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첫 모임을 가진 각정당협의회(정협)가 11월 17일의 여섯 번째 회합에서는 12정당 공동담화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아직 참가범위도 확정되지 않은 준비위원회 단계인데도 이렇게 자주 모이고 합의 내용을 빨리 발표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참가자들의 열의가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각정당협의회 제6차 회합은 17일 오후 2시반 한독당 회의실에서 속회하고 기간 토의 중이던 국련총회에서 결의한 조선문제에 대한 비판 초안을 검토한 후 이를 통과시키고 현재 17정당이 참가하고 있으나 기중 4개당은 자격심사중이며 조선공화당은 당 결의에 의코자 참가대표가 보류하기로 하여 결국 12정당이 결의하여 18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동담화와 국련결의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일에는 오후 1시 동장소에서 제7차 회의를 속회하리라 한다.

 

◊ 정협 견해

 

1. 지난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결정된 조선문제 결의는 우리 민족의 의사표시가 없이 다만 우방의 의사로써만 결정된 것이므로 우리는 민족적 자주적 견지에서 엄정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2. 총회는 조선의 국가독립이 재확립된 후에 점령부대의 실행가능한 조속한 시일에 철퇴할 것을 인정하였으나 원칙적으로 외병 점령 하에 주권이 확립될 수 없음은 물론이요 총선거에 의한 국민의회가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려 하는 순간에 있어서 그 정부조직과 및 주권행사에 이르기까지 UN위원회와의 협의를 요한다고 함은 UN 동의가 없이는 주권을 수립할 수도 없으며 또 주권행사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 것이므로 재확립된 독립주권이 UN의 후견적 동의에 제약되는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결의문 서론 및 제3항 제4항 참조)

 

3. 정부수립을 협의하는 기능을 가진 국련위원이 조선정부수립 완료 후 즉시 총회 또는 소총회에 보고함으로써 그 임무를 해소하려 하지 않고 조선정부에 대하여 장기에 긍한 협의대상으로 마치 병립기구가 되고 있는 것은 자주독립의 절대성을 몰각한 것이다.(결의문 제5항 참조)

 

4. 이제 총회결의 전문에 대하여 결함과 전단되는 약간점을 열거하면

(1) 총선거의 시행 주체가 조선민족이라는 명백한 표시가 없는 것.

(2) 인도 대표의 남북통일 선거안이 채택되었다 함에 불구하고 의연 지대별 선거방법을 취한 것.

(3) 선거에 있어 조선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적 자유의 보장이 없는 것.

(4) 일제잔재 숙청규정이 없는 것.

(5) 결의문 제3항에 총선거에 의한 국민의회가 민족자결적으로 자신의 정부를 조직하지 못하고 국련위원회의 협의에 의한다는 것은 민족총선거로 발현하는 자주자결의 민주주의가 무시되는 것.(본문 제2절 참조)

(6) 결의문 제4항에 철병문제에 관하여 정부수립 후에 ‘실행가능한 한도로 운운’한 것은 철병을 지연시킬 우려가 있는 것.

(7) 결의문 제5항에 국련위원회의 존속기한을 규정치 아니하고 사태발전에 비추어 운운한 것은 국련위원회가 우리 주권행사의 협의기구로 장기존속할 우려가 있는 것.(본문 제3절 참조) [유엔총회 결의문 정문은 11월 14일자 일기에 전재되어 있다.]

 

◊ 공동담화

 

이제 조국은 민족분열이냐 자주통일이냐의 중대 기로에 당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자주정신에 입각하여 민족통일정부의 자주적 수립이 가능함을 확신하는 바이다. 조국강토로부터 외병의 철퇴를 주장하는 것은 그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민족전체의 지상명령이다. 방금 조선문제가 국제적으로 중대화하고 있는 이때에 조국의 주권확립을 위하여 외군 즉시철퇴를 요구하는 것은 민족의 본령이며 긍지이다.

 

1.남북통일이 없이는 자주통일정부수립과 도탄에 빠진 민생구제를 실현할 수 없으며 외병의 점령 하에서는 주권을 확립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민족정의에 비추어 조속철병과 남북회담을 촉진하려는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하는 것은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반민족적인 것이다.

