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마테오 리치 中國觀의 형성

 

1절 리치 以前 예수회의 중국 傳敎適應主義

 

意大里亞는 대서양 가운데 있으며 예부터 중국과 통교가 없었다. 萬曆간에 그 나라 사람 利瑪竇京師에 이르러 <萬國全圖>를 지어 이르기를 천하에 대륙이 다섯 있으니, 첫 번째가 아세아주로 그 속에 무릇 백여 나라가 있고 거기서 첫째가는 것이 중국이요, 두 번째가 구라파주로 그 속에 무릇 칠십여 나라가 있고 그 첫째가는 것이 意大里亞, 모든 구라파 제국은 다 같이 천주 耶蘇의 교를 받든다. 耶蘇如德亞에서 태어났으니 그 나라는 아세아주 안에 있는데, 서쪽으로 구라파에 를 행한 것이다. 그 처음 난 것은 漢 哀帝 元壽 2庚申의 일인데, 1581년을 지나 萬曆 9년에 이르러 利瑪竇가 처음으로 9만 리 바다를 건너 廣州香山에 와 그 를 퍼뜨림으로써 마침내 중국 땅을 물들였다. (萬曆) 29년에 이르러 京師에 들어와 환관 馬堂이 그 方物을 진헌하였는데 스스로 大西洋人이라 칭했다. 황제는 그가 멀리 온 것을 가상히 여겨 집을 빌려주고 식량과 용채를 대어줌에 너그러웠으며 公卿 이하가 그 사람을 중히 여겨 모두 가까이 하니 瑪竇는 이를 편안히 여겨 마침내 머물러서 돌아가지 않았다. (만력) 384京師에서 죽으매 西郭 밖에 葬地를 내렸다. 그 나라 사람으로 동쪽에 온 이들은 모두 총명하고 특출한 성취가 있는 선비들이며, 오로지 를 행하는 데 뜻을 들 뿐, 祿利를 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은 책에는 중화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많은 까닭으로 한 때 별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이를 우러렀으며, 사대부로 徐光啓, 李之藻 같은 무리들이 앞장서 그 을 좋아하고 또 그 글을 윤색해 주었으므로 그 가 힘차게 일어날 때 중국 땅에 그 이름이 크게 드러난 것이다.”[25]

[25] 意大里亞居大西洋中 自古不通中國 萬曆時其國人利瑪竇至京師 爲萬國全圖 言天下有五大洲 第一曰亞細亞洲中凡百餘國 而中國居其一 第二曰歐羅巴洲中凡七十餘國 而意大里亞居其一 大都歐羅巴諸國 悉奉天主耶蘇敎 而耶蘇生於如德亞 其國在亞細亞洲之中 西行敎於歐羅巴 其始生在漢哀帝元壽二年庚申 閱一千五百八十一年至萬曆九年 利瑪竇始汎海九萬里 抵廣州之香山 澳其敎遂沾染中土 至二十九年入京師 中官馬堂以其方物進獻 自稱大西洋人 帝嘉其遠來 假館授粲給賜優厚 公卿以下 重其人 咸與晉接 瑪竇安之 遂留居不去 以三十八年四月卒於京 賜葬西郭外 其國人東來者 大都聰明特達之士 意專行敎 不求祿利 其所著書 多華人所未道 故一時好異者咸尙之 而士大夫如徐光啓李之藻輩 首好其說 且爲潤色其文辭 故其敎驟與時 著聲中土者

 

<明史> 326 意大里亞列傳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입하고자 꾀한 것은 1540년대부터의 일이었으며 1557년부터는 마카오에 근거까지 가지고 있게 되었으나 중국의 내지에 들어가 자리 잡은 것은 1583년에 이르러서였다.

그 후 백년 동안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활동은 꾸준히 확대되었다. 예수회에 보고된 중국인 신자 수는 1600년에 400, 1608년에 2,000, 1613년에 5,000, 1627년에 13,000, 1637년에 4만 명, 1650년에 15만 명이 되었다. 선교소 수는 1583년의 하나에서 1596년에야 둘이 되고 1610년 리치가 죽을 때까지 네 개였던 것이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까지는 스무 개를 넘었고, 康熙帝 즉위 직후인 1664년에는 159개소의 예수회 교회가 집계되었다.[26]

[26] J Dehergne, Repertoire des jesuites en Chine de 1552 a 1800 (Roma, 1973), 326-330에서 발췌.

