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위원단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9개국 중 참여 거부를 선언한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라 엘살바도르 대표도 도착하지 않아 7개국 대표가 1월 12일 저녁 때 첫 회의를 열었다. 중국 대표 유어만은 연말에 입국해 있었고, 인도 대표 메논, 시리아 대표 자비,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 3인이 호세택 사무국장과 함께 1월 8일 입국했으며, 필리핀 대표 아란즈와 프랑스 대표 봉쿠르, 캐나다 대표 패터슨이 1월 12일에 도착했다.

 

지난 1월 7일 일기에서 엘살바도르를 포함한 여덟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간략히 소개했는데, 각국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1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내조한 각국 대표 약력”을 우선 옮겨놓고,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가능한 범위에서 인물 소개를 보충하겠다.

 

사무총장 호세택 박사: 절강(浙江)성 오흥(吳興)현 사람. 1894년 미국 워싱턴에서 출생. 1899년 그의 부친이 주 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자 러시아로 가서 소-중학교를 졸업,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수학 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1년 워싱턴회의 중국대표부 비서, 1925년 북경정부 외교부 참사, 1927년 동 외교부 조약사 과장, 1928년 북경정부 도괴 후 남하하여 상해시정부 참사 겸 국민정부 건설위원회 비서로 취임. 동년 외교부에 들어가 동부 비서 겸 총무사 과장에 취임. 1930년 외교부 아주사장, 1932년 국제연맹 전권대표 판사처장, 1933년 주아(駐亞) 공사로 취임 후 외교관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고, 제2차 유엔총회의 부사무총장으로 활약 중. 금반 UN조선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취임.

 

중국 대표 유어만 박사: 1946년 11월 주 서울 중국총영사로 부임. 제2회 유엔총회에 출석하여 UN 중국 대표 왕세걸(王世杰) 씨를 보좌하고 금반 UN조선위원단 중국 대표에 선임되었다.

 

인도 대표 뽀빠나 에노인 씨: 전시 중에는 중국 주재 인도 대표로 중경에 체류하였으며 지금은 인도 국무차관인 동시에 인도대표단 사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불국 대표 폴 뽕쿨 씨: 1898년 7월 30일 생. 1922년 이래 외교관으로 활약. 1931년 군제연맹 부사무국장 취임. 1933년 런던군축회의 프랑스 대표로 출석. 현재는 주 루마니아 프랑스 대사이다.

 

호주 대표 S. H. 짹손 씨: 재일(在日) 호주 사절의 고문관으로 당년 55세의 호주의 저명한 외교관.

 

시리아 대표 파라 지키 자비 박사: 동 박사는 시리아의 저명한 정치가인 동시에 의사이며 모국의 독립운동의 열렬한 투사이다.

 

설명은 지금 독자들이 알아보기 쉽게 손을 보고 표제는 원래대로 두었다. 인도 대표 K P S 메논의 이름은 아주 엉뚱하게 되어 있는데, 도착 후에야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옮겨 적는 데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모두 직업외교관인데 시리아의 자비 대표만이 의사 출신의 정치가로 나와 있다. 제3세계의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에서는 의사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일이 많다. 고급 지식인이며 활동을 위한 재정적 근거를 가진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관은 고급 직종 치고는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직업이다. 우리 사회에 무슨 사, 무슨 사 해서 “면허 받은 도둑놈”이란 말을 하는데, 외교관은 세계적으로 “면허 받은 사기꾼”으로 통한다. 개개인의 도덕성이 그리 저열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평판이 좋지 못한 것은 한 사회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외부와 교섭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정체성(identity)’의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때문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외무공무원의 행태가 곧잘 물의를 일으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유엔위원회의 활동에 있어서도 직업외교관들에게는 상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헌신성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그 직업의 부정적 평판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의사 출신 정치가라는 시리아 대표는 그와 달리 혁명가다운 면모를 보여줄까? 쟈비의 활동 내용은 이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 같다. 쟈비는 첫 회의 전에 벌써 조선인 정치인을 만나기 시작했다.

