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천절 봉축행사가 열렸다. 개천절 봉축은 1909년 대종교에서 시작한 것이고 1919년 이후 상해-중경 임시정부에서 국경일로 경축해 왔다. 1948년까지는 음력 10월 3일을 봉축일로 삼았는데, 1949년 이것을 양력으로 환산하기 위해 문교부에서 ‘개천절 음-양력 환용 심의회’를 위촉했으나 4천여 년 전의 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양력 10월 3일로 정했다.

 

봉축행사에 이어 같은 자리에서 독촉국민회를 비롯한 14단체 공동주최의 유엔 결정 감사 및 총선거 촉진 국민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유엔 결정 감사 결의문(김준연), 딘 군정장관 환영문(남송학) 시국대책요강에 대한 결의문(양우정) 중·좌익 정당 준동 대책 결의문(유진산) 총선거 촉진 결의문(박순천) 등이 채택되었다. 중·좌익 정당 준동대책결의문과 총선거 촉진 결의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 중좌 12정당 준동 대책 결의문: “해방 이후 공산반역분자들이 우리 조국을 남에게 매도할 계획 하에 선전 폭동 데모 등으로 살인 방화 파괴적 만행을 감행하며 전 민족 분열을 만들어 세계에 광포하며 민족잔멸을 도모하여 난국을 이루다가 그 죄악이 O영(O盈)해서 갈 곳이 없게 되므로 그제는 중간파 명의를 무릅쓰고 공산분자의 부흥을 계획하여 도당을 호취하고 소위 12정당 합동회의란 것을 주창하여 민심을 현혹하며 정권을 도득(圖得)코자 하므로 필경은 또다시 외국의 후원을 얻어서 남한에 공산세력을 다시 세우기를 꾀하니 이것은 우리민족이 하루라도 묵인 방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분자들의 음모에 빠지지 말고 전 민족의 합심합력으로 하여야 한다. 오늘 우리 형세에서 민족분열을 일삼는 자는 단체나 개인을 물론하고 국계와 민생을 방해하는 자로 인정하여 매국류들이 발호 탈선할 계제를 주지 말기를 결의함.”

 

◊ 총선거 촉진 결의문: “유엔대표단이 남북통일 총선거 감시차로 조선에 오게 된다는 것은 결정 중이니 우리가 하루바삐 총선거를 집행하여 국회를 세워 가지고 우리의 국권으로 정당한 대표를 정하여 협의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결과로 총선거위원을 각 도 부 군 면에 조직 대기하고 있는 중이니 하지 중장에게 강청하여 금년 이내로 한다고 총선거 일자를 결정 반포하면 얼마 안에 즉시 선거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하지중장이 실시를 연기한다면 우리는 자율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 고충을 하지중장에게 통달하여 양해를 얻도록 하기를 결의함.” (<동아일보> 1947년 11월 16일)

 

“중-좌익 정당 준동”은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11월 들어 나타난 정당 연합 움직임이 있었는데, 아래 기사 끝의 목록에 보이는 것처럼 중간파 정당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한독당이 여기 끼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끄는 일이다.

 

조선독립문제가 국제연합총회에서 토의 중이나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말미암아 남북통일독립 실현이 우려시되는 차제 불원하여 내조할 국련감시위원회에 대처함에 국내 정계의 협조적 일관한 주장 표시와 나가서는 남북 정계요인의 회담·미소양군 철퇴촉진·남북 통일독립의 실현을 기하고자 남북을 통한 총선거 실시 등을 자주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함이 절대 끽긴함에 우선 남조선 각 정당이 제안하여 이를 촉진코자 각 정당에서는 근간 각 대표연석회의를 개최하던 중 완전 의견일치를 보았다 하는 바 금후동향은 주목되는 바이다. 즉 한독·근민당 등을 위시한 10여 당 대표는 지난 2일 한독당 회의실에서 회합하여 의견교환 정도로 예비회합을 하고 4일에는 동 장소에서 제2차 연석회합을 한 결과 ‘각정당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여 동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하며 5일에는 오후 1시 제3차 회합을 하여 동 협의회 결성준비에 관한 부서 결정등 구체적 추진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본 원칙 급 방략요지와 참가정당은 다음과 같다.

 

◊ 원칙 요지

조국의 모든 인민이 정권을 잡고 인민 자신을 위한 경제문화를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는 자주독립 자유번영의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에 민족의 총력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며 친일잔재를 배제하고 자주자결의 방법으로써 완전독립의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관계우방에 대하여 평등호조의 우의를 촉진하여 국제안전 및 평화를 보장할 것이다.

 

◊ 방략 요지

1. 자주독립의 민주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민족자결의 민주주의 선거기구를 중앙 및 지방에 조직하고 자유 평등 직접의 방법에 의한 보선으로써 국민의 총의를 기초로 한 국회를 창설할 것.