선교사의 중국 진입이 늦어진 이유로 그 동안 일본에서의 선교사업이 비상히 활발했던 때문에 그곳에 모든 자원과 노력이 집중되었다든가, 발리냐노가 1578년 마카오에 이른 뒤에야 본격적인 중국 진입 공작이 시작된 때문이었다든가 하는 이유가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역시 중국 측 사정에 있었다.

수십 년간 선교사의 입국을 가로막아 온 장벽이 1580년대 들어 틈을 보이기 시작하자 선교사 수용은 급격히 진행되어, 리치가 죽은 지 1년이 안되어 선교사들을 통한 서양 학술의 도입을 촉진하기 위한 논의가 중국 조정에서 일어나게까지 된다. 일본의 경우, 할거한 다이묘들이 서양의 銃器와 마카오 교역의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가 선교사 수용을 촉진하였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직접적인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다.

27년에 걸친 리치의 활동의 목적은 한 마디로 중국에서 선교사의 존재가 용납되고, 나아가 환영받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사회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왕조 말기를 당하여 윤리와 기술 면에 얼마간의 불안감이 일어나는 것을 西學으로 연결시킨 것이 리치의 업적이었다. 1610년 리치의 죽음에 임해 황제가 葬地下賜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황제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것이니, 중국 가톨릭 선교단의 위치는 그야말로 리치의 한 몸을 토대로 삼은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마지막 성취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중국의 학문을 연구, ‘西士의 위치를 확보한 일, 서양 과학을 소개해 西學의 바람을 일으킨 일, 기독교 교리와 그 기본철학을 중국식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선교사업을 하나의 포괄적인 문화현상으로 성립시킨 일 등이 중국 진입이라는 복합적 과정의 중요한 단계들이었다. 이 단계들의 여러 가지 내용을 다음 절에서부터 살펴 나가겠지만, 그에 앞서서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와 같은 방향의 활동을 위해 세계의 끝까지 찾아와 평생을 바쳐 노력하게 된 배경을 더듬어보자.

 

예수회는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의 주도로 창설된 가톨릭 수도회다. 1534년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여섯 명의 동지가 로욜라와 함께 청빈, 순결과 성지순례의 誓願을 행한 것이 예수회의 상징적 출발점일 뿐 아니라 조직활동의 시작으로도 인정되어 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1540년 바오로 3세 교황으로부터 헌장의 인가를 받는 데서 시작되었다.[27]

[27] 예수회 역사를 개설한 책으로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sus (St Louis, 1986)M Harney, Jesuits in History (New York, 1941)가 간편하다.

16세기 전반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충격 속에 뒤흔들리고 있었다. 교황청 중심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오랫동안 누적되어 있던 불만이 1520년대에 들어서면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15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대규모의 정치적 탄압과 종교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28]

[28] 종교개혁을 전후한 교회의 제반 사정에 대해서는 O Chadwick, The Reformation (Harmondsworth, 1960)Th Bokenkotter,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Garden City, 1979)를 주로 참고했다.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의 북부에서 서부, 중부에 걸친 많은 지역에서 신자와 영향력을 빼앗기고 유럽문명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크게 손상당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지도부로서 교황청의 권위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보전된 가톨릭 지역에서도 교황의 힘보다는 세속군주의 힘이 프로테스탄티즘과의 싸움에서 더 크게 작용한 때문에 교황과 교황청의 지도력은 더욱 힘을 잃었다. 극단적인 예로 카를 5세 황제(1519-56)와 교황들, 특히 바오로 4(1555-58) 사이의 반목으로 인해 독일에서의 대 프로테스탄티즘 투쟁이 저해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능동적인 반응, 즉 가톨릭개혁의 여러 명제들이 포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였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가톨릭개혁의 움직임은 15세기 초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왔었다. 사실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에 반발한 종교개혁의 움직임도 애초에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니, 종교개혁과 가톨릭개혁은 동일한 배경에서 파생되어 나온 다른 줄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교황청이 개혁의 자세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은 바오로 3(1534-1549)가 즉위하여 개혁성향 추기경들을 모아 개혁위원회를 구성한(1536)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의 개혁운동은 기성교회의 극단적인 탄압에 부딪쳐 프로테스탄트의 깃발로 나아가는 경우에서 개인의 경건한 신앙생활에 몰입하는 경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수도회를 둘러싼 개혁의 움직임도 이 가톨릭개혁 초기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기존 수도회에서 원시회칙을 비롯한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의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한 1520년대 이후로는 테아티노회, 카푸치노회, 예수회 등 개혁수도회들이 결성되었다.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서로 조화되지 않는 듯한 측면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 하나는 인심과 세태에 정통한 유능한 전략가의 면모이고, 또 하나는 독실하고 경건한 신앙인, 기도인의 모습이다. 이 두 측면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 하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논란은 차치하고, 개혁수도회로서 예수회가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예수회는 그 창시자 로욜라가 보여준 두 가지 측면을 그대로 이어받았다.[29]

