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기획해서 잘 만들어내는 출판인에게 ‘경의’를 느끼는 일이 왕왕 있는데, 1979년 시점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을 만들어낸 한길사의 업적에는 돌이켜 생각해도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신체제가 막바지 기승을 떨던 그 시절에 그 체제가 전력을 다해 틀어막던 주제를 독자들 앞에 내놓다니, “맨땅에 헤딩”으로 보였다.

 

‘대한민국의 기원’에 관한 진지한 토론은 대한민국이 ‘국시’를 걸고 가로막아 온 일이었다. 몇 세대에 걸쳐 수천만 국민이 반공의 포로로 살아 온 희한한 현상이 어떻게 해서 빚어진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이 사회에서는 수십 년간 철저하게 금지되어 왔다. 이 금지의 폭력성이 절정에 이른 1979년 시점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온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었다.

 

그 시점의 상황을 차분히 되살펴보지는 못했지만, 달이 차면 기울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측면도 있었던 현상이라고 생각해둔다. 바로 그 무렵에(1981년)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제1권)이 나온 데서 이 느낌이 더욱 뒷받침된다.

 

학술활동에 대한 냉전의 압력이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심하지 않았다. 반공주의에 벗어난 이야기를 한다 해서 지하실에 끌고 가 두들겨 패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연구비 등 제도적 지원에 차별이 있었고, 그런 차별을 무릅쓰고 달려들 만큼 한국현대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구자가 나오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커밍스는 미국현대사를 열어보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 나섰다. 정상적 사고에 제약을 가하는 냉전의 시각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미국 학계에서 1960년대 후반 이래 늘어나 오다가 이 시점에 이르러 한미관계에까지 번져 나온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한국전쟁의 기원>의 출현은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냉전체제의 압력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압력이 한국 쪽에서 더 지독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두 책의 성격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강렬한 지향성에 비해 담론의 안정성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 반면 <한국전쟁의 기원>은 담론의 새로운 차원을 위한 구체적 근거를 많이 확보했다.

 

<해방일기> 작업은 198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참조하여 <해방전후사의 인식> 다음 단계 담론의 방향을 정리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여기에 커밍스의 연구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선 내 사정에 관해서도 커밍스의 연구에 잘 정리된 것이 많거니와, 특히 그 시기 미국 사정이나 세계 사정에 관해서는 국내 연구자들에게 바라기 어려운 수준의 정확하고 적절한 안내를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커밍스의 안내에 다소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트루먼독트린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커밍스는 미 국무성이 육군성 등 여러 부서로 보낸 1947년 3월 27일자 보고서를 매우 중시한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46쪽에는 이 보고서 내용 일부가 발췌되어 있다.

 

소련에 대한 봉쇄를 철저히 한다는 우리 정책에 빈틈이나 약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 지역에서라도 약한 태도를 보이면 소련은 틀림없이 이것을 전면적 완화의 징조로 해석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우리가 소련에게 굴복하거나 회피하려는 자세를 보이기만 하면 독일 등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지역에서 소련의 태도가 굳어지는 결과를 쉽게 가져올 수 있다. 반면 조선에서 확고한 태도를 보일 경우 소련과의 다른 관계에서도 우리 입장이 실질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 보고서가 조선에 있어서 반소-냉전 노선을 주장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 시점에서 미국 정책노선이 그 방향으로 확고하게 굳어져 있었다고 보는 커밍스의 관점에는 수긍이 안 된다. 조선 문제의 유엔 회부 방침을 미국 정부가 정해놓은 상태에서 미소공위 재개는 시늉에 불과했던 것처럼 커밍스는 설명한다. 그러나 마셜과 몰로토프 사이의 서신 교환, 그리고 6월 중순까지 미소공위의 순조로운 진행을 모두 시늉으로만 몰아붙이는 데는 무리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6월 중순까지는 미소공위 성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미국 측에서도 있었다고 나는 본다. 대표단을 이끄는 브라운 소장이 미군정 내에서 김규식-안재홍 등 중간파의 대변인 노릇을 해온 것도 미소공위 성공을 바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한다. 6월 11-12일에 공동결의와 공동성명으로 나온 성과를 얻기까지 미소공위의 강행군은 회담 성공을 위한 양측 대표단의 진지한 성의가 어울린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이 협조 분위기가 깨어진 외견상의 계기는 6월 23일의 반탁시위였다. 소련 대표단은 투석을 당했다고 주장하는데 남조선과도정부(미군정) 경무부는 투석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대표들 중에는 투석 사실을 개인적으로 확인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시위의 책임을 가진 반탁투위의 가입단체를 제외해야 한다는 소련 측 요구를 미국 대표단은 거부했다.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미국 대표단이 어느 정도 옹호한 셈인데, 그때까지 회담 성공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 온 태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커밍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소공위를 무시하는, 즉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거부하는 쪽으로 미국정부의 새로운 지침이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6월 16일 대표단에 새로 파견된 국무성 직원 조지프 제이콥스가 7월 16일 이승만과 하지의 만남을 주선한 사실을 지난 7월 13일자 일기에서 지적했는데, 그 역할이 흥미롭다. 테러 같은 짓 하지 말라는 경고 편지와 그에 대한 가시돋힌 응답을 주고받고 있던 견원지간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밤늦은 시간에 무릎을 맞대게 만든 사람이 조선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사람이었다니, 가져온 메시지가 여간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가보다.

 

해방 조선의 자연스러운 진로를 왜곡시킨 외세로서 미국의 역할이 소련보다 압도적으로 컸다고 하는 커밍스의 관점에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한다. 소련은 조선의 변화에 편승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소극적 입장이었던 반면, 미국은 일제시대 질서를 조선에 복원시키는 반동적 노선을 통해 영향력 확보를 적극적으로 꾀했다. 그러나 미국의 그런 노선을 커밍스는 지나치게 일관되고 확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

 

이 불만의 정체를 전상인의 “브루스 커밍스와 한국현대사 이해”(<고개숙인 수정주의>(전통과 현대 펴냄) 360-411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듯하다. 전상인은 커밍스의 연구에서 “구조주의적 시각의 과잉” 또는 “이론의 과잉과 구조의 과적”이란 문제를 지적한다. 이 문제는 사실 측면의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데,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대표적 문제일 것이다. 전상인은 일제시대 조선의 계급 갈등 양상과 점령 초기 미군정의 의도에 대한 커밍스의 해석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는데, 나도 이 지적에 동의한다.

(다만 용어 번역에는 동의하지 못할 것들이 있다. ‘국제주의’에 대비되는 ‘nationalism’을 ‘민족주의’라 했는데, ‘국가주의’가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커밍스가 여러 번 쓰는 “premature cold warrior”를 “냉전의 조숙한 용사”라 한 것도 “성급한 냉전 투사”가 나을 것 같다. 물론 전상인만이 쓴 말이 아니지만, 번역 용어 선택에 각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그의 연구를 인용하는 김에 지적해 둔다.)

 

8월로 접어들며 브라운 미측 수석대표는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확인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다. 8월 1일에 합의되지 못한 내용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스티코프 소측 수석대표는 그 이튿날 뒤따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책임을 서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그 내용을 더 이상 세밀히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해둔다. 7월 16일 브라운이 양측 대립 논점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닷새 후에 소련 대표단의 반박 성명이 나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 하루 만에 반박 성명이 나온 것이다. 미소공위의 난항을 확인하는 사인을 미국 측이 줄곧 앞장서서 내보내고 있고, 그에 대한 소련 측 반응도 촉박해지고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