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일이지만 이 무렵 남조선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일 한 가지를 적는다.

 

“‘나는 친일한 일 없소’ 박흥식 씨 명예훼손 고소”

전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사장 겸 화신 사장 박흥식 씨를 친일파라 했다고 명예훼손죄로 박 씨가 고소를 제출하여 일반의 시청을 끌고 있다. 즉 7월 4일 흥한피복 쟁의단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박흥식을 타도하라”는 벽보를 붙였는데 동일 오후의 고소에 의하여 중부서에서는 쟁의단 대표 김동근 박정근 양씨를 명예훼손죄로 구금 문초 중이라 한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9일자)

 

해방 당시 ‘박흥식’ 하면 ‘친일파’의 대명사였다. 1942년 12월 천황을 알현한 후 <매일신보>에 “배알의 광영의 감읍”이란 글을 올리고 1년 후 같은 신문에 “배알 1주년 - 지성으로 봉공”이란 글을 올린 사람이 친일한 일 없다면 친일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제1호 체포자도 박흥식이었다.

 

힘 있는 자들에게도 명예훼손 고소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표절이라고 원저자가 주장했을 때 전여옥이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일을 보라. 표절 자체를 입증하는 데 비해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결국은 명예훼손 고소에 대한 판결을 통해 원저자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라도 쉽게 증명되었으니 전여옥의 고소가 삽질이란 평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박흥식은 당당히 고소했다. 그리고 경찰은 피고발자를 “구금 문초”하고 있었다. 아마 경찰이 그렇게 처리해 주리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박흥식이 그렇게 당당히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장택상이 생각난다.

 

박흥식이 1946년 2월 15일 횡령, 배임 등 혐의로 서울법원 검사국에 체포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된 일이 있는데, 수감된 지 세 시간 만에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석방되어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1946년 3월 2일자 일기) 그 때 개입한 것이 장택상이었다. 당시 해명으로는 군정청 국방국장 챔피니 대령이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에게 박흥식의 일을 묻기에 함께 대법원으로 갔다가 챔피니가 하지 사령관의 명령까지 들먹이며 석방을 요구해 풀어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알겠는가. 박흥식 풀어주려는 생각을 장택상이 가지고 챔피니를 구워삶아 대동하고 간 것인지. 당시 김용무 대법원장은 “영어마디나 하는 자의 중간 모략으로 군정을 모독시킨” 일이라고 한탄했다. 박흥식은 장택상의 ‘단골손님’이었던 것이다.

 

경찰의 사병화(私兵化)에 대한 책임은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나란히 있었다. 조병옥의 책임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조병옥은 나쁜 짓을 하더라도 호탕한 태도로 나름대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은 반면 장택상의 행동에는 진짜 치사하고 추잡한 것이 많았다. 김규식의 비서로 두 사람을 경계하는 입장에 있던 송남헌은 그 차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개인적으로 상대해보면 장택상은 무척 소심하다고 할 정도로 더 이상 인간적일 수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조병옥과 커다란 대조를 이루었는데, 조병옥은 선이 굵다고 할 정도로 대범한 행동을 하여 주위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김규식과 함께 한 길>(한울 펴냄) 89쪽)

 

조병옥 얘기 나온 김에 7월 5일 그가 발표한 담화문을 본다.

 

근래 전남북도에 점증 발생하는 우익 테러사건에 대하여 경무부에서는 이를 중대시하고 조사를 한 바 (...) 소위 좌익진영에 속한 자의 주모 주동으로 인한 집단적 폭동, 경찰 기타 관공서 및 경찰관 습격 살상 무기탈취 청사파괴와 각종 맹휴 등이 연발하여 의연 무법상태를 연출하고 또 장래 이 상태를 계속할 우려가 농후하여 건국과 일반 동포의 생명재산에 미치는 불안과 공포가 막대하므로 이 파괴적 행동에 유치 도발된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 방위적 입장에서 출발한 행동이라고 긍정되는 바인데 전남북도 사건에 대하여는 이미 그 진상을 발표하였거니와 금반 전남도사건에 대하여는 우익 측의 테러 이외에 우익진영과 경찰이 합동하여 테러행위에 이르렀다 함은 전연 무고한 사실이다.

 

그러나 일면 경찰 개개의 행동에 대하여는 유감되는 사례가 불무하다. (...) 그러므로 전기 우익 측 테러책임자에 대하여 취조 처단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 경찰관에 대하여는 복무규율에 비추어 엄중 처분하겠고 또 일반경찰관의 지도 감독을 일층 강화하여 그런 불상사가 재연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

 

바라건대 정치단체 또는 사회단체의 미명에 빙자하여 허위적 선동적 파괴행동으로 인한 무법상태의 연출을 즉시 중지하라. 다시 경고하노니 만일 이에 위반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는 테러 발생의 전 책임을 지우고 엄중 처단할 방침이다. 그리고 부연하는 바는 테러사건의 진상을 고의로 왜곡하여 주관적 판단을 가하고 선동적 언사를 통하여 민심을 현혹케 하고 치안을 문란케 하는 개인이나 단체 급 언론기관들에게 엄중 경고하노니 이런 불합리한 태도를 즉시 시정하여야 한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6일)

