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의 ‘12정당 공동담화’(11월 16일자 일기)에 대한 ‘규탄성명’이 11월 21일 자칭 민족진영의 70개 자칭 애국단체로부터 나왔다. 한민당 회의실에서 모인 100여 정당 단체 대표들이 이 성명서 채택과 함께 규탄강연회 개최(11월 27일)와 유엔위원회 환영회 거행 등을 결정한 것이다.

 

UN총회에서 한국독립문제가 원만히 결의되어 불원간 UN위원단이 내한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독 민독을 위시한 일부 군소정당이 회합한 각정당협의회란 것이 성립되어 UN결의를 반대하고 소련이 제안하였으나 절대 다수결로 부결된 미소 양군의 즉시철병론을 한인(韓人)이 다시 주장하여 사실 불가능한 남북인회담에 의한 정부수립을 운운하는 것은 불가해한 일인 동시에 그 무모와 반동적임을 규탄치 않을 수 없다.

 

1. 소위 12정당협의회에서 발표한 공동담화 서두에 정협은 미소양군의 즉시철퇴와 남북요인회담으로써 자주통일정부 수립을 확언한다 하였으나 이것은 민전을 영도자로 한 정부수립에 동의치 않으면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과거 2년간의 미소공위의 쓴 경험을 고의로 은폐한 것이라 않을 수 없다.

 

2. 공동담화 제3항에 소위 12정당협의회는 미소양군 철퇴 후의 국제적 진공상태를 남북회담으로써 해소한다 하였는데, 군소정당이 공산당(남북노동당)의 주장을 억압하고 공산당에 지배받지 않을 정부를 수립할 수 있으며 내란을 방지할 수 있을까?

 

3. 공동담화 제2항에 UN결의는 전문에 긍하여 우리의 자주적 주권행사가 명시되지 않았다 하였는데 UN위원이 선거와 정부수립을 감시하는 것은 점령국인 미소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이요 한인의 주권을 침해 혹은 간섭하는 것이 아니다.

 

4. 또 동 제2항에 관계국의 합의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북분열의 우려가 있다 하였는데 통일정부 수립에 성의 없는 소련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고 조선독립을 방치할 것인가? 소련의 동의를 얻어 결의를 지으려면 UN은 여하한 결의도 못할 것이다.

 

요컨대 소위 정당협의회는 UN이 제2차대전 이후의 세계에 있어서 안전보장과 평화유지를 목적한 최고 최대의 기구이며 전기의 목적을 위하여는 강제권을 가진 것을 망각하고 있다. 또 UN위원의 감시를 부당하다고 신경과민히 지적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평화를 수호하는 민주국가이거나 약소민족을 이해하는 약소민족이다. 그들이 조선을 해롭게 할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간섭이니 감시이니 하여 만연히 반대만을 내세운 것은 고의로 세계의 동정을 실(失)할 행동이다. 특히 남북요인회담으로써 정부수립이 가능하고 미소양군의 즉시 철퇴로써 생(生)할 진공상태를 남북회담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이론은 치기만만한 희언(戱言)이 아니면 공산당의 대변자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12정당협의회의 반동적임을 규탄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 23일)

 

남북 간의 회담과 소련의 동의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남북 총선거 주장은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이남 단독선거 주장보다 민족주의 명분에서 우위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남북 총선거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북 세력과 소련을 대화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하려 든 것이었다.

 

위 규탄성명에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독당을 규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임정 봉대(臨政 奉戴)”는 한민당 창당의 명분이었고, 이승만도 임정에 기대어 ‘독립운동가’의 권위를 세워 왔다. 그리고 양쪽 다 김구-한독당 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 해 왔다. 그런데 이제 신탁통치 문제가 제거된 상황에서 한독당이 “조기 철병”과 “자주적 총선거”를 내세우는 각정당협의회(정협) 움직임에 동조하자 한독당을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한독당은 정협에 동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동적 역할을 맡고 있었다.

 

금월 초 한국독립당의 제의로 발족한 각 정당협의회는 교착상태에 봉착하였다. 즉 21일 개최한 제8차 회의 결과는 동 협의회의 추진방침에 대한 각 정당의 의견서 제출 및 미참가 정당에 대한 참가교섭의 불비 등을 이유로 이에 대한 결과를 완비한 후 차기회합은 한독당의 재초청시에 소집하기로 하고 무기휴회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협의회의 기간 경과로 보아 한독당에서는 지난 19일 상무위원회의에서 동협의회의 이상 추진을 보류하기로 결의한 후 여사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은 감히 동당의 의도하는 바를 추측할 수 있거니와 동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위요한 찬부양론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도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

 

여하튼 한독당을 제외한 기외 정당의 금후의 태도 여하는 예단키 어려우나 국내정당의 중추세력이라고 할 한민 남로 한독이 불참하고 상금 참가정당 중에서도 시기 및 방법론에 있어 별로 찬동치 않는 기개 정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결국 동협의회는 와해할 것으로 예측되며, 만약 어느 시기(국련위원단의 내조 후)에 국내 좌우익에서 전적으로 호응할 단계에 이른다면 몰라도 당분간 실현성은 희박할 것으로 보인다.