[29] 예수회에 관한 문헌의 대부분이 소속 학자들에 의해 작성된 것이어서 그 시각에 얼마간의 한계가 없을 수 없다. 전혀 다른 시각, 예수회를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관점을 채택한 책으로 R Fulop-Miller, The Power and Secret of the Jesuits (New York, 1930)가 있어서 대조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회의 시대적 과제는 종교개혁기에 이르기까지 쇠퇴해 온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세력을 회복하고 확장하는 일이었다. 이 과제를 위해 예수회가 벌인 두 가지 주요사업이 교육과 해외선교였다. 특히 해외선교의 중요성을 크게 의식한 로욜라는 예수회사들이 님의 더 큰 영광과 영혼 구제의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세계의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갈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친 지리상의 대발견이 기독교 세계선교의 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교회사의 관점에서는 초기 교회가 유태인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리스-로마 문명의 세계로 뛰어들던 시절 이후 가장 큰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1498년에 인도에 처음 도착한 포르투갈인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향신료와 기독교 원주민이었다.[30] 그들은 향신료를 발견했다. 따라서 그 무역을 발판으로 아시아 항로와 해상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 원주민은 만족할 만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교도 원주민을 개종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30] C Boxer, Fidalgos in the Far East (The Hague, 1848), 157.

대항해시대의 주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종교개혁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은 가톨릭국가들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선교사들은 새로 개척된 항로에 쉽게 따라나설 수 있었다. 교황과 포르투갈 왕 사이의 개척지를 둘러싼 협조관계는 15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은 1418년과 1419년 거듭 칙령을 내려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포르투갈 왕 후앙 1세에게 무어인으로부터 빼앗는 땅에 대한 통치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개척지의 통치권에 대한 승인 방침은 거듭해서 확대되었다. 1515년 레오 10세 교황은 보자도르 곶과 네온으로부터 인도 사이에 있는, 정복되었거나 발견된, 또는 앞으로 정복되거나 발견될, 어디에 있는 땅에 대해서도 적용되는군사적, 경제적 활동의 독점권을 포르투갈 왕에게 부여했다. 그 대가로 왕은 자신이 특권을 가진 지역에서 기독교의 전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의무를 가졌다. 그 의무 가운데는 선교사의 운송과 활동지원, 교회와 기타 선교시설의 건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파드로아도(管轄權)1494년 토르데실라스 조약에 의해 활동범위의 구획협정을 맺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나누어졌던 것이다.

예수회가 선교사업에 나설 무렵에는 벌써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인도 방면의 여러 지역에 진출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회의 선교사업은 그 방법의 체계성과 목적의 포괄성에서 기존의 선교와 달랐다. 예수회의 3대 총장(1565-1572) 보르자(Francisco de Borja, 1510-72)는 비오 5세 교황(1566-72)에게 해외선교에 관한 두 가지 방침을 제안했다. 그 하나는 해외선교에 대한 교황청의 지도와 감독을 일원화하는 것이니, 후에 만들어질 布敎聖省과 비슷한 개념의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원주민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오기 위해서는 식민통치자들이 그들을 인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르자가 제안한 방침들은 당시의 선교사업이 가지고 있던 시대적 의미를 비추어서 보여준다. 기독교에 있어서 선교의 기본목적은 마태복음 말미에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한 것처럼 선교대상의 구원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직후 가톨릭교회의 상황에서는 교회의 전반적 세력 확장을 위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선교방법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대항해시대를 통해 선교사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원주민들을 선교대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종전의 선교는 기독교권에 인접해 있는, 따라서 기독교에 대한 다소의 지식이 존재하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개별적으로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대양을 건너가 선교사들이 마주친 원주민들은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고도의 문명과 방대한 정치사회 조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열성만으로는 이 다양한 선교대상으로부터 거둘 수 있는 효과에 한계가 있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펼쳐질 예수회의 선교사업을 가장 앞서서 상징한 인물이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52)였다. 근세 가톨릭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서 모든 선교사업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진 사비에르는 1534년 예수회 창립 7인 멤버의 하나였다. 1540, 예수회가 교황의 정관 인가를 받기 몇 달 전 예수회 최초의 선교사로 로마를 떠난 사비에르는 15425월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해서 10년에 걸친 아시아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31]

[31] 사비에르의 傳記로 편리한 것은 J Brodrick, Saint Francis Xavier (London, 1952)가 있다.