 

우익 테러는 인정하되 경찰 테러는 개개인의 예외적 행동으로 치부한다. 우익 테러도 좌익의 “파괴적 행동에 유치 도발된 민족적 애국단체의 공동 방위적 입장”으로 변명해 준다. 좌익에는 엄격하고 우익에는 물렁한 경찰의 자세는 7월 7일 종로 YMCA회관에서 열린 민주학생연맹(민주학련) 결성 행사 습격사건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종로 복판 일시 수라장-민주학련 결성 축하회에 석전(石戰)”

7일 오후 5시반경 시내 종로 청년회관에서 민주학련 결성 ‘축하의 밤’을 개최하여 순서를 진행 도중 돌연 5, 6명의 학생이 침입 회의를 방해하려 하였으나 경비원들의 경비태세가 엄격한 까닭에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여 명의 학생들이 준비하였던 자개돌로 돌팔매를 시작하여 청년회관 2층 전면의 유리창을 모두 파괴하여 수라장을 만들었다. (...) 급보를 받은 종로서에서는 사건 발생 약 20분 후 무장경관 29여 명이 출동하여 제지하는 일방 책임자 네 명을 검거하는 동시에 대회장을 검색한 후 축하회를 해산시킨 다음 대회 책임자 수 명을 호출하여 본서에 동행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9일)

 

느닷없는 돌팔매질로 난장판을 만든 것은 우익 학생들인데 행사를 해산시키고 책임자 몇을 연행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튿날 장택상의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7일 밤 YMCA에서 열린 민주학련의 ‘축하의 밤’에 테러를 감행한 불상사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경찰에서는 어떠한 조치를 하였는가?

(답) 경찰에서는 바로 경찰관을 출동시켜 이를 진압시킴과 아울러 테러를 한 책임자 4명을 체포하여 현재 종로서에서 취조 중이며 민주학련 측은 3백 명 집회허가를 가지고 2천 명이나 모였기로 그 책임으로 3명을 체포하였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9일)

 

YMCA 2층 강당이 2천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아니었다. 설령 2천 명이 들어갔더라도 집회 신고 인원과 차이가 있다 해서 행사를 중지시키고 책임자를 체포할 일이었을까? 우익 학생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았더라도 출동해서 행사를 중지시켰을까? 경찰은 “좌익 탄압, 우익 옹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내걸고 있었다. 서중석의 설명에 실감이 난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청년-학생단체의 두터운 보호막이었다. 장택상은 ‘공정한 수사’를 내세워 이들을 연행 수사하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좌익을 때려잡기 위한 표면상의 제스처였다. 조병옥은 청년-학생단체 소속원들이 지방에 내려가 좌익단체를 때려부술 때 ‘정치 감각’이 모자란 현지 경찰이 이들을 구속하면, 이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해내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며 석방하게 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333-334쪽)

 

1947년 7월의 서울에서 경찰이 어떤 모습의 존재였는지, 7월 19일의 여운형 암살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병준은 사건의 개요를 정리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몽양의 암살에는 우연치곤 너무 많은 경찰이 등장했고, 관계했다. (...) 몽양이 살해된 곳은 우연히 파출소에서 50보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암살범이 저격할 수 있을 만큼 몽양이 탄 차의 속력을 줄이게 만든 것도 파출소 앞에 서 있던 경찰차가 우연히 가로막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장 근처에선 우연히 고장난 경찰차를 수리하던 경관 3명이 있었다. 우연히 범행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범인 대신 범인을 추격하던 몽양의 경호원을 공범으로 체포했다. 범행현장 일대는 우연히 모든 전화가 불통되었지만, 몽양의 측근과 추종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이런 너무 많은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암살이 파출소 앞에서 버젓이 행해졌다는 사실만으로 암살범과 경찰의 연관관계를 단정지을 순 없다. 그러나 몇 달 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의 총격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적어도 범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범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대담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범인들이 경찰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드러난 바이지만, 경찰은 암살범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몽양 여운형 평전> 465-466쪽)

 

공공기구인 경찰을 사병화하는 데는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1946년 가을에 수사국장 최능진이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대항한 것, 1947년 봄에 특무과장 이만종이 임청 사건 처리에 불만을 갖고 사임한 뒤 진상을 폭로한 것이 그런 저항의 두드러진 사례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조병옥-장택상 체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체제에 대한 저항 요소는 꾸준히 도태되었다.

 

1947년 7월까지 경찰, 특히 서울의 경찰은 하나의 조직폭력단과 같은 조직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일제시대의 식민지경찰보다도 악질적인 범죄집단이었다. 당시 경찰에 몸담은 사람들이 모두 악질 범죄자였냐고? 그럴 리가 없다. 수천, 수만 명의 집단에 착한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조폭 영화를 보라. 수십 명 집단에도 착한 사람은 끼어 있지 않은가? 다만 두목의 뜻을 거스를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배겨낼 수 없는 조직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