 

“시리아 대표 이 김 양 박사 회담”

 

UN조선위원단을 위요하고 국내 정계의 동향은 주시되는 바 있는데 10일 오후4시경 김규식은 단독으로 시리아 대표 쟈비 박사를 방문하여 약 30여 분간 면담하였고 11일에는 오전 11시 동 쟈비 박사가 시리아 교체위원(부대표) 무길을 대동하고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고 약 40여 분간 회담하였는데 양 박사와의 회담에서는 일체 정치문제에는 언급치 않았다 한다. 동 면담에 대하여 무길은 양 박사의 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김 양 박사를 만났는데 동 석상에서 정치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민정에 대한 이모저모를 말하였다. 그런데 두 박사의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13일)

 

김규식이 여러 위원 중 유독 쟈비를 찾아간 까닭이 무엇일까? 1920년대에 김규식의 활동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쟈비와 연고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쟈비가 다른 위원들과 달리 활발하게 움직인 사실에 비추어 보면 연고가 있든 없든 쟈비의 요청에 의해 찾아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쟈비는 유엔위원회 위원 노릇을 잘하기 위해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서둘렀던 것이다. 쟈비는 1월 17일에는 김성수를 만났고, 1월 18일에는 장면을 만났다. 이렇게 열심히 조선 정치인들을 만난 다른 위원은 없었다.

 

국련조위 시리아 대표 자비는 17일 오후3시 시내 모처에서 한민당위원장 김성수와 회견하고 장시간 요담하였다 한다.(<경향신문> 1948년 1월 21일. 이 기사는 <자료대한민국사>에 나타나는데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는 찾지 못했다.)

 

“입의 장면 씨 자 박사와 요담”

 

입의 중앙선거준비위원 장면은 국련조위 시리아 대표 자비와 동 교체위원 무길을 18일 숙사 국제호텔로 방문하고 약 2시간여에 걸쳐 회담하였는데 조위대표로서 조선인 인사와 2시간여나 회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22일)

 

1월 14일 경무부 고문 에릭슨 중령이 경찰의 유치인 명부를 상세하게 작성해 제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것도 쟈비 위원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조선위원단에서는 돌연 국립경찰에 대하여 단시일 내로 1월15일 현재의 유치인 명부와 그 실태를 조사해 주도록 의뢰해 왔다. 즉 유치인 연령·씨명·직업은 물론 체포자의 씨명과 그 소속(국립경찰 혹은 미군당국, 검찰청 등)이며 그 결과 처리일자와 송청 혹은 군정재판 회부의 여부 그리고 체포한 정확한 이유와 법적 근거 등 상당히 자세한 점에 걸쳐 있다. 이에 경무부 고문관 엘릭슨 중좌는 14일 아침 수도관구청을 비롯하여 남조선 전 경찰관구에 1월19일까지 이상의 조사서류가 자기 손에 도착되도록 지령한 바 있었는데 이는 12일 유엔단 첫 회의석상에서 시리아대표 자비가 우리의 임무를 공명정대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 각계의 대표와 협의해야 되고 그러려면 현재 미소 양군 점령지구 내에 정치관계의 범인을 석방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한 바도 있었고 다시 13일 비공개회의의 석상에서도 재론이 된 모양으로 우선 남조선 유치인 조사를 하게 된 것으로 관측하는 편도 있는바 장차 북조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는지 또 남조선에서의 본 조사가 과연 어떠한 결과를 빚어낼는지 자못 주목되고 있는 터이다. 이에 관하여 시리아대표 자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 13일 과도정부에 대해서 유치인명부와 그 실태조사를 의뢰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언명할 수 없다.” (<조선일보> 1948년 1월 15일)

 

그런데 에릭슨 중령이 위 명령을 내린 이튿날 유엔위원단 정보관 그랑은 그것이 위원단의 공식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에릭슨 중령의 명령에 불만을 가진 일각에서 위원단의 요청이라면 미군정에 대한 월권이라고 항의한 결과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정치범 석방설 금시초문이다. 그랑 유엔정보관 사실 부인”

 

12일 유엔위원단 제1차 회합석상에서 시리아 대표가 정치범 석방에 대하여 언급한 사실이 있었는데 일부에서는 유엔위원단의 명의로 15일 현재의 이남의 정치범의 명부와 그 구치경위를 정식으로 동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경무부에 요청하였다는 풍설이 돌고 있는데 유엔위원단 정보관 그랑은 그 사실 여부에 대한 본사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천만의외라는 표정으로 “절대로 그런 사실은 없다. 시리아대표가 그런 발언은 한 사실이 있었으나 유엔위원단은 그런 요청을 한 일도 없고 또한 그럴 것도 못된다. 나는 금시초문이다.”라고 하며 부인을 하였다.

 

조 경무부장 담: 경찰 자체로서 이러한 것을 조사하는 일은 있으나 유엔위원단의 위촉을 받고 그러한 것을 조사한 일도 없으며 그러한 조사를 의뢰할 리도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17일)

 

그랑 정보관의 부인은 유엔위원단의 월권행위가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쟈비 위원은 이에 불만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1월 17일 회의에서 “총선거에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를 확립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분과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제1분과위원회에 참여했다. 경찰의 정치 탄압을 조사할 공식 임무를 만든 것이다.

