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리장성은 대단히 강한 아우라를 가진 문화유산이다. 사람들이 장성을 제일 많이 참관하는 곳이 베이징 동북쪽 교외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인데, 놀라운 위용이다. 그런 웅장한 성곽이 도시 하나를 감싸도 대단한 물건인데, 그것이 1만 리도 넘는 길이로 뻗어 있다니!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바다링에서 장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고통과 치욕의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장성을 들먹인 것이다.


닉슨의 이 말은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The Great Wall, China against the World, BC 1000~AD 2000, 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장성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고 이 글을 쓰는 데도 참고가 된 책이므로 이 책에 관한 생각을 조금 적어둔다.

 

2006년 이 책이 나왔을 때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얼른 구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이런 책이 21세기에 나오다니!”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나왔으면 크게 환영받았을 책이다. 백 년 전의 선교사들보다 자료 수집을 좀 더 체계적으로 했다는 것 외에는 사고력과 분석력에 아무 차이가 없다. 무엇보다 중국을 깔보고 중국문명의 가치를 낮춰보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료를 멋대로 재단하는 난폭함에는 백 년 전 선교사 중에도 낯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큰 가르침을 얻은 선학 중에 영국의 조지프 니덤, 프랑스의 자크 제르네,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영국 출신인 조너선 스펜스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학풍을 은근히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오염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중국 때리기’가 연구비, 학위, 교수직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 지금까지도 서양 학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출간 직후에 입수했던 원서를 언제 누구에게 줘버렸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이번에는 도서관에서 번역본을 빌려 보았다.

 

로벨의 책에 좋은 관점도 많이 있다. 장성을 쌓은 목적이 방어만이 아니라 공격에도 있었다는 관점은 훌륭한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공격‘에만’ 있었던 것처럼 우기는 건 지나치다. 중국의 호전성을 규정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느낌이다.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서 산시(陝西)성까지, 일찍부터 중원에 포괄된 지역의 북쪽으로 둘러쳐진 장성은 분명히 방어용이다. 그러나 그 서쪽으로 간수(甘肅)성 깊숙이, 둔황(敦煌) 부근까지 세워진 부분은 농경지역을 방어하는 목적이 아니다. 한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이 구역은 서역(西域)과의 교통로로서 감숙회랑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역사부도에 나오는 한나라 강역. 감숙회랑을 거쳐 사막지대에 이르는 서쪽 영역은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군사적 관리의 대상이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교통로는 기원전 2세기 말 장건(張騫)이 개척한 이래 중국의 가장 중요한 육상 교역로가 되었다. 서역(인도 포함)은 중국 부근의 가장 큰 문명권으로서 한나라 때부터 중요한 교역 상대가 되었는데, 해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가장 중요한 통로가 실크로드로 떠오른 것이다. 실크로드 대부분은 사막과 고산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크게 방해되는 세력이 없는데, 유일한 위협세력이 흉노 등 북방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기 위해 장성을 이어 쌓은 것이었다. 그런데 로벨은 이 구역의 특성을 장성 전체에 적용시키려 든다.

 

글 앞쪽에서 북경 가까운 바다링 언저리 장성의 위용을 보여드렸는데, 로벨은 장성 전체가 그런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 책이 2006년이 아니라 1906년에 나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다. 1793년에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건륭(乾隆)황제를 만나러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가는 길에 장성의 위용에 감동해서 장성에 사용된 석재의 양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모든 건물에 사용된 분량”과 맞먹고, 높이 2미터 두께 60센티미터의 벽으로 지구를 두 바퀴 감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했다. 이것은 5천 킬로미터 길이의 장성 전체가 자기가 본 곳처럼 두께와 높이가 각각 10미터 전후에 이르는 석축일 것으로 가정하고 계산한 것이다.

 

그런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큰 석재와 벽돌을 쓰는 그런 웅장한 축성법은 대포가 많이 쓰이게 된 명나라 때 북경 등 제국의 중심부를 보호하는 구간에만 사용된 것이었다. 명나라 이전에 세워진 성벽은 진흙과 돌멩이 등 현장 부근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최소한의 전술적 우위를 목표로 간략하게 건설되었다. 간수성과 랴오닝(遼寧)성 등 변두리 구간은 더 허술했다.

 

또 하나 로벨의 심한 억지는 장성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장성을 세운 중국인을 사악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한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것이다. 장성이 제 구실을 못한 일이 역사를 통해 여러 차례 있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 구실을 한 때가 더 많았다. 제 구실 못한 것이 특이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장성은 돌로 쌓은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다. 구조물 자체가 방어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물을 이용하는 군사제도가 효능을 가진 것이었다. 제국을 옹위하는 제도는 일시적 상황이 제국을 쉽게 무너트리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러나 제국의 근거가 무너질 때는 제국의 한 부분인 제도가 어떻게 혼자 버틸 수 있는가? 

 

1644년 청군의 입관 장면을 보자. 요동(遼東) 지역의 숱한 방어선이 무너진 뒤까지 장성은 버텼다. 명나라가 무너져서 장성이 뚫린 것이지, 장성이 뚫려서 명나라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에게 유린당할 때 오삼계는 당시 중국인을 대표해서 선택을 내린 것이고, 그 선택의 기회는 장성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다. 명나라가 잃어버린 천하를 이자성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청나라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2006년 나온 로벨의 책 참고서목에 1997년 나온 패멀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The Manchus, 양휘웅 옮김, 돌베개 펴냄)가 빠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로벨이 그 책의 존재를 몰랐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입맛에 맞지 않아서 무시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장성은 중화제국이 존재한 2천여 년 동안 화하와 외이 사이의 장벽으로 서 있었다. 다른 어느 방면에서도 볼 수 없는 굳건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굳건한 장벽도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팎의 상호관계에 절제를 가함으로써 변화를 순조롭게 만든 효용도 장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화와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서 보다 긴밀하고 유기적인 측면을 찾는 작업의 초입에서 장성을 둘러싼 교섭관계를 먼저 떠올려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