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의원의 대표성과 권한을 제한적으로 보는 미군정의 시각은 부일협력자 법안 거부 며칠 전 임시약헌 보류 통보에서 이미 나타나 있었다. 임시약헌은 1947년 3월 3일 의원 55인의 발의로 상정되어 곡절 끝에 7월 29일 입법의원 본회의를 통과한 것인데, 군정장관의 인준이 나오지 않고 있다가 11월 20일에 헬믹 군정장관의 보류 통보 서한이 입법의원에 전해졌다. 그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47년 8월 6일 입의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제출된 임시조선헌장은 신중히 검토하였다. (...) 물론 이 제의된 헌장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관선의원이 반수고 민선의원이 반수인 입의가 이와 같은 근본적이고 엄중한 문서 즉 헌장을 제정하는데 있어서 국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입의도 동의할 줄 믿는다. (...) 현재에 있어서는 이상 기술한 이유에 의하여 그 인준을 당분간 보류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마는 본인은 입의가 이 중대한 문제를 위하여 경주한 노력과 고려에 대하여 최대의 존경을 드린다. 그리고 입의는 장차 조선 통일의 영구한 헌장을 위하여 노력하기 바란다.”

 

11월 27일 친일부역자 법안 거부 통보는 딘 군정장관 명의의 서한을 통해 전달되었고 보도된 요지 중 제5항은 이런 내용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종류의 법률이 필요는 하나 그것은 전 조선민족의 의사가 명백히 될 때 즉 전 의원이 민선으로 된 의원에서 나와야 한다.”

 

임시약헌 추진에는 사실 분단점령 상태에서 합당한 일인가 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군정장관의 조치도 ‘보류’였기 때문에 즉각 반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보류라면 재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일협력자 법안의 ‘거부’는 속으로 그 법안을 싫어하고 법안 약화를 위해 애써 온 한민당-독촉 의원들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딘 군정장관의 서한 내용이 발표되자 흥분한 의원들 사이에서는 입법의원의 즉시 해체 주장까지 나왔으나 김규식 의장의 제안에 따라 이튿날 회의에 군정장관이나 헬믹 대리를 출석시켜 질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28일에는 딘 장관이 제주도 시찰 중이었으므로 헬믹 대리가 참석했고, 이 문제는 딘 장관 부임 전에 진행된 문제이므로 헬믹 대리가 책임지고 답변할 것이며 회의장에서 바로 답변하지 않고 후에 정리된 질문을 서면으로 받아 서면으로 응답하겠다고 했다.

 

입법의원에서는 12월 1일까지 의원들의 질의를 서면으로 모아 3일까지 영역해서 헬믹에게 보내고 5일까지 답변을 듣기로 했다. 12월 5일자 여러 신문 보도에 따르면 부일협력자 법안에 관한 질문 5개와 임시약헌에 관한 질문 4개가 헬믹에게 전해진 질문서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1. 민반 부일협력자 등에 대한 인준보류 이유에 대해:

 

(1) “일본의 점령이 장기였으므로 범죄의 종류를 명확히 구별하기 곤란한 것”

 

질문: 118호 법령 제7조 제2항에 근거하여 제정하였는데 법령을 인준하지 않겠습니까? 또는 이 조문은 입의 의원에게만 적용되고 관민에게는 불관(不關)이라고 해석하십니까?

 

(2) “당파적 개인적으로 보복의 도구가 될 것”

 

질문: 실시의 계선과 한도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을 뿐더러 법정에서 증거에 의하여 적용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복의 도구가 된다는 막연한 구실로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의도는 나변에 있습니까?

 

(3) “이런 법률이 필요하나 전 의원이 전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는 민선이어야 될 것”

 

질문: 필요성을 자인하면서 일변으로 군정법령에 근거하여 조직된 본원의 권한을 부인하는 것이니 118호 법령을 개정하기 전에 그 권한을 구속함은 법률에 배치되는 행정이 아닙니까? 본원 설립 당시에 조선 재건의 기초적 법률을 제정하라던 정신을 부인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있어서 배치되는 해석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이상과 같이 전체인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기관이라는 것은 본원의 체면을 손상시키어 권위를 타락시키는 것이니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요망합니다.

 

(4) “간상배에 대한 규정은 현재 행형법에서 취급할 수 있으므로 혼동되는 것”

 

질문: 전체를 보류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5) “이 양법은 전체가 민선으로 된 입법기관에서 채용될 자료밖에 안 되는 것”

 

질문: 본원의 권한과 군정법령 118호의 책임한도를 명백히 할 것.

 

2. 임시약헌의 인준을 보류한 이유에 대하여:

 

(1) “과도입법기관은 국민 전체로부터 약헌과 같은 중대한 법안제정의 위임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질문: 원래 기초의 의도가 본원에서 제정 실시될 제법안의 기초로 삼자는 것이며 남북통일 시까지의 임시법안인데 제정할 수 없다는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하지 중장과 귀하께서 남조선 민중을 대표하는 입의기관이라는 것을 공포하였고 민중도 승인한 바인데 지금에 와서 국민으로부터 법제정을 위임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의사는 요해할 수 없습니다.