1549년까지 인도와 말레이군도 등 포르투갈 진출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안 사비에르는 탁월한 선교업적을 쌓아 올렸다. 그 과정에서 사비에르는 장차 예수회 선교의 가장 중요한 선교방침으로 자리 잡게 될 적응주의 노선을 형성해 나갔다. 타밀 교리서의 작성, 원주민을 위한 고아의 신학교 설립 등, 이 시기에 그가 노력을 쏟은 주요한 사업에는 적응주의의 핵심적인 원칙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선교사업에 있어서 언어는 무엇보다도 큰 장벽이었다. 유럽 언어만으로 선교를 하려면 접근이 가능한 것은 유럽인의 식민지에 예속되어 있어서 유럽의 언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뿐이고, 식민지의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접근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 아시아에서의 포르투갈인 활동은 바다 위에서 주로 펼쳐지고 있었고, 육상 식민지는 해상활동을 뒷받침할 최소한의 위치와 크기로 제한되어 있었다.

사비에르가 동방으로 오기 전까지 다른 교단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인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내의 활동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 선교의 개념을 가지고 개인의 구원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식민지 내의 원주민 개종에만 몰두하면서 유럽인이 지배하지 않는 기독교 사회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때때로 포르투갈의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집단이 있거나 할 경우 다른 지역 주민들을 집단으로 개종시키는 일도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입교 준비를 철저히 시키거나 자격을 엄밀히 따지지 않은 채 형식적인 개종 절차만을 밟을 뿐, 장차 더 좋은 형편이 될 때 본격적인 입교를 바라볼 씨앗을 심어둔다는 의미만을 가진 일이었다.

이런 입장의 선교는 기본적으로 군인들을 따라가는 것이지, 앞서가는 것이 아니었다. 재래사회의 전통은 공격과 파괴의 대상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고 하물며 그 언어를 선교사들이 습득할 필요는 제기될 이유가 없었다.

인도에 도착한 사비에르는 첫 3년 동안 인도 동남해안 타밀지역의 파라바 사이에서 선교하는 일에 매달렸다. 파라바은 그 몇 해 전 2만 명이 집단으로 개종한 일이 있었으나 형식적인 개종에 그치고 아무런 사후관리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사비에르는 타밀로 조그만 교리서를 만들어 원주민의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유도했다.

다음 3년간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한 말레이와 몰루카 제도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1548년 고아에 돌아와서는 기존 신학교를 예수회로 넘겨받아 원주민 성직자와 교리교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확충했다. 원주민 신학 교육은 선교활동이 유럽 군사력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게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원주민 사회의 진정한 교화를 위해 필수적인 사업이라는 것이 사비에르와 예수회의 입장이었다.

인도와 말레이군도에서 유럽중심주의적 선교분위기를 고쳐 원주민의 자발적인 참여의식을 고취한 사비에르의 공적은 근세 가톨릭 선교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가 직접 활동한 지역들은 그 후의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관계없이 확고한 가톨릭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가 빚어낸 적응주의 노선은 오랫동안 많은 지역에서 예수회 선교의 기본방침으로 큰 효과를 올리고, 나아가 가톨릭이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위에 더해진 또 하나 사비에르의 크나큰 업적은 1549년 이후 일본선교를 개척하고 중국선교의 목표를 세우는 등 아시아 선교의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1545년에서 1548년까지 말레이군도에서 체류하는 동안 사비에르는 중국과 일본에 관한 어느 정도 지식을 얻었다. 방대한 인구와 높은 문명수준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 이 나라들에 대해 그가 강렬한 선교의욕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비에르가 얻어들은 중국과 일본에 관한 소문은 사비에르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을 것이다.

높은 문화수준의 거대한 帝國. 이 제국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하느님의 영광에 바칠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었고, 종교개혁의 모든 손실을 일거에 만회하는 길이 될 것이었다.[32] 그러나 이때 중국의 왕조는 海禁정책으로 중국인의 해외진출과 외국인의 중국 입국을 모두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마카오에 포르투갈인의 상주가 허용된 것은 1555년의 일이었다.

[32] 이에 버금가는 거대한 희망을 선교사들이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아크바르 황제의 개종을 통해 모굴 제국을 교화시키는 일 정도였을 것이다: W Bangert, A History of the Society of Jejus: 85-86, 149-151.

