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2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변화가 조선에 2년 동안 일어났는데, 분단건국을 향한 움직임을 그중 중요한 변화로 본다. 2년 전에는 조선인만이 아니라 누구 눈에도 “말도 안 되는” 분단건국이었는데, 이것이 이제 상당수 관계자들에게 유력한 옵션으로 떠올라 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완전히 현실이 되어버릴 참이다.
분단건국을 전쟁의 충분조건처럼 보는 커밍스의 관점에 나는 동의한다. 세밀히 따져보면 전쟁 발발에 소련, 중국, 미국 등 외세의 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결속력이 강한 한민족을 두 국가로 떼어놓은 상태 자체가 전쟁 발발의 기반조건이었다. 외세의 작용은 이 기반조건 위에서 부차적인 작용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한민족의 정치적 존재양식은 60년 동안 분단에 묶여 있었다. 1948년의 분단건국은 1910년의 식민지화와 함께 한민족의 진로를 결정지은 20세기 최대의 사건이었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단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분단건국의 원인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81년 커밍스가 제기한 미국책임론은 소련의 적화야욕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반공독재로부터 아직 풀려나지 못하고 있던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해방공간에 강한 힘을 끼치고 있던 미국에게 분단건국의 책임이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권 비판 시위보다 미국 비난 시위를 더 엄하게 다스리던 반공독재 하의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거론하는 것이 공권력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봉쇄의 틈바구니를 뚫고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파고든 글은 진덕규의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뿐이었다.
조선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미군정의 무능과 같은 소극적 문제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국가노선의 적극적 작용에서 찾은 커밍스의 연구는 세계체제론 차원의 구조주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실을 일관성 있게 해명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진 것이었다. 똑같은 해상도라도 구도를 잘 잡은 사진이 피사체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며칠 전(8월 8일) 일기에서 커밍스의 관점에 부분적인 불만을 느끼며 전상인의 <고개 숙인 수정주의> 한 대목에서 그 불만의 이유를 확인한다는 이야기를 썼다. 이것을 본 한 독자가 충고(경고?)의 메일을 보내줬다. 전상인은 뉴라이트의 신진 기수이므로 인용할 때 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년 전 <뉴라이트 비판> 작업 때 나는 “뉴라이트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운다”는 자세를 표방했고, 실제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논문들을 그 후의 여러 작업에 잘 활용해 왔다. 그 책 편집자들의 의도를 잘 모르고 게재를 허락한 순진한 연구자들의 논문만이 아니라 편집진 필자의 논문도 활용해 왔다. 누군가가 애써서 작성한 논문이라면, 그 의도를 충분히 감안하고 활용할 때 다 나름대로 활용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상인의 연구도 마찬가지다. 전상인은 객관적 자세를 지키는 느낌을 주려고 노력하는 수준이 다른 뉴라이트 필자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의 글은 대개 ‘논설’ 차원이 아니라 ‘논문’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수정주의’의 고개를 숙이게 하고 싶은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러니 그 의도를 감안하고 그의 글을 읽는다면 “아, 정치적 이유로 커밍스를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도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구나.”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다.
전상인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직접 비평한 글 “브루스 커밍스와 한국현대사 이해”에서 “주관적 목적성”이란 말을 여러 번 쓴다. 나도 여러 대목에서 동의하는 지적이다. 그런데 커밍스가 구조주의 방법론을 쓴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이 지적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구조주의 방법론에 따른 연구는 세밀화가 아닌 스케치의 성격을 가진 것이므로 실증적 기준에서는 한계를 원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상인은 커밍스의 실증적 한계를 비판하는 데 자신의 다른 글 “1946년경 남한주민의 사회의식”을 여러 번 활용한다. 그런데 이 글은 여론조사 분석이라는 일견 실증적 방법을 활용한 연구결과지만, 실제로 그 무렵 남한주민의 사회의식을 밝히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다. 내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군정청에서 시행한 여론조사만을 대상으로 한 데 있다. 나는 이 글 읽으면서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같은 시기에 시행된 한국여론협회의 조사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당시 상황으로는 뜻밖으로 보일 만큼 균형 잡힌 조사 자세가 신문 보도에 나타난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일이 여러 번 있다. 군정청 조사보다 분량이 적지만 조사자의 편향성과 의도성을 보정하는 데 매우 요긴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자료다.
1990년에 <한국전쟁의 기원 2>가 나온 후 공산권 자료의 대거 발굴에 따른 실증적 연구의 확장이 커밍스의 주장을 많이 뒤집은 것처럼 전상인은 주장한다.