2. 38선의 양군 분리장벽 철폐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 남북의 교류를 보장하여 전국적 총선거를 실천케 하되 그 전제조건으로 미소 양군을 즉시 철병케 하고 일절 정권을 우리 민족에게 남기게 할 것.

3. 보선 실시방법과 양군 철퇴절차와 남북의 당면 긴급사항과 철병 후의 치안확보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할 것.

4. 남북대표회의의 구성준비로서 위선 이남 각정당협의회를 구성할 것.

 

◊ 참가정당

한독당 근로인민당 인민공화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신진당 조선공화당 보국당 조선민주당 민주독립당 사회인민당 (<조선일보>, <경향신문> 1947년 11월 6일, 7일)

 

이 연대가 제시한 방략은 소련의 유엔 제안에 부합하는 것이다. 양쪽 점령군이 즉시 철병하고 남북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해서 총선거 실시 등의 과제를 수행하게 하자는 것이다. 철병을 정부 수립 후로 미루는 미국 제안이 유엔총회에서 채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철병 시기의 늦고 빠름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각정당협의회의 제안은 점령군이 있건 없건 총선거 실시를 조선인의 손으로 하자는 것이다.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겉으로는 환영하면서도 속으로는 ‘유엔 감시’가 형식적인 것이 되기 바라고 있었다. 군정청(과도정부), 입법의원과 경찰의 자파 세력, 그리고 미군의 비호 아래 이남의 선거를 석권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렇게 해서 이남을 장악한 다음 단계에서 이북을 끌어들여 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북정당대표회의가 만들어진다면 유엔위원회가 오더라도 조선인의 의견을 듣는 중요한 통로가 될 것이었다. 이남만이 아니라 남북 총선거가 될 위험이 있었고, 이남의 선거관리도 자기네 세력이 일방적으로 독점하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각정당협의회가 빨갱이들의 준동인 것처럼 몰아붙이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김구의 한독당이 거기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회의가 계속 한독당 당사에서 열리고 있었다. 주동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한독당 부위원장 조소앙이 나서서 이런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각정당협의회 구성의 추진과정에 있어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은 8일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조선독립문제가 국련총회에서 구체적으로 토의 가결되고 국련감시위원회가 내조할 현 단계에 이르러 국내에서는 이에 대처하는 동시 자주적 입장에서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는 좌우를 막론하고 절대 협의하여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찬탁이니 반탁이니 하여 좌우 대립이 되어 좌우합작도 미소공위도 실패하였지만 금일에 이르러서는 탁치문제도 없어졌고 (...) 혹은 미소공위의 재판을 운운하고 국내협조를 회피하고 타를 모함함은 진정한 독립을 염려하는 자의 행위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인민을 위한 민족자주적 공화국을 건설하려면 자유공민권을 향유한 자와는 협의 협조하여야 할 것이며 좌익이니 공산주의자니 하고 타국인시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견해 밑에 각 정당과 협의한다면 이것을 친소파라고 배척할 것인가?

 

요는 통일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는 지당히 좌우를 막론하고 절대로 국내 협조 협의가 필요하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9일)

 

지금까지의 반탁세력에는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세 갈래가 있었다. 이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것 외에 좌익을 극도로 배척한다는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에 ‘극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족주의 이념을 지키는 정상적 극우파는 김구 세력뿐이었다. 한민당은 이익집단일 뿐이었고 이승만 세력은 권력만을 노리는 정상배 집단이었다.

 

미소공위 좌초로 신탁통치 문제가 해소된 이제 이 차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한독당은 좌익을 배척하기는 하지만 좌익도 조선 공민권을 가진 존재로서 협의 대상으로 인정한다고 나선 것이다. 좌익의 원천적 배제를 위해 이남만의 선거도 불사하겠다는, 아니, 이남만의 선거를 추구하겠다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길이 갈라진 것이다.

 

11월 15일의 ‘국민대회’에서 박순천의 낭독으로 채택된 “총선거 촉진 결의문”을 보라. 유엔위원회가 오는 것도 기다리지 말고 연내에 선거를 해치우자는 것이다. 이승만이 조종하는 민족대표자회의에서는 8월 하순에 ‘총선거대책위원회’란 기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기구가 선거관리를 할 테니 하지 사령관이 빨리 시행을 해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남 단독선거를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독촉국민회는 11월 17일 이남 단독선거 의지를 분명히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독촉국민회에서는 17일 남조선총선거촉진을 기도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이 허감하지 않는 동안 어찌할 수 없지만 남한에는 총선거에 대하여 미 국무성과 하지 중장이 양해하여 공포가 된 것이고 미국인이 전적으로 우리의 주장을 동정하는 터이니 우리가 총선거로써 국회만 세우면 조국의 독립이 완성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18일>

 

선거를 서두르자는 전략은 이승만이 앞장선 것이었다. 그는 11월 4일에 이런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유엔에 의지해서 남북총선거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시간 낭비밖에 안 될 것이니 이남만의 총선거를 서두르자는 것이다.