 

(2) “남조선에 국한 적용될 것이 아니므로 심심 고려하여야 할 것”

 

질문: 본원에서 제정된 법안은 남조선에만 실시될 것이니 약헌이라는 문구만 요시(要視)하지 말고 임시라는 문구도 참작하기 바랍니다.

 

(3) “완전한 민선 입의에서만 약헌안을 작성할 수 있는 것”

 

질문: 관선의원은 국민의 대표임을 부인한 것인즉 관선의원과 군정장관 간에 사무적 협조가 곤란하겠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4) “약헌을 인준하면 현 過政의 재조직이 요구되는데 정치적 유동상태에 있으므로 국내외로 진전되는 정세를 고려하여야 될 것”

 

질문: 현 행정부 기구개혁안을 추진하는 이유는 여하? 고 러취 장관이 행정권 이양함에 약헌이 기초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점을 명백히 대답하여 주시오. (<조선일보> 1947년 12월 5일)

 

답변이 예정되어 있던 12월 5일 헬믹 군정장관대리는 신중한 답변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12월 9일 답변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진행을 보도한 12월 7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입법의원 해산론의 배경에 조기총선론자들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지 않나 하는 관측이 흥미롭다.

 

임시약헌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처단 법안에 대하여 군정장관이 확인을 보류한 것을 계기로 해산론까지 대두하고 있거니와 관-민선 양측의 이에 대한 기술적 방법이 구구하다. 즉 관선 측에서는 끝까지 인준보류의 이유를 규명한 후 태도를 결정하자는데 대하여 민선 측에서는 해명을 들어보았던들 만족할 것이 없으니 즉시 해산하자고 역설하고 있다. 여기에는 복선이 잠재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즉 현 입의를 조속히 해산함으로써 총선거를 촉진하자는 정략이 내포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입의 존속은 UN위원단의 내조 시에 중간층의 발언권을 강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하여 약헌법 등 인준보류의 이유로 헬믹 대장이 민의를 반영한 입법원이 아니라고 과감히 지적한 것을 계기로 이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민의기관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유력하며 민선의원 대부분이 이에 찬동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최후적 태도결정은 내 12일의 국의와 민대 합동회의에서 보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하여간 현 입의는 UN위원회 내조 시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정당국에서는 결코 해산시키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입의 의원 측으로서는 의사를 진행하여도 하등의 실효를 얻기 곤란하니 해산 시까지 무기휴회 할 것으로 관측된다.

 

입의에서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처단법안 및 조선임시약헌에 대한 군정장관대리의 인준 보류가 도화선이 되어 입의는 방금 존폐의 기로에 서고 있는데 지난 3일 인준 보류에 대한 헬믹 대장의 명백한 이유를 규명코자 질의서를 제출하여 5일까지 회답을 요청하였던바 5일 헬믹 대장으로부터 회답을 연기하는 다음과 같은 서한이 전달되었다.

 

“입법의원 제씨의 질문서를 본즉 큰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바 확실치 못한 대답을 하여 새로운 오해를 일으키기 싫으며 중대한 문제를 대답함에는 신중하여야 할 것인즉 너무 시일이 촉박하여 5일까지는 도저히 협의하여 대답할 여유가 없으니 내 9일 본회의까지 서면으로 대답하겠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7일)

 

12월 9일 헬믹은 대단히 긴 서한을 입법의원으로 보냈다. 내용 대부분은 입법의원을 존중한다는, 입법의원이 대단히 중요한 기구라는, 하나마나한 소리였다. 임시약헌과 부일협력자 법안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두 문단이 들어있었다.

 

“연합국의 결의에 비추어 보아 임시약헌에 대하여 결정적 행동을 차제에 취하는 것은 부적당한 것이 명백하여 보입니다. 그러나 귀원에서 작성한 헌법은 연합국 계획 하에 피선된 새 의원이 국가정부수립에 착수할 때에 가장 적당하게 의원에 회부하여 고려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관은 부일협력자처벌안의 인준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지금이 아니라고 느꼈으나 해 법안의 인준을 연기한 결정을 재고하겠습니다.

 

조선인민은 그러한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입법의원은 이 중요한 사항에 인민의 의사를 표현할 적당한 기관인 것을 인정합니다. 해 법안을 계속하여 분석 연구한 후 법률의 보다 유효한 시행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미구에 동 법안을 귀원에 회부하겠습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0일)

 

입법의원은 헬믹의 서한에 만족하고 이 문제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김호 의원의 “양 법안에 대하여 수정이나 개정할 점이 있다면 지적하여 다시 본원에 회부하여 주면 재고려하겠고 그렇지 않으면 곧 인준하여 주기를 요청하자”는 동의가 있었으나 김약수 의원의 “동건을 이 이상 추궁치 말고 일단락을 지을 것”이라는 개의가 재석의원 64인 중 40대 9로 가결되었다. (<경향신문>, <서울신문> 1947년 12월 11일, 12일) 그리고 입법의원에서는 이 날 시국대책요강과 관련하여 과도정부 정무회의 불신임안을 상정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