있었다. 철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의 상태에서는 농경과 유목의 생산력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강변의 평야에는 농경사회가 자리 잡고 있어도 인근의 골짜기에는 유목사회가 나란히 존재하던 상황이 그려진다. 철기 보급에 따라 농경의 생산력이 더 큰 폭으로 자라나면서 유목민도 차츰 농경으로 전환하거나 농경민이 유목민을 몰아내고 그 터를 농지로 개간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전국시대를 통해 중원 지역이 완전한 농업지대를 이루었고 전국 후기에 북방 제후국들이 장성(長城)을 쌓아 유목지대와의 경계선으로 삼은 것은 그 결과였다.


초기의 오랑캐가 유목민만은 아니었다. 채집, 수렵 등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다양한 생산-생활 방식이 있었다. 농업의 발달과 확장에 따라 이들 원시적 생산-생활 방식이 사라져 가는 중에 유목이 농업 다음으로 유력한 생산-생활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식물자원을 통제하는 농업과 동물자원을 통제하는 유목은 문명 초기에 나란히 발전한 경제활동이었다.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에 걸쳐 광대한 농업지대가 형성되었을 때 이 지대를 관리하는 정치조직으로 세워진 것이 진-한 제국이었다. 농업은 다른 경제활동에 비해 생산성이 높았기 때문에 계속 확장된 것이었고, 확장에 따른 기술 발달을 통해 잉여생산이 더욱더 커졌기 때문에 대규모 정치조직의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목의 잉여생산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흉노제국의 성립은 진-한 제국의 잉여생산을 탈취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림자 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