그것은 고의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커밍스의 저작들 자체가 냉전의 붕괴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서, 구공산권 자료가 공개되기 이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 자신도 냉전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1990년에 출간된 <한국전쟁의 기원 2>는 시기적으로도 불운이었다. 그 이후의 한국현대사 연구들은 새로운 자료의 공개에 힘입어 한반도 분단의 기원에 관한 커밍스의 주장을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고개 숙인 수정주의> 388쪽)
커밍스의 연구에 대한 일부 한국 학자들의 거친 비판은 199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해방일기> 작업에 활용하는 연구 성과는 거의 다 1990년 이후에 나온 것인데, 나는 거친 비판이 특별히 많다고 보지 않는다. 전상인 자신도 커밍스의 허점을 “침소봉대”하는 “커밍스 알레르기” 현상을 지적하는데, 위 문장 역시 커밍스의 실증적 한계를 과장하는 “침소봉대”로 내 눈에는 보인다.
전상인의 이런 서술도 “침소봉대”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련은) 1945년 9월 하순에서 10월 하순까지 한 달간 분단지향적이고 독자적인 북한 분할통치 기구를 속속 구성하였다. 여기서는 소비에트 민정의 수립이라든가 행정의 한인화 정책과 함께, 특히 독자적인 공산당 창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체제가 일반적으로 국가에 대한 당의 우위 원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밍스가 남한의 ‘국가’는 보고 ‘당’은 간과한 채, 미군 점령하의 남한이 먼저 분단의 길로 갔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 이하이다. 그리고 1946년 2월에 탄생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부 단독정부’(separate northern administration)라고 부른 것은 커밍스 자신이다. 같은 시기, 남한에는 분명히 ‘남부 단독정부’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고개 숙인 수정주의> 424쪽)
아니다. 이것은 “침소봉대”가 아니다. 바늘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까. 이건 그냥 없는 꼬투리 잡는 거다. 내가 보기에는 객관적 태도를 애써 꾸미는 전상인이 자기 정치적 의도를 이 책에서 제일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당이 국가를 지도하는 것은 공산주의국가에서 일반적 현상이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졌다 해서 1945년 10월의 북조선이 공산주의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전상인의 주장대로라면 북조선분국의 ‘본가(本家)’인 조선공산당이 성립해 있던 남조선은 ‘공산주의국가 할배’가 되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separate northern administration”이 어떻게 “북부 단독정부”가 될 수 있나? 미국 가서 공부했다는 사람이 “administration”과 “government”도 구분 못하나? 그리고 당시 남조선에서는 미군정이 스스로 “38도선 이남 조선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자처하고 있었다.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점령 당일부터 인민위원회 등 조선인의 자치 노력을 후원해 주었고 그 결과 조선인의 행정부라 할 수 있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 세워진 것이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미국인들이 결재권을 가진 채로 군정청의 이름만 ‘남조선과도정부’로 바꾼 것이 1947년 5월의 일이었다.
내가 좀 흥분했나? 맞다. 흥분했다. 무엇보다 밑줄 친 말 “상식 이하”에 꼭지가 돌았다. 누구의 상식, 어느 사회 어느 학계의 상식을 전상인은 말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상식’을 들먹이는 것은 4년 전 어느 분에게 들은 표현대로 “학자로서 해서 안 될 소리”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 당시, 안병직 교수와 동년배의 원로 학자 한 분을 만났을 때 “그분에 관해 이상한 얘기가 들리곤 하는데, 뭐가 잘못된 건가?” 물으시기에 마침 갖고 있던 복사자료를 보여드렸다. 안 교수가 이런 말을 한 대목이었다.
김대중 씨는 자기의 주관적 통일 이론만 가지고 남북수뇌회담을 추진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북한 정세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우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민족이야 어떻게 되었든 자기의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을 철저히 추구할 만큼 사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288쪽)
이 대목을 보고 그분이 “학자로서 해서 안 될 소리를 했군.” 탄식했던 것이다. 나는 전상인의 말 “상식 이하”도 학자로서 해서 안 될 소리라고 본다. 학술적 비평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상식”을 왜 들고 나오나? 그 상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지지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의 학문적 자세를 깊이 불신케 하는 독단일 뿐이다. 북조선분국 설치가 공산국가의 수립? 그게 상식이라고? 너무 웃긴다.
전상인의 이런 주장을 보며 분단건국에 대한 커밍스의 미국 책임론에 더욱 신뢰가 굳어진다. 커밍스 관점의 부정에 초학문적 동기를 보여주는 그가 이 정도 허술한 주장밖에 내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유효한 반론의 여지가 크지 않다는 심증이 드는 것이다. 그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꾸미는 데 애를 많이 쓰는 필자인데, 하필 이 대목에서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사실도 음미할 만한 것이다.
미국 책임론은 커밍스의 학설에서 핵심 내용이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더 깊은 고찰을 요구하는, 큰 정치적 함의를 가진 명제다. ‘전통주의’를 표방하는 ‘반공주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알레르기”를 일으킬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전상인이 유난히 수준 낮은 주장을 독단적인 논조로 내놓는 것은 알레르기 증상의 일종인 것 같다.
나는 지난 2년간의 작업을 통해 분단건국의 미국 책임론을 깊이 믿게 되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해 온 정통성과는 다른 의미의 정통성을 모색할 필요를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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