한편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 배 한 척이 九州 남쪽 끝의 種子島에 표류한 이래 포르투갈인과의 교역을 시작하고 있었다. 사비에르는 마침 일본인 한 사람(야지로)을 몰루카에서 만나 그 안내로 15498월 일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착한 몇 달 후 고아의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비에르는 일본인의 자질을 격찬했다: “무엇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의 교제를 통해 알게 된 한에 있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마주친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소질을 가졌고, 악의가 없으며, 사귀기가 아주 좋다. 주민 대부분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그런 때문에 오라쇼나 데우스에 대해서도 빨리 배울 수가 있어서 우리 일에 매우 다행이다. 일본인은 를 한 사람밖에는 두지 않는다. 도둑질은 극히 적다. 사형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죄를 몹시 미워한다. 일본인은 이처럼 극히 선량하고, 사교성이 좋고, 지식욕이 풍부한 국민이다. ……[33]

[33] 海老澤有道, <日本キリシタ>(東京, 1966), 66-68에 인용되어 있는 사비에르의 154911월 편지에서 재인용. 사비에르의 일본 활동에 대해서는 이 책과 G Elison, Deus Destroyed (Cambridge-MA, 1984), 그리고 C 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Berkeley, 1951)을 주로 참고했다.

일부일처제의 착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의 현실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환상에 빠져 있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사비에르가 얼마나 일본의 선교 전망을 밝게 보았는가, 일본 사회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품고 있었는가, 일본문명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였는가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15498월부터 155111월까지 일본 체류 동안 사비에르는 가르치는 일 못지않게 배우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말라카에서 사비에르를 만나 고아에 따라가서 세례를 받은 야지로가 일본 사정에 대해 미리 설명해 준 데는 착오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비에르는 일본 도착 1년 후까지도 일본 전체가 天皇의 실제 통치를 받는다고 생각해서 만난을 무릅쓰고 미야코(京都)까지 여행, 실상을 파악한 뒤에야 다이묘들에게 눈을 돌렸다.[34]

[34] 사비에르의 일본 이해에 대해서는 海老澤有道 전게서: 64-71 참조.

그리고 일본의 종교에서 다이니치(大日)가 만물을 창조한 인격신으로 萬神 위에 군림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이것이 기독교의 신을 지칭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에 도착하면서부터 자신이 다이니치의 신앙을 전파한다고 표방했다. 그가 이 말을 쓴 것은 일본인들이 익숙한 말을 씀으로써 받아들이기 쉽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으나, 얼마 지나는 동안 그 말의 배경이 너무나 기독교의 전통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이해를 쉽게 하기보다는 혼란을 일으키는 문제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는 일본을 떠나기 전에 그 말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 후의 선교사들은 일본의 다른 말로 기독교 신을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고 라틴어의 Deus音寫, ‘デウス라 했다.[35]

[35] Elison 전게서: 33-34.

몇 가지 오해로 인한 착오에도 불구하고 사비에르가 동아시아 선교를 위한 적응주의의 기준을 여러 측면에서 설정해 놓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다이니치라는 말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가능한 한 현지 전통에 부회하려는 노력은 중국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중국의 경우는 사전 조사의 기간이 더 길었기 때문에 天主라는 호칭이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천황을 알현하려 애쓴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통치자의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도 답습되었다.

그리고 인도의 어민들 사이에서 일할 때는 赤貧한 생활로 원주민들과의 거리를 좁혔던 사비에르가 체면을 중시하는 다이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포르투갈 배를 찾아가서라도 화려한 복장과 예물을 준비하기까지 했는데, 이것 역시 일본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어진 방침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일본 사회에서 존중받는 禪宗의 승려와 같은 신분을 표방하게 했는데, 이 방침은 뒤에 중국에서는 儒士의 신분을 표방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36]

[36] J Brodrick, Saint Francis Xavier, 407-411.

통찰력과 환상이 뒤섞여 있는 일본의 연장선 위에서 사비에르는 중국을 바라보았다. 일본문명의 원천이며 일본의 몇 십 배 인구를 가진 나라, 선교 대상지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곳이 사비에르가 본 중국이었다. 1551년 말까지의 일본 체류를 통해 거둔 성공과 좌절이 모두 중국을 향한 사비에르의 염원을 더욱더 키워 주었다.

