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하의 남조선은 경찰국가로 변해 왔다. 웨드마이어 특사가 1947년 가을 조선을 방문했을 때 경찰의 미국인 고문 한 사람은 “국가경찰 조직이란 그 정의상 바로 경찰국가와 동의어”라는 의견을 말했다고 한다. (Bruce Cu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2> 188쪽에서 재인용) 1945년 가을 이래 경찰 총수를 맡아 온 조병옥은 경찰이 민심을 돌아볼 필요 없이 임명권자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버젓이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경찰진용은 사회추천에 의한 민선기관이 아니고 그 직원은 군정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명권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된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를 다 함으로써 의무를 다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그 명칭과 기구도 경무부와 일원적 연락 아래 두고자 준비하고 있는 터이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
1946년 10월 소요사태에서 경찰의 반동성이 미군정의 최대 문제로 부각되면서 좌익의 경찰 비난에 중간파도 경찰개혁안 제출로 가세했다. 1947년 2월 중간파의 안재홍이 민정장관에 취임하면서도 첫 번째 요구가 경찰개혁이었다. 그러나 안재홍도 몇 달 안 되어 경찰 개혁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민세 안재홍 선집 2> 281쪽)
오늘날의 검찰이 “권력의 주구” 노릇으로 권력화를 시작했다가 “검찰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정권의 통제조차 벗어난 “주인 없는 들개”가 되었다는 의견을 적은 일이 있다. (“검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해방공간의 경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반동적 인물들에게 경찰 통수권을 맡긴 것은 편의를 위한 일이었는데, 일단 경찰 권력이 확립되자 임명권자들도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집착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런데 1947년 8월이 되면 경찰의 언론 탄압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었다. 물론 미군정이 좌익 신문 탄압으로 시범을 보이기는 했지만, 미군정의 탄압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일상적 언론 탄압을 경찰의 속성으로 삼는 것은 결코 미군정 당국자들이 바란 일이 아니었다. 8월 7일 남조선과도정부 출입기자단이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제출한 건의서에서 당시 기자들의 불만을 알아볼 수 있다.
건의문: “귀하의 건강을 축복합니다. 최근 언론계의 책임자 내지 제1선 기자에 대하여 구금 취조하는 사실이 거듭 발생하고 있음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에 남조선과도정부 출입기자단은 좌와 같이 2개조항의 요구조건을 결의 전달하오니 찰지 혜량하시와 즉시 실천하여 주심을 무망하는 바입니다.”
요구조건:
1. 현재 구금 취조 중에 있는 신문지책임자 및 제1선 기자는 즉시 석방하고 불구속으로 조사할 것
1. 앞으로 기자 및 논조에 관하여 조사의 필요가 있을 시에는 일절 불구속으로 문의할 것 (<조선일보> 1947년 8월 9일)
이에 조금 앞서 수도경찰청 출입기자 일부가 기존의 출입기자회를 벗어나 별도의 출입기자회를 만든 사실이 눈길을 끈다. 새 출입기자회는 8월 1일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기 각사 수도경찰청 출입기자 일동은 현 제1총감부 겸 수도경찰청 출입기자회를 탈퇴하고 새로이 제1경무총감부 출입기자회를 조직 발족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그간의 경위를 공개하여 우리들의 행동이 언론의 공정과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전취를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이해하는 한편 금후 가일층 편달과 지도를 요망하는 바이다.