 

22일 당초 동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적극 추진하여 오던 한독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확언하기를 피하면서 “불원 동당으로서 태도를 석명할 것이라”고 말한 다음 “결국 이 이상 추진함이 불가능하게 된 것은 자초 의도한 바와 추진방법에 있어 거리가 멀었고 국내정계에서 전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것은 역량부족이라 할 수 있다. 자국의 운명을 결정할 현 단계에 이르러 정계의 지도자라고 할 인물들이 독립운동을 할 의논을 하고자 한 좌석에서 회합을 회피함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통매(痛罵)한 것은 과반 정계 3거두의 회담기도에 모 요인의 거부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을 시사한 듯하다. 그리고 동씨는 이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적당한 시기에 추진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23일)

 

김구는 11월 22일 담화를 통해 “중요 정당 단체 간에 충분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어떤 구체적 기구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며 더 적당한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주요 정당으로 정협에 참가하고 있던 것은 한독당 외에 근민당과 민주독립당(민독당)이었고 남로당은 냉담한 태도를, 한민당은 적대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김구가 남로당의 정협 참가를 기대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한민당을 끌어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민족주의 깃발로 기존 반탁세력의 주류를 지키면서 중간파를 포섭함으로써 이승만 세력을 고립시키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런데 ‘5당 캄파’(신진당 근민당 사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와의 헤게모니 싸움 이야기가 나온다. 한독당이 주도한 것이더라도 정협에 참여한 다른 정당들도 노선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당 캄파의 요구 내용이나 방법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상황으로 보아 매우 중대한 요구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한독당이 요구하는 절대적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정도의 저항이 아니었을지.

 

한독당이 더 손을 대지 않자 정협의 움직임은 멈춰버렸다. 그러다가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 연속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만난 후 김구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주장하는 견해의 차이는 정계 주시리에 항간에도 불소한 의혹을 던지고 있었거니와 김구는 30일 오전 10시 이화장으로 이 박사를 방문하고 약 1시간 당면문제에 관하여 요담한 바 있었는데, 양씨 측근자 모 씨 등 담에 의하면 이박사가 주장하는 독립정부수립 견해에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그 증좌로는 과반 민대(民代, 민족대표자회의)와 국의(國議, 국민의회)의 알력관계 및 이 박사의 국민의회 주석 거부 성명 이래 주장하는바 또는 행동에 있어 상이한 바 있었거니와 30일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서북청년회 1주년 기념식에 오후 1시경 양씨가 참석하여 훈화를 한 바 있으며, 1일에는 김구가 오정 이화장으로 이 박사를 재차 방문하여 약 1시간 요담한 후 오후 1시 반 천도교강당에서 개최한 국민의회 제44차 임시대회에 임석하여 치사를 한 것으로 보아서도 추측할 수 있는 바거니와 또한 30일 요담 후 양차에 긍한 양씨의 연설내용에 있어 이 박사의 주장하는 “동포는 시급히 한데 뭉치어 남조선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하여 국권을 회복한 후 남북통일을 한다”는 골자가 동일한 것과 한편 김구가 1일 정부수립 문제 등에 관한 별항과 같은 담화를 발표한 것으로 보아서도 앞으로 우익정계의 동향은 극히 주목되는 바다. (<조선일보>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승만과 만난 후 연속 담화를 발표했다. 30일 담화는 정협 활동을 보류하되 표기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일 담화는 이승만의 이남 단독선거 노선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전 민족적 단결은 시간과 공간의 여하를 불문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좌우합작에 실패하였다고 전 민족적 단결공작을 포기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금차 한독당의 발론으로 12정당이 공작을 개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요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였든지 기술이 부족하였든지 혹은 노력이 부족하였든지 좌우 양측에서 거대한 부분이 적극적으로 참가치 아니하고 도리어 방관하며 심하면 중상까지 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통일공작은 도리어 역효과를 보이고 있는 형편이니 이러한 경우에는 잠시 그 공작을 보류하고 민중의 여론에 호소하는 일방 피차간에 원만한 양해를 성립하기 위하여 좀 더 노력함이 당연할 것이다. 아무리 초급할지라도 욕속부달(欲速不達)이 되면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류가 포기는 아니다.”

 

“혹자는 소련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유엔안이 실시 못된다고 우려하나 유엔은 그 자신의 권위와 세계평화의 건설과 또 장래의 강력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하여 기정방침을 변하기가 만무다. 그러면 우리의 통일정부가 수립될 것은 문제도 없는 일이다. 만일 일보를 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 더 명백히 규정한다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 독립을 전취하는 효과에 있어서는 그 정부로 인정받은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 하는 것은 유감이다. 하여튼 한국문제에 대하여 소련이 보이콧하였다고 하여 한국 자신이 UN을 보이콧하지 않은 이상 유엔이 한국에 대하여 보이콧할 이유는 존재치 아니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3일)

 

이 상황을 서중석은 이렇게 설명했다.

 

김구의 태도변화는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한민당과 더불어 극우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행동반경은 이승만의 일정한 양보와 명분 제공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김구는 1946년 12월 이승만의 도미외교를 지지하였고, 1947년에 들어와 단정노선을 보다 명확히 하였던 한민당에 대해서도 강한 통합의 의욕을 보였다. 특히 민족대표자대회는 출범 때부터 단정노선을 선명히 하였고, 그 후 남한 총선거를 위한 선거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하였는데, 김구는 이 조직을 국민의회에 통합시키고자 계속 노력하였다. 김구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적극 지지한 것은 이러한 각도에서도 검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시기에 김구가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기도 한 것은 헤게모니문제 외에도, 각정당협의회의 활동이 말해주듯, 항일독립투쟁을 해온,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었던 한독당의 당내 분위기가 중도파의 노선으로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46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