고아에 돌아온 그는 중국 진입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침 중국 지방관헌의 분위기가 냉랭한 때 광동성 해안에 도착한 사비에르는 본토에 발을 딛어 보지도 못한 채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해안 밖의 조그만 섬, 上川島에서 숨을 거두었다. 155212월의 일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선교의 큰 일터로 본 사비에르의 통찰은 발리냐노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남긴 전반적인 인상은 아주 대조적이다. 사비에르가 고행하는 성자의 이미지,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빌려온 것 같은 힘과 능력으로 후세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면, 발리냐노는 인간의 지혜와 정력과 책략을 최대한 구사한, ‘풍운 속의 거인의 이미지를 남겼다. 발리냐노의 행적을 면밀히 검토한 Schutte는 그의 사람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외모에 있어서 순찰사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건강은 베니스에서의 옥중생활과 로마에 있을 때, 그리고 마체라타에서 교장 일을 볼 때의 지나친 고행으로 약해지기도 했지만, 뒤에는 회복되어서 여행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생활에서 오는 극도의 어려움도 쉽게 견뎌낼 수 있었다. 이 점을 그는 거듭해서 총장 신부와 유럽의 친지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57세에 쓴 편지에서 그는 자기 건강이 어느 때 못지않게 좋으며 이빨도 하나 상한 것이 없다, 다만 나이와 흰 머리의 숫자만이 늘어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 병석에 누운 일이 있는데, 기후와 음식이 바뀐 때문도 있고, 병석의 동료들을 손수 돌보다가 병이 든 때도 있고, 과로 때문에 쓰러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앓다가도 낫기만 하면 전날의 활력을 그대로 되찾곤 했다. 그의 일하는 분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렇게 대외적인 활동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靈的인 인간이었으며 하느님과의 접촉을 끊은 일이 없었다. 그의 이상은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생활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행동사색의 조화였다. 실제로 그는 직무의 무게를 짊어진 후로 그 전에 은혜를 입은 바 있던 특별한 빛의 샘이 말라붙기 시작했다는 불평을 자주 했다. 반면, 직무의 수행에 있어서는 어려운 일을 해내는 힘을 줄 뿐 아니라 결단을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하느님의 도움에 대해 비상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화에 이상적인 소질을 가져서, 활력과 붙임성을 아주 매력적으로 섞어서 발휘했다. 행정에 있어서는 건전치 못한 형식주의를 극력 배척하고, 상급자들로 하여금 하급자들이 쉽게 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도록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필요한 때면 정력적으로 움직이곤 했다. 아시아에서 예수회 선교활동의 조직자로서 그는 특출한 조심성과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

그러나 위대한 인물들도 약점은 있는 법, 발리냐노는 자신의 결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평생은 자신의 불같은 성격과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좋은 뜻으로 심사숙고한 계획이 반대에 처하거나 별것 아닌 이유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자제력을 잃곤 했다. …… 전체적으로 보아서 발리냐노는 자신에 주어진 일을 위한 최상급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과 뜻, 그리고 몸까지도 예수님을 위한 봉사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37]

[37] J Schutte, (Tr. by J Coyne) Valignano's Mission Principles for Japan (2 Parts, St Louis, 1980-83): 39-43.

 

발리냐노는 27세의 나이에 예수회에 입회한 후 로마대학의 생도부장, 마체라타의 신학교장 등 교육계통의 일을 맡고 있다가 1573, 34세의 나이에 인도순찰사(관할구역이 인도양 이동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동방순찰사라고도 많이 표시됨)大任을 맡았다. 그가 15749월에 고아에 부임한 후 그의 소재지를 표로 만들어 그 활동의 윤곽을 살펴본다.[38]

1574. 9 - 1577. 9 고아

1577. 10- 1578. 7 말라카

1578. 9 - 1579. 7 마카오

1579. 7 - 1582. 2 일본

1582. 3 - 1582.12 마카오

1583. 4 - 1583.11 코친[39]

1583.11 - 1588. 4 고아[40]

1588. 7 - 1590. 6 마카오

1590. 7 - 1592.10 일본

1592.10 - 1594.11 마카오

1595. 3 - 1597. 4 고아[41]

1597. 7 - 1598. 7 마카오

1598. 8 - 1603. 1 일본

1603. 2 - 1606. 1 마카오[42]

[38] Schutte 상게서: 36-39에서 정리함.

[39] 15838월에 인도 관구장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40] 1585년에 인도순찰사로 복직명령을 받았으나 15879월에 후임 관구장을 임명한 다음에야 순찰사의 직으로 돌아갔다.

[41] 인도 관구장으로 있던 1580년 이래의 숙적 카브랄과 15959월부터 직책문제로 갈등. 곡절을 거친 끝에 순찰사로서 발리냐노의 관할을 일본(중국 포함)에 한정시킴. 발리냐노는 선교노선의 차이로 인해 1580년에 카브랄을 일본 선교단장에서 해임한 일이 있음.