 

“1, 2 분과위원회 설치 - 선거와 협의대상 문제 추진”

 

국련조위 제5차 회의는 17일 오전10시부터 덕수궁회의실에서 가·호·불·비·중·시리아·인 등 7개국 대표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 메논 씨 사회로 시작하여 정오 12시45분에 폐회하였는데 동 회의에서는 방금 조선사람이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거 문제와 조선인과의 협의 문제에 관한 준비를 하기 위하여 토의한 결과 2개의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시리아대표 자비 박사의 제의로 총선거에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를 확립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불·가·시리아 3국 대표로써 제1분과위원회를 구성하고 또 프랑스대표 뽕꾸르 씨의 제의로 조선인의 의견을 진술한 서면 혹은 건의문을 접수하기 위하여 불·호·중·비 4국 대표로써 제2분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공보 제13호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으며 조위 제6차 회의는 19일 오전10시부터 덕수궁에서 속개하기로 되었다.

 

▷公報 제13호

 

“국련조선위원단 제5차 회의에서는 좌기 2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1. 캐나다·프랑스·시리아로써 구성된 분과위원회를 제1분과위원회라 칭하고 동 분과위원회에서는 총선거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확립할 방법을 수립할 것이다.

 

2. 호주·중국·프랑스·필리핀으로써 구성된 분과위원회를 제2분과위원회라 칭하고 동 분위에서는 조선사람으로부터 이미 받은 또는 장차 받을 문서를 처리하고 또 본 위원회에 유조(有助)한 재료가 될 조선사람들의 의견을 진술한 문서를 취급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18일)

 

쟈비의 활동이 조선 반공세력의 즉각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의원의 1월 20일 성명을 보면 쟈비가 총선거의 자유 분위기 보장을 위해 정치범 석방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민주의원에서는 20일 “과반 국련위원회 석상에서 시리아대표가 정치범 석방을 제언한 것은 조선 사정을 전연 모르는 언론으로서 단호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1948년 1월 21일)

 

지난 1월 2일 일기에서 한민당 선전부의 1948년 2월 7일자 담화문을 소개한 일이 있는데 이 담화문에서 “모국 위원”이라 한 것이 시리아 대표를 지칭한 것임이 확실하다. 쟈비는 자유로운 총선거의 요건으로 경찰 개혁까지 지적하고 나선 모양이다.

 

“국제연합조선위원단 모국(某國) 위원이 조선의 국립경찰 기구와 그 구성 요소에 대한 개혁을 운운한 것은 우리의 실정과 국립경찰의 과거 3년간의 위대한 업적을 모르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일제가 물러간 직후 무정부상태에 있어서도 단시일에 남조선의 치안과 질서를 확보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학병동맹사건을 비롯하여 공산당 위조지폐사건, 영남 폭동사건, 8-15 인민혁명사건, 소위 인민해방군사건 등 중대 사건을 사전에 또는 사후에 신속 적절하게 검거 제압하였음은 국립경찰의 신위(信威)를 높이기에 족한 바였다. 국립경찰 창립 이래 백 명의 희생자를 내어 가면서 국내치안 확보에 진력한 국립경찰의 명예와 업적을 찬양치 않고 도리어 고의로 왜곡 또는 중상하는 일부 진영에게 맹성을 촉하는 동시에 국련위원 제공(諸公)으로서 여사한 중상과 모략으로 인하여 정확한 판단을 잃지 않도록 요망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8일)

 

시리아에서 무난한 직업외교관 대신 쟈비처럼 열성적인 인물을 조선위원회에 보낸 까닭이 당시 시리아가 처한 상황에도 일부나마 있지 않았을까? 쟈비가 서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리아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이스라엘 독립을 둘러싼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시리아-레바논 대 유태 진공(進攻)을 기도”

 

[예루살렘 17일 발 AFP=합동] 유태인 대표기관 대변인 언명에 의하면 현재 아랍연맹 국가인 시리아-레바논 양국은 팔레스타인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적 공격을 계획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하며 유태인에 대한 본격적인 진공까지도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또 최근 미국으로부터 귀환한 동 기관 집행위원 실버 씨 언명에 의하면 미국 내 유태인은 팔레스타인 유태인에 대하여 온갖 수단으로 원조를 부여할 것이며 무기도 제공할 태도를 결정하였다 한다. 한편 하이파에서는 유태인 자위단체 하가나의 공격으로 인하여 80명의 아랍인이 살해되었고 또 아랍 군사단체 나자다의 본부건물에 방화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18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