 

“우리는 허명이나 형식상 독립보다 사실적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니 민의대로 국회를 세워서 신성불가침의 정권을 잡는 것이 우리의 독립이다. 이 실권만 가지게 되는 날은 남이 우리 일을 간섭하거나 자기들끼리 작성하고 강제로 준행시키려는 등 모든 폐단이 막힐 것이요, 남북통일을 우리 힘으로 도모하는 것이 남들에게 맡겨두고 처분만 기다리느니보다 낫고 또 속할 것이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서 남북총선거를 행하려 할지라도 우리 정부대표가 있어서 협조해야만 우리 민의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UN위원단이 타인들의 의견을 듣고 우리의 원치 않는 것을 준행하리니 또 혼란을 양성할 것이다.

 

UN대표단이 와서 남북총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소련이 불응하면 그 결과는 남한총선거로 귀결될 것뿐이니 기왕에 공위로 인하여 5·6삭 세월을 허비한 후 또다시 시일을 허비할 필요도 없고 형편도 허락지 않는 것이다. 설령 유엔의 결정대로 남북총선거가 된다 할지라도 대표단이 미소 사령장관들과 다소간 협의가 될 것이니 그 결과로는 단순한 민의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파괴분자들이 참가되는 날은 정부나 국회에 들어가서 파괴를 일삼을 것이니 세인 이목에 한인이 자치능력이 있다 없다 하는 치욕된 구실을 만들 것이다.

 

북한에 공산군이 남한 침범을 준비한다는 보도가 자주 들리는 이때에 우리는 하루바삐 정부를 세워서 국방군을 조직해놓아야 남한이 적화되는 화를 막을 것이다. 하루바삐 총선거를 행하면 한국이 UN에 참가되고 38선 철퇴를 우리의 힘과 원대로 주장할 것이다. 또 따라서 유엔에 여러 우방대표들은 우리의 민의를 따라 해결하기를 주장한바 남한에 정부수립이 하루바삐 되어 우리의 협조를 가져야 상당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인식하고 동정하는 친우가 많으니 우리 전 민족은 이에 대하여 의혹치 말고 최속한도 내에 총선거 되기만 위하여 철저히 노력하면 우리 국권회복이 더 지연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5일)

 

남북총선거가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그보다 열흘 전 총선거대책위원회 담화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이 담화에서는 남북총선거 노력을 “국제적 제스처”로 비하했다.

 

“선거 실시 지연 불가-애국단체연합회 발표”

 

우익 애국단체연합회에서 구성한 총선거대책위원회에서는 23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입의에서 선거법안 제정을 지연시키고 있을 때에 군정당국은 재삼 그 제정을 독촉하였을 뿐 아니라 6월말까지 완료 못하는 경우에는 미군정에서 제정하여 발포하겠다고 하였는데 선거법안이 제정된 지 이미 오랜 금일에 있어서 실시를 보지 못한 이유와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우리는 이해키 곤란하다. 우리는 국제적 제스처로서 우리 독립을 지연시킨다는 것은 용허할 수 없으므로 남조선뿐만 아니라 국한된 지역까지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외적 발언권을 획득하여야 하며 국권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10월 24일)

 

서중석은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승만은 당시의 시점이 그가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가 유엔에 의한 남한 총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조속히 선거를 요구한 것은, 미군정의 김규식 지지와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이 중도파의 득세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10월 15일과 26일의 두 차례의 규모가 큰 군중집회에서는 주요 타격대상이 합작파들이었다. (...) 이승만은 총선을 즉각 실시하도록 12월 초순에 수일 간에 걸친 대규모 시위와 철시 파업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으나, 계획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합작세력을 경계하면서 유엔대표단이 오기 전에 조속히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계속 견지하였고, 그는 유엔위원단의 실패를 예언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543-544쪽)

 

그런데 김구의 대오 이탈은 이승만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김구는 반탁운동을 함께 하면서 이승만을 앞장세워 오면서도 조직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거듭해 왔다. 임정을 계승하는 국민의회에 민족대표자회의를 통합하려는 김구의 시도가 9월 초에 좌절되고, 이어 이승만이 국민의회 주석 취임을 거부함으로써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한독당이 각정당협의회를 주도하고 나선 것은 종래의 권력투쟁과 차원이 다른 노선 문제였다. 이 갈등을 이승만이 11월 말까지 봉합하는 과정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