[42] 1606120일 발리냐노 죽음.

발리냐노의 이동 내용을 보면 1577년까지의 준비기간, 그리고 1583년에서 1587년까지 인도 관구장의 책임을 가지고 있던 기간을 제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일본과 마카오에서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을 선교사업의 가장 큰 일터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이것만 보아도 분명하다. 한편 세 차례의 일본 체류와 그를 전후한 마카오 체류를 비교해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카오의 비중이 커졌던 것이 나타난다. 일본의 형편이 날로 어려워지던 사정과 중국 선교가 날로 발전하고 있던 상황이 겹쳐진 결과로 생각된다.

발리냐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카브랄(Francisco Cabral, 1528-1609)과 충돌했다. 카브랄의 선교노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그가 일본을 떠난 10여 년 후 인도 관구장이라는 책임이 큰 자리에 있을 때(1596)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데서 대강 알아볼 수 있다: “만약 일본인의 입회를 중지시키고 줄이지 않는다면 일본에서의 예수회 활동, 아니, 기독교 자체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며, 그 후에는 회복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그들처럼 잘난 척하고, 욕심 많고, 변덕이 심하고 성실치 못한 민족을 본 일이 없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속마음을 감추어서 남들로 하여금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현명한 것으로 통한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쪽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니, 이해할 수 없고 거짓된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받는 것이다.”[43]

[43] Elison 전게서: 16에서 재인용.

발리냐노는 카브랄의 노선을 뒤집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일본인에 대한 신학 교육을 확장하고, 선교사들에게는 일본어를 빨리 배우도록 촉구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일본의 관습을 최대한 따르도록 지침을 정했다. 카브랄이 일본인 입교자들을 경멸한 것은 얼마간의 타당성이 없지도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인 입교자는 마카오 무역에 끼어들고 싶은 영주들이 강제로 입교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 자질과 열의에 문제가 없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보르지아 총장 이래 원주민의 신학 교육과 교회 참여를 권장해 온 예수회의 기본방침에서도 벗어날 정도로 카브랄이 편협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포르투갈 귀족 출신으로서 독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된다.[44]

[44] Elison 전게서: 20.

귀족적 오만함으로 말하자면 발리냐노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 카브랄 못지않게 일본과 유럽 문명 사이의 이질성을 크게 의식했지만, 그는 이 의식 위에서 적응주의 노선의 철저성을 강조했다.[45] 그리고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단순히 유럽 귀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유럽 문명의 대표자라는 사실이었다. 르네상스 문화를 배경에 가진 그는 불과 몇 세대 전에 기독교권에 편입된 유럽의 변두리 포르투갈 귀족의 문화수준을 깔보았을 것이다.

[45] Elison 전게서: 18: “발리냐노는 일본과 유럽의 문화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런 때문에 일본에서 일하기 위해 유럽에서 오는 사람들은 단순히 그 지역의 풍속과 관습만을 따를 것이 아니라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처럼모든 행동의 근거를 습득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발리냐노는 자기 손으로 시작한 중국 선교에 가급적 이탈리아인을 채용했다. 당시 아시아로 온 예수회 선교사 중에는 포르투갈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발리냐노는 일반 포르투갈인의 태도가 적합치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1606년 그가 죽을 때까지 중국선교에 동원된 예수회 선교사는 모두 19명이었는데 그중 이탈리아인이 9명으로 포르투갈인과 같은 숫자였다.[46]

[46] J Dehergne, Répertoire des jésuites en Chine de 1552 à 1800 (Roma, 1973): 397-407의 국적별 선교사 명단에서 뽑음.

 

17세기 후반, 예수회의 적응주의 노선이 교회의 통일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해친 혐의로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적응주의 노선을 옹호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선교방침을 내세웠다.[47] 초기 교회가 유태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로마 문명의 세계로 뻗어나올 때 기독교는 거대한 문화적 장벽에 부딪쳤다. 그때까지 기독교는 유태사회의 여러 문화적 특징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유태사회의 문화적 특징들은 그리스-로마의 수준 높은 문화권에서 경멸 또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단계에서 바울을 위시한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과감히 유태문화의 배경에서 떼어내, 새로운 문화적 조건 속에 옮겨 심었던 것이다.