최초에 전기 수도청 기자회가 조직된 목적은 각처의 출입기자회가 다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사 출입기자의 취재의 편의와 출입기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조직 후 점점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기자회는 이러한 조직당초의 목적보다 모종의 정치역할을 조역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주의 주장을 달리하는 각사 기자로서 구성된 동 기자회가 협조기사라는 명목 하에 기자의 성격을 구속하고 공동취재라는 명목 하에 취재의 범위를 단일화시켜 사실의 정당성과 여론의 공정성을 상실케 하여 일부 정치세력의 정치적 이익에 무비판적으로 가담 추종하는 결과를 초래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 언론적 태도를 금일에 이르기까지 포기치 않으려는 우리들의 노력과 그들의 공정한 언론인으로서의 양심의 반성이 있기를 기대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일에 이르러 국내외 정세의 미묘한 동향에 따라 그들은 그들의 목적에 따라 거의 극단적인 언론에까지 이르게 되어 한 사람의 신문인이니 보다 정당 일원임을 자처하고 사건의 보도보다도 정치목적의 선전을 위주하는 데 종시 일관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겐 국가와 민족의 운명보다도 그들이 소속한 혹은 지지하는 정치단체가 더욱 소중한 것이다. 자유스런 보도에 의한 공정한 여론을 환기시켜 조국재건에 이바지하려는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여좌한 반 언론적 반 민족적 언동에 이 이상 더 묵인할 수 없으므로 동일한 출입처에 본의 아닌 2개의 기자단을 갖게 된 것은 퍽 유감으로 사유하는 바이다.
시비 선악은 역사의 판단에 맡길 것이나 해방 이후의 조선 언론계가 빚어낸 반민족적 반국가적 죄과를 성찰할 때에 오히려 만시지탄이 없지 않은 바이다. 민족의 공론을 등에 지고 새로이 출발하는 본기자회에 많은 애호와 성원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1947년 월 일
제1경무총감부 출입기자회 가입사: 동아일보 민중일보 현대일보 대한일보 독립신문 부인신문 중앙통신 (<동아일보> 1947년 8월 2일)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자유신문> 등 당시의 영향력 있는 신문들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동아일보>가 주동이 된 일 같은데 왜 이런 짓을 해야 했을까?
바로 떠오르는 일이 지난 3-1절 충돌의 처리를 둘러싼 장택상과 출입기자단 사이의 갈등이다. (1947년 3월 1일자 일기 “도둑적으로 완벽했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인명피해를 낸 발포를 좌익 소행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남로당 등 좌익 단체들이 들어 있던 일화빌딩에서 총격이 가해졌다고 장택상은 발표했는데, 기자단은 이 발표에 납득할 수 없는 점이 많다며 독자적으로 조사를 행하고 이를 반박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분노한 장택상이 기자들의 청사 출입을 금지하자 기자단은 수도경찰청 취재 거부로 대응했다.
처음 있던 일도 아니었다. 1946년 1월 19일 새벽 경찰의 학병동맹 습격 후에도 장택상의 말도 안 되는 발표에 반발한 조선신문기자회에서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해 발표한 일이 있었다. (1946년 1월 27일자 일기 “장택상의 면피 두께는 얼마?”) 당시 조사와 발표의 주체는 조선신문기자회였지만, 수도경찰청 출입기자단이 중심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장택상은 극우니 반동이니 이전에 성격상 문제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장병혜, 장병초 엮음, 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펴냄)를 펼쳐 봐도 “어떻게 저런 짓을?” 싶은 것을 본인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듯이 늘어놓은 일이 가득하다. ‘제2기자회’ 일 역시 나름대로 꾀를 써서 몇몇 기자를 유혹해 꾸민 일 같다. 그의 성격상 문제를 너무 천착할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짓이 횡행하던 상황을 적어둔다.
수도청 출입기자단만이 아니라 전체 기자단에도 제2기자회 설립도 이 무렵 추진되었다. 1945년 10월 만들어진 조선신문기자회와 별도로 ‘조선신문기자협회’의 8월 10일 설립에 관한 기사가 <동아일보>에 꾸준히 올라왔다. 발회식에서 김구, 이승만, 조소앙 등이 축사를 했다니 우익 기자회인 모양인데, 어느 기사에도 참여한 신문사 명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참여 범위가 신통찮았던 모양이다.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한 사태는 8월 5일 시작된 서울중앙방송국 탄압이었다.
“방송전파를 이용하여 적화선전을 도모-남로당계 방송국원 피검”
전파를 이용하여 적화 선전을 하던 남로당원 등 14명이 4일 수도관구경찰청에 검거되었다. 정부의 기관으로써 엄정 중립의 입장에서 불편부당해야 할 중앙방송국의 마이크를 통하여 전해지는 방송내용이 요즘 때때로 이상할 뿐 아니라 정당시간에 실시되는 우익 정객의 방송이 구절구절 중단되는 일이 적지 아니하여 일반청취자들은 적지 않은 의아를 느끼고 있었는데 수도경찰에서 단호한 메스를 내리어 마침내 그 흑막과 음모를 적발하고 그의 관계자에게 철퇴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지난 1월 남로당에서 내린 지령 전모를 수도경찰청에서는 5일 발표하여 그들의 전율할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하였는데 그 지령은 다음과 같다.
