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中國戎夷,五方之民,皆有性也,不可推移。東方曰夷,被髮文皮,有不火食者矣。南方曰蠻,雕题交趾,有不火食者矣。西方曰戎被髮衣皮,有不粒食者矣。北方曰狄,衣羽毛穴居,有不粒食者矣。中国、夷、蠻、戎、狄,皆有安居、和味、宜服、利用、備器,五方之民,言语不通,嗜欲不同。”


(5방(方) 사람들, 즉 중원과 4방 오랑캐는 모두 자기 특성이 있어서 억지로 바꾸지 못한다. 동방 사람은 이(夷)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한다. 음식을 날로 먹기도 한다. 남방 사람은 만(蠻)이라 하는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엇갈리게 한다. 음식을 날로 먹기도 한다. 서방 사람은 융(戎)이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한다. 곡식을 먹지 않기도 한다. 북방 사람은 적(狄)이라 하는데 깃털과 털로 옷을 해 입고 굴속에서 산다. 곡식을 먹지 않기도 한다. 중원과 이, 만, 융, 적, 모두 자기네 거처와 음식, 의복, 도구, 기물이 있으며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이 구절이 오랑캐를 중국으로부터의 방위에 따라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으로 구분한 근거 문헌이다. 


연재 제목에 ‘오랑캐’란 말을 썼는데, 여기서는 이 말을 제한된 의미로 쓴다는 사실부터 밝힌다.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보통 쓰이지만, 여기서는 夷、蠻、戎、狄 네 글자의 공통된 훈(訓)으로서 ‘오랑캐’, 중화(中華)와 구분되는 주변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도 당연히 오랑캐의 하나다.
네 방향 오랑캐를 서로 다른 글자로 표시한 것이 엄밀한 분류학적 근거에 따른 것 같지는 않다. 서로 다른 방향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질 것이라는 오행설(五行說)의 관념에 따른 규범적 호칭일 뿐이다. 우리에게 얻어 걸린 글자에 벌레나 짐승 대신 활이 들어 있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큰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겠다. 


(근년의 갑골문 연구에서 ‘夷’ 자가 방석 위에 꿇어앉은 사람 모습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역사 초기의 화-이(華-夷) 개념도를 보면 중국 본토의 황해 연안이 동이 지역으로, 양자강 이남이 남만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화하(華夏)’, 즉 중화의 영역은 지금의 허난(河南)성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이 개념도는 춘추시대 전까지 유효한 것이었다. 당시의 동이는 하-상-주(夏-商-周) 왕조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동쪽의 여러 부족을 가리킨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중국 동해안이 모두 화하에 편입되자 비로소 바다 건너 한반도를 동이로 부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양자강 유역의 초(楚)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가 춘추시대에 중원으로 들어오자 남만의 영역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후세의 외이(外夷, 夷-蠻-戎-狄을 총칭하는 말)에 관한 논설 중에는 화하와 외이의 차이가 아주 큰 것처럼, 마치 외이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본 것이 많다. 청(淸)나라의 입관(入關)으로 만주(滿洲)족의 천하가 되었을 때 정복자를 미워하는 한족(漢族) 민족주의 논설에서 그런 경향이 극에 이르렀다.

 

옹정제(雍正帝, 1722-1735)는 이런 풍조를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으로 반박했는데, 화하와 외이의 차이가 본질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일 뿐이라는 주장이었고 중국의 고대 문헌으로 그 주장을 뒷받침했다. 당대 민간의 주류 학자들도 그 주장을 수긍했다.

 

(옹정제 때인 1730년에 시시한 반청(反淸) 음모 하나가 발각되었을 때, 옹정제는 그것을 제국 이념 홍보의 기회로 삼아 <대의각미록>을 반포하고 주모자 증정(曾靜)이 “사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므로 죄를 벌하기보다 깨우쳐줄 대상”이라며 너그럽게 처분했다. 그러나 5년 후 제위를 이은 건륭제는 즉위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이 일의 재조사를 명령하고 결국 증정을 능지처참에 처했다.)


화이(華夷) 간의 차이를 크게 보고 작게 보는 주장의 충돌은 역사적 변화에 일부 원인이 있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천하는 여러 선수가 함께 뛰는 운동장이었다. 화하가 주전선수라면 외이는 후보선수였고 화하가 1부 리그라면 외이는 2부 리그였다. 외이는 언제라도 교체 투입이 가능한 선수였고 리그 승격이 가능한 팀이었다. 반면 진(秦)나라 통일 이후로는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한(漢)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에 시달리면서 외이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심리가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흉노 이후에도 중화제국에 대한 외이의 위협은 북방으로부터 거듭거듭 닥쳤다. 선비(鮮卑)족의 북위(北魏), 거란(契丹)족의 요(遼), 여진(女眞)족의 금(金), 몽고(蒙古)족의 원(元), 만주족의 청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천하 지배를 위협하고 전복한 것은 모두 북방 오랑캐였다. 만리장성이 다른 방면 아닌 북쪽에 설치된 것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연한 일로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한 꺼풀 더 벗겨보자. 다른 방면보다 북쪽에서 심각한 위협이 많이 제기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Posted by 문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