[47]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의 경위에 대해서는 A Rowbotham, Missionary and Mandarin: The Jesuits at the Court of China (NY, 1966), 119-175가 윤곽을 살피기에 편리하며, Etiemble, Les Jésuites en Chine(1552-1773): La Quèrelle des rites (Paris, 1966)失澤利彦, <中國とキリスト>(東京, 1972)는 문화사적으로 더 깊이 있는 설명을 보여준다.

하나의 종족에 속하던 기독교가 하나의 문명권을 대표하는 위치로 옮겨오는 과정은 적응주의적 浸透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개념을 표시하는 말들도 그때까지 써 온 히브리어를 버리고 다른 사회에서 써 온 말들을 골라서 채용했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회에서 써 온 뜻이 기독교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뜻에서 벗어나는 것도 있었지만, 지속적인 개념정의와 교육을 통해 접근시키는 방법이 취해졌다.

이것이 초기 교회의 적응(accommodation)이었다. 교회의 언어와 함께 성직자의 복장도 교회가 세워지는 사회의 관습에 따라서 채용되었다. 성직자 복장이 규격화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의 일이었고, 교회의 언어가 라틴어로 통일된 것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유린된 후의 일이었다. 세속의 권력이 분열의 길로 접어드는 단계에서 교회는 그 정체성을 방어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다른 종교단체와 예수회 사이의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수회는 교황의 입장을 바로 대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교 목적도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교황의 세력에 장기적으로 이바지하는 면을 고려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군사력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서 異敎사회를 통째로 교화시킬 꿈을 키웠으며, 세속군주를 1차적 충성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내에서의 활동으로 만족하지도 않았다.

16세기 말까지 예수회 적응주의 노선의 발전에는 각지의 현장경험이 축적되는 것도 물론 한편의 뒷받침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 신학계에서 당시 예수회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에서 신학적 근거를 구축한 측면도 있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의 시기에 들어섰을 때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주어졌다. 그 하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비판하고 가톨릭 신학을 옹호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스콜라철학의 다기한 전개를 정리해서 가톨릭 신학의 일관된 체계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안팎으로 겹쳐진 이 두 과제는 근본적으로 서로 얽히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중 전자, 즉 대외적인 과제에만 관심을 두었다. 공의회가 끝날 때부터 가톨릭교회 안에서 교리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는데, 구원의 조건으로서 은총의 의미에 대한, 이른바 은총논쟁이 그 중심이 되었다.[48]

[48] 이 주제에 관해서는 J Pelikan, Reformation of Church and Dogma (1300-1700) (Chicago, 1984): 374-385를 주로 참조했다.

은총논쟁이 시작된 것은 1550년경 루벵의 신학자 미카엘 바이우스(1513-89)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해석을 표방해서 죄악과 은총에 대한 극히 엄격한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면서였다. 바이우스의 주장은 비오 5세와 그레고리 8세 교황에 의해 (1567, 1580) 거듭 금지되었으나 코넬리우스 얀센(1585-1638) 등을 통해 널리 영향을 끼쳤다. 바이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비판한 논점을 되살려 당시에 창궐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공격한다고 했다. 그 공격대상이 루이스 데 몰리나(1535-1600)와 프란치스코 수아레스(1548-1617) 등 예수회 신학자들이었다.

데 몰리나와 수아레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했다. 그들이 생각한 은총은 충족은총(gratia sufficiens)으로서, 이 은총을 각 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 완성할 때 비로소 구원의 조건이 충족된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의지에 의한 구원에의 접근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반해 바이우스와 얀센은 효능은총(gratia eficax)을 주장했다. 이 은총은 인간의 의지에 관계없이 주어지고 작용하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악을 향하게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을 사람들은 신의 뜻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인데, 이 점이 칼빈의 예정설과 너무나 흡사한 것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기 어려웠다고도 한다.

도밍고 바녜스(1528-1604)를 위시한 도미니코회 신학자들도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하여 예수회 신학자들에게 반대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교황청의 공식 입장은 이 문제에 대한 배타적 독단을 가급적 회피하면서도 대체로 예수회 측 주장에 가까이 기울어져 있었다. 칼빈의 예정설 뿐 아니라 루터의 은총관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좁게 해석하는 엄격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이들과의 대결에서 차별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로마대학에서 공부한 것(1573-77)은 수아레스가 그곳 교수로 부임하기(1580) 몇 년 전이었지만, 예수회가 주도하여 교황청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은총관이 형성기의 그의 신학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적응주의 노선의 확실한 방향을 잡은 것은 선교현장의 경험을 얼마간 쌓은 뒤 발리냐노에게 중국선교요원으로 선발되어 그 지도를 받게 된 이후의 일이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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