 

2. 국련 결의는 그 전문에 긍하여 우리의 자주적인 주권행사가 명시되지 아니하였으며 무정기한 국련위원회 간섭이 법문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계국의 합의를 보지 못함으로 인하여 조선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희박한 현실에 비추어 필연적으로 남북분열을 초래할 우려가 농후한 것이다.

 

3. 우리는 이러한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미소량군의 조속철퇴를 요구하며 그의 대책으로 남북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하여 국제적으로 우려된다는 소위 진공상태를 해소하고 자주적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시행하여 조국의 자주통일정부수립을 기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1947년 11월 19일)

 

민족주의 입장이 두드러진 내용이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간파 세력이 미소공위 실패 상황 앞에서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한 것으로 대략 볼 수 있는데,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민족주의 입장이 강화된 것이다. 한독당의 역할이 느껴지는 점이다.

 

11월 19일 제7차 모임의 보도에서 한민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포섭 대상으로 한 것을 보면 한독당의 주도적 역할이 다시 확인된다. 종래의 좌우합작 세력은 소수파의 위치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런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정협 회의는 계속 한독당 당사에서 열리고 있었고 한독당 최고의 이데올로그 조소앙이 11월 16일자 일기에서 본 것처럼 정협 활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각정당협의회 제7차 회합은 19일 오후 2시반 한독당 회의실에서 속회하고 한민당을 위시한 미참가 정당에 대한 참가 재교섭을 하기 위하여 교섭위원으로 한독 근민 민독당 등 3당에 일임하였으며 남북회담 및 협의회의 추진 구체적 방략을 각 정당에서 작성하여 차회합시 제출케 하여 토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제8차 회합은 21일 오후 1시 동장소에서 속회된다. (<조선일보> 1947년 11월 22일)

 

그런데 제7차 회합을 가진 19일 오후 한독당에 변화의 기류가 일어났다.

 

국민의회 정무·법무 양 위원회가 각정당협의회 추진 보류를 결정한 것을 계기로 한독당의 태도가 자못 주목되고 있던 바, 한독당에서는 19일 하오 2시부터 죽첨장 김구 숙소에서 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각정당협의회 추진문제를 중심으로 장시간 논의하였으나, 김구로부터 “한독당으로서도 각정당협의회는 이 이상 더 추진시키지 말고 보유하라”는 요청이 있어 이에 따라 동당은 동협의회 추진을 보류하기로 되었다 한다.(<조선일보> 1947년 11월 21일)

 

11월 20일자 <경향신문>에 이 변화의 배경을 소상히 보여주는 기사가 나왔었다.

 

“동상이몽으로 위기에 봉착 - 한독당 내부에도 찬부 양파로 대립 - 암초에 걸린 정당협의회”

 

국련에서 조선에 감시위원을 파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새로 태동된 각정당협의회는 지난 17일까지 제6차 회합을 거듭하여 오는 동안에 최초 한독당이 의도하였던 이념과는 점차로 거리가 벌어지고 또 5당캄파 투위(신진당 근민당 사민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가 동 협의회에 참가하자 헤게모니 문제를 싸고 한독당과 5당캄파 투위 사이에는 미묘한 공기를 자아내고 있으므로 동 협의회는 벌써부터 암초에 걸려있다 한다.

 

그런데 동 협의회가 각 정당과 협상을 벌여오는 동안 한독당 내부에서는 명제세 씨를 비롯한 백여 명이 지난 12일 행동 보류를 성명하여 큰 충동을 주게 된 것은 기보한 바어니와 최근에는 동당 지방대표가 속속 상경하여 중앙당부에 항의하고 있으며 한편 국민의회에서는 지난 17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죽첨장에서 법무 정무 양 위원회를 열고 해 협의회에 대한 태도를 협의한 결과 국의로서는 동 협의회가 앞으로 더 추진하면 추진할수록 민족진영을 약체화할 우려보다도 좌익이 미소공위의 휴회로 우왕좌왕 하는 이즈음에 그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하여 각정당협의회의 추진을 만류하기로 되었다 한다.

