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 황하문화권, 장강문화권, 파촉문화권 등 기존의 중요한 농경지역이 모두 ‘중원’으로 통합되었다. 그에 따라 전국시대 이후의 외이는 농경문화를 갖지 않았거나 비중이 작은 부족들이 되었다. 그러나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발달에 따라 전에는 농업화가 어렵던 외이 지역으로 농경문화가 꾸준히 퍼져나갔고, 중원은 그런 외이 지역을 단계적으로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한반도는 농경문화가 고도로 발달된 뒤까지도 바다로 떨어져 있어서 중원에 흡수되지 않은 특이한 지역이었다.

 



농경문화의 확장 방향을 살피기 위해 중국의 건조지수도(乾燥指數圖, 中國水利水電科學硏究院水資源所 편)를 살펴본다. 건조지수(연 강수량에 대한 연 증발능력의 비율) 2.0 이하인 지역이 초기 농경에 적합했을 것 같다. 황하와 장강 유역, 남해안, 그리고 동북(만주) 지역 대부분과 감숙회랑(甘肅回廊,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도 한다.)이 이 조건에 맞는다. 


황하와 장강 유역의 중원에 자리 잡은 농경문명은 천여 년에 걸쳐 남해안, 지금의 푸젠(福建)성과 광둥(廣東)성 지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 남방지역의 초기 농업발달이 늦은 조건 두 가지가 흔히 지적된다. 온난-습윤한 기후 때문에 숲이 빽빽해서 개간이 어려웠으리라는 것과 강우량이 많은 곳의 대규모 개간을 위해서는 배수(排水)라는 고난도 수리(水利) 기술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철기 보급이 이들 조건의 극복에 큰 역할을 맡음으로써 농경문화의 남방 확장이 순조로워졌다는 설명이 따른다. 남방은 중국문명이 꾸준히 진격해 나아간, 방어보다는 공격의 방향이었다.

 

동쪽과 남쪽으로의 확장이 바다에 막혔다면, 서쪽으로의 확장은 산악과 사막에 막혔다. 티베트 고산지대와 신장(新彊)-칭하이(靑海)의 건조지대는 농경만이 아니라 어떤 산업에도 적합지 않은 곳이어서 인구가 희박했다. 바다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인간 활동의 장벽이었다.

 

북쪽이 변화의 여지가 큰 방면이었다. 정북방에서 동쪽으로는 강우량이 꽤 되고 지형도 평탄한 지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많은 유목민이 생활할 수 있는 초원지대가 있고,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사회가 자라날 수 있는 지역도 많이 있었다. 흉노(匈奴)로부터 선비(鮮卑), 돌궐(突蹶),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고(蒙古), 만주(滿洲)족에 이르기까지, 중원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오랑캐의 대부분이 이 방면에서 나타났다. 장성(長城)이 필요한 방면이었다.

 

중국과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중국 쪽에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있다. 중국 입장에서 남긴 이 기록에는 중국의 우월성을 강조 내지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경향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를 크게 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화-이(華-夷) 관계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경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중국 기록 내용에 비해 오랑캐와 중국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양자 간에는 공유하는 것이 많았으리라고 나는 추정한다.

 

북방의 만리장성은 화-이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현장이었다. 화-이 관계가 이질적 존재들 사이의 단순한 대립관계가 아니었으리라는 내 추정을 이곳에서 제일 먼저 확인해 본다. 대립이란 것 자체가 공유하는 것이 꽤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소 닭 보듯” 하는 이질적 존재들 사이에는 대립조차 일어나기 어렵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중국 왕조는 한나라와 명나라였다. 한나라에게는 흉노라는 숙적이 있었고 명나라는 몽고족과 오랫동안 다투다가 나중에는 만주족에게 유린당했다. 흉노, 몽고족, 만주족은 당시의 중국과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을까? 나중에 더 세밀히 살펴보겠지만, 오늘은 약간의 실마리를 뽑아두겠다.

 

진 시황이 흉노에 대비해서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시황이 경계한 것은 ‘호(胡)’였다. <<사기>>에 ‘동호(東胡)’로 나오는, 당시에 흉노보다 강성한 세력이었다. 흉노건 동호건 전국시대에는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인접한 제후국인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그럭저럭 통제하던 작은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나라의 통일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나타난 것이 어찌된 일일까?

 

전국 말기 중원의 대혼란을 피해 많은 인구가 북방으로 달아났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였다. 망명자 중에는 큰 세력을 이끈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한왕(韓王) 신(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 같은 제후들까지 흉노로 넘어갔다. 그런 망명자들이 많은 선진기술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제철(製鐵)을 비롯한 생산기술부터 정치기술과 병법(兵法)까지. 대규모 기술 유입이 아니라면 이 시기 흉노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사기>> <흉노열전>에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이 보인다. 문제(文帝) 때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에 귀순한 환관인데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선우(單于)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유목사회에 없던 행정기술을 전파해준 것이다.

 

진나라 또는 한나라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흉노는 대안을 제공해준 것이다. 한왕이나 연왕에게는 만족할 만한 신분과 생활양식을 보장해줄 수 있었고, 중항열 같은 인물에게는 경륜을 펼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전혀 이질적인 야만사회라면 그런 조건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흉노가 중국문명을 상당 수준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망명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래서 중화제국을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고조가 천하를 차지한 후 진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의 연합세력이던 이성(異姓) 제후를 핍박하기 시작하자 기원전 201년 한왕 신이 흉노에 투항했다. 이듬해 고조가 32만 병력으로 흉노를 원정했지만 오히려 포위당해 곤욕을 겪었다. 그 후 70여 년간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저자세로 흉노를 대하다가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경우에는 몽고족 아닌 만주족에게 천하를 넘겨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이후 명나라를 내내 위협한 것은 몽고족이었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일도 있고 북경까지 쳐들어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접수할 때 몽고족은 일부가 그 밑에 편입되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신흥세력인 만주족이 결정적 단계에서 주도권을 쥔 이유가 무엇일까?

 

(1449년 명 영종(英宗)이 몽고 오이라트부를 정벌하러 출병했다가 오히려 포로로 잡히는 토목지변(土木之變)을 겪었다. 그리고 1550년에는 알탄 칸의 군대가 북중국 일대를 휘젓고 북경 성문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몽고족보다 만주족 사회가 중국문명에 더 접근해 있어서 중국인들이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는 점에서 나는 결정적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그 차이는 농업화의 수준에 있었다고 본다. 만주족의 주된 구성원이 된 거란족과 여진족은 10세기 초에서 12세기 초까지 북중국을 통치한 일이 있고 몽고족은 12세기 초에서 13세기 중엽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농경문화가 전파될 기회였다. 그런데 몽고족의 본거지인 초원지대는 너무 건조해서 농업화가 힘든 반면 동북 지역은 농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만주족이 동북 지역에 세운 후금(後金)은 상당 규모의 농업사회를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 좌절감을 느낀 중국 지식인과 기술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1644년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쉽게 문을 열어준 이유 하나는 만주족이 선포한 청나라가 중화제국의 체제에 접근해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 아닌 청나라의 천하에서도 그는 장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이 몽고족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한 뒤에 패멀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양휘웅 옮김, 돌베개)를 읽었는데, 입관 당시 만주족의 상황이 잘 설명되어 있다. 만주족이 몽고족과 달리 농업사회에 큰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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