1. 방송국 전원을 남로당 세포에 가입시킬 것(현재 전 국원의 4분의 1은 획득)
1. 방송을 통하여 극좌익 사상을 일반청취자에게 주입시킬 것
1. 우익 측에 관한 정치방송은 가급적 방송을 회피하도록 하고 만일 방송을 할 때에는 기계고장을 구실로 하여 암암리에 방송을 방해하여 일반청취자가 청취하기 곤란하도록 할 것
1. 가사 등을 창작하여 청취자에게 좌익사상을 주입시킬 것
1. 미국인의 언동을 일일이 보고할 것
1. 직장을 통하여 비밀을 보고할 것
등으로 서울중앙방송국 세포조직부서는 다음과 같다.
편성과: 김응환, 김원식, 이만재, 이방원. 방송과: 차영동, 신진철, 전보일. 총무과: 김순화, 백상균, 이민, 기술자 3명, 수부 2명. (<동아일보> 1947년 8월 6일)
“방송기 파괴 계획-여 아나운서 등 검거 취조 중-‘마이크사건’ 점차 확대”
서울중앙방송국원의 마이크를 통한 음모사건은 방금 수도경찰청에서 연루자를 속속 검거 중에 있는데 7일 새벽 5시경에는 동국 조정과원 안병무(27)와 아나운서 이춘자(23) 외 1명이 검거되었으며 이들 외에도 방금 10여명이 지명수배 중에 있다 한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남로당원으로 최후에는 기계파괴까지 계획하였다고 자백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들은 무선법 위반 법령 19호 4항 위반과 맥아더포고 2호 위반으로 불일간 일부는 송청하리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8일)
동아일보가 신이 났다. 위 기사들이 6일자와 8일자 2면 톱기사로 실렸는데, 그 사이의 7일자 2면 톱기사도 맞춰서 나왔다. 그런데 이 기사는 기사거리가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방송국사건 확대-남산대회 허위방송 발각-검찰청서 국장 직원 취조”
불편부당하여야 할 중앙방송국에서 적색운동을 일삼았던 방송국원 14명이 방금 수도경찰청에서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함은 기보하였거니와 이와 따로이 서울고등검찰청에서는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지난 28일 남산에서 거행된 공위촉진 인민대회에서 공위 소련 측 수석대표의 연설을 왜곡 방송한 혐의로 방송국장 외 3명의 직원을 방금 불구속으로 문초 중에 있는바 동 사건의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8일 남산에서 거행되었던 공위촉진 인민대회에서 공위 소련수석대표 쉬티코프 장군의 연설 중 ‘반탁투쟁 하는 사람들은 막부삼상결정과 연합국을 지지하여 민족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우국지사들 앞에 수치를 면치 못하리라’는 1절을 시내 모 신문사 기자는 ‘멀지않은 장래에 인민 앞에 사과하리라’고 보도하였는데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이러한 허위보도를 그대로 전용 방송 선전하여 민심을 교란시키고 질서를 문란케 한 혐의로 지난 2일부터 이혜구 방송국장 외 3명의 방송국원들과 모 신문사 편집국장 그리고 취재기자는 서울 고등검찰청 박종근 검찰관으로부터 불구속으로 취조받고 있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7일)
동아일보가 이렇게 열을 올리는 사흘 동안 자유신문에는 짤막한 기사 하나만이 올라왔다.
“방송국사건 수도청 발표”
수도경찰청 5일 발표에 의하면 시내 명륜동 1가 33의 36에 사는 김응환(24, 방송국 편성과장)은 방송국의 좌익화를 꾀하고 있던 것을 수도청에서 탐지하고 남로당 등 세포원 14명 중 7, 8명을 검거하여 취조 중이라 한다. (<자유신문> 1947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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