 

‘캠페인’을 뜻하는 러시아말 ‘캄파니야’를 줄인 ‘캄파’는 당시 지식인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외래어의 하나였다. 근민당과 사민당 외의 3당은 뚜렷한 좌익정당도 아니었지만, 극우세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좌익 용어인 ‘캄파’란 말을 들먹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독당이 종래 좌우합작에 나섰던 중간파를 휘하에 끌어들여 맹주 노릇을 하려다가 중간파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데 대해 한독당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구와 한독당의 비타협적 자존심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다. 그리고 한독당이 정협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다른 극우세력에게 워낙 위협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한독당 내부 반발에는 외부의 책동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미군정이 주관하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최상의 진로로 여기고 있었다. 정협의 강경한 민족주의 노선은 그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남북한 총선거, 친일파 배제, 조선인의 손에 의한 선거 등 강령이 대중의 더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게다가 김구가 정협에 참여한다면? 지금까지 중간파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던 식으로 김구와 한독당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한독당 안에서도 밖에서도 한독당을 정협에서 떼어내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각정당협의회에 대처 70여 단체 궐기”

 

미소 양군 철병과 자주적 선거로써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태동된 각정당협의회는 누차 협의를 거듭하여 오는 동안에 한민 조민 독촉국민회를 비롯한 민족진영의 적극 반대와 조선공화당 민독당 남로당 보국당 등의 미온적 태도로 인하여 동 협의회는 지난 17일 작성한 공동담화를 한 번 발표한 이래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19일에는 동회 발기회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려고 하였으나 조소앙 씨의 불참과 외부의 반대 기세가 농후하여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고 기간 경과에 대하여 죽첨장에 보고한 정도에 그쳤다는데 동 석상에서 한독당 명제세 씨는 동회 추진을 극력 반대하였다 한다. 그리고 국의(國議)에서는 오후 2시부터 지난 17일 회의에 계속하여 법무 정무 양 위원회를 열고 동회 추진 보류에 대한 최후결정을 짓기로 되었다 한다.

 

한편 각정당협의회는 조국 독립의 활로가 열린 이 순간에 있어 동 협의회는 통일정부 수립의 암(癌)이 되므로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한독당을 제외한 한민 조민 독촉국민회등 민족진영의 70여 정당 사회단체는 21일 오후 2시부터 한민당 회의실에서 각정당협의회대책위원회(가칭)를 열고 제 대책을 강구하기로 되었다는데 그 귀추가 극히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21일)

 

11월 22일에는 김구가 담화를 통해 정협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사전 준비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본래가 각 방면의 의견을 타진하기 위한 임시회합의 성질이라고 본다. 각 중요 정당 단체 간에 충분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어떤 구체적 기구를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독당으로서는 통일을 실현시키려는 성의가 있다 할지라도 대상이 응하지 않으면 단시일 내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니 좀 더 적당한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1947년 11월 23일)

 

조소앙 등 한독당 일부가 정협에 나서는 것을 김구는 잠정적으로 승인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충분한 합의”가 있어서 상대가 응한다는 것은 정협 참가자들이 한독당의 헤게모니를 기꺼이 따라온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상대의 호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지금으로서는 서두르지 않고 보류해 둔다는 말이다. 아주 그만둔다는 말은 아니다.

 

당시 극우세력은 ‘민족진영’이란 말로 스스로를 ‘좌익진영’과 대비시키고 있었고 이 말은 언론에서도 대개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었다. 그런데 소위 민족진영은 통일 의지나 친일파 척결 의지의 기준에서 오히려 ‘반민족진영’이라 할 구성이었다. 그중에 진짜 ‘민족진영’의 이름에 부합하는 것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독당 세력이었다.

 

한독당 밖에도 민족주의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민족진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민족주의세력은 한독당뿐이었다. 한독당의 민족주의자들은 외부의 민족주의자들을 중간파라 부르며 민족주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족’의 이름을 정치적으로 독점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조선의 민족주의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 반탁운동 단계에서 그들은 친일파, 기회주의자들과 결탁했고 민족주의에 공헌하지 못했다. 이제 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가, 이제부터 살펴볼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