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된 지 1년 만에 재개된 미소공위에 대해 당시 민정장관 안재홍은 “미국 측의 이른바 70퍼센트 유망시(有望視)한다는 예감”을 회고했다. 안재홍은 러치 군정장관과 헬믹 군정장관 대리를 업무상 마주치는 외에 브라운 미소공위 수석대표와 자주 만나고 있었는데, 그가 말한 “미국 측” 예감이란 브라운에게 들은 미국 대표단 분위기였을 것 같다.

 

5월 21일 재개에 이르는 과정을 보더라도 그 낙관적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 몰로토프 외상과 마셜 국무장관이 회담 성공을 향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6월 11일에 실현 가능성이 뚜렷한 로드맵이 나왔다. 이에 따라 6월 25일과 7월 1일 협의대상으로 참가를 신청한 정당-단체들과 미-소 대표단의 합동회의가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고, 7월 7일까지 정당-단체들의 의견서가 접수되었다.

 

그런데 7월로 접어들며 난항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6월 30일 예정되어 있던 이북 지역 정당-단체들과의 합동회의를 하루 늦추고 제36차 본회의를 연 데서 난기류가 처음 느껴진다. 그 후 열흘 동안 평양에서 두 차례, 서울에서 세 차례 본회의가 더 열렸지만 볼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7월 11일 브라운 대표의 발언이 나왔다.

 

“협의 대상을 위요한 소 주장과 미 반대”

[주 서울 AP 특파원 로버트 씨 제공 합동] 미소공위 미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공위진전에 관하여 신문기자에게 여좌히 말하였다.

(1) 소련 측은 과거 3주일에 걸쳐 공위협의에 참가코저 하는 남조선정당 사회단체 425단체 일부를 삭감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미 측은 반대하고 있다.

(2) 남조선에 있어서의 정치단체의 좌우 비율은 우측 5 대 좌측 3이며 북조선에서 공위와의 협의를 요청하고 있는 38단체는 전부 좌측인 것이다. 그러나 남북조선 전부를 통한 좌우의 비율은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다.

본관은 11일 쉬티코프 대장과 회담하고 공동성명서 발표에 관하여 심의할 예정이고 이 공동성명에서 소련 측의 주장과 미 측의 반대를 명확히 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12일)

 

제2항의 “좌우 비율”이란 말이 이상하다. 참가를 신청하는 정당-단체들이 좌우를 구분해서 표시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미국 측에서 주관적으로 구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너무 치우치는 문제가 있다면 양측이 조용히 의논해서 완화시킬 방책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비율을 명확하게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국 측이 우익의 참가 범위가 좌익보다 적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속셈을 보여주는 말이다.

 

브라운 대표는 7월 16일 공보부 특별발표를 통해 양측 대표단이 합의하지 못한 내용을 공개했다. “소련 측의 주장과 미 측의 반대”를 명확히 할 공동성명서 작성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7월 17일자 <자유신문>에는 이 방대한 발표가 네 개 부분으로 나뉘어 실렸다. 먼저 전체 제목 “공위 협의 대상의 불합의 요점 - 미 대표 발표” 아래 전문(前文)이 실려 있다.

 

미소공위 제43차 본회의는 1947년 7월 14일 하오 1시반부터 조선 서울 덕수궁에서 브라운 소장 사회 하에 개회되었다. 공위는 제33차 본회의부터 토의를 시작하여 제42차 본회의에 이르기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였는데 최초협의에 초청할 정당 및 사회단체 명부에 관하여 계속 토의한 결과 불합의의 원인인 근본적 논의점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반탁단체는 제외 - 지방적인 기관 등 불인”이란 제목 아래 “소 측 대표의 의견”과 “소 측 대표 논의점의 특징”이 실려 있다.

 

“소 측 대표의 의견”

다음의 범주에 소속되는 정당 및 사회단체는 최초 협의대상 명부에서 제외할 것 특히

(1) 사회단체로서 규정되지 않은 단체

(2) 지방 및 기타 순전히 1지역의 단체

(3) 막부협정을 전적으로 지지할 의도가 없는 단체 특히 반탁위원회 및 유사단체의 회원

 

“소 측 대표 논의점의 특징”

(1) 상공회의소 의사회 불교연구원 계리사협회 같은 공업적 상업적 및 생산자단체 기타 정치 경제를 연구하고저 조직된 단체는 막부협정에 규정된 사회적인 숙어로 사용된 사회단체로 인정할 수 없다.

(2) 중앙에 사무소가 없는 지방정당 및 단체는 협의의 자격이 없음.

(3) 선언서에 서명하고 협의신청을 하여 막부협정 지지에 동의한 정당 혹은 단체의 성의도 불구하고 만약 이러한 정당 혹은 단체가 계속 반탁위원회 혹은 유사단체에 가입하고 있는 경우에는 소 측 대표는 거부함. 이러한 정당 혹은 단체라도 다만 그가 공적으로 반탁위원회 혹은 유사단체에서 탈퇴만 하면 협의대책이 될 수 있음.

(4) 공동결의에 발표된 대로 외상회의의 협정에 의하여 1정당이 협의자격이 있다는 것은 결코 그 정당이 공위와의 협의에 꼭 가입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5) 1정당은 협의단체 명부에 가입하기 위하여는 양측 대표가 모두 승인하여야 함.

 

그리고 원고지 8매 길이로 “미국 대표의 의견”과 “미 측 대표 논의점의 특징”이 붙어 있고, 결론이라 할 내용이 “근본적 상이점 해결 미소공위 속의(續議) 중 - 협의 제외는 상호협정 외 불능”이란 제목의 박스 안에 들어 있다.

 

결론부의 요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양쪽 대표단 중 어느 쪽도 신청한 정당-단체에 대해 거부권(당시 기사에서는 ‘부인권(否認權)’이라 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소공위나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구체적 행위가 결정적으로 확인되기 전에는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7월 21일 이에 대항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회견에서 “공위에 참가를 청원한 단체를 제외하자는 것은 소련이 부인권을 행사하려 함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 “나는 소미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견해를 말했을 뿐이지 부인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거부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고 명언한 이상 브라운의 7월 16일 성명의 결론 중 하나의 축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의 축인 반탁 문제에 대해서도 브라운의 주장은 석연치 않다. 7월 16일 성명의 “미 측 대표 논의점의 특징” 중 이에 관계된 내용은 이런 것이다.

 

반탁위원회 및 유사단체에 가입한 정당도 만약 그들이 협의청원을 하고 요구된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마샬-몰로토프 협정에 의하여 당연히 최초협의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음. 만약 그들이 공위가 상호협정에 의하여 외상회의에서 합의를 본 협정 제3항(즉 공위와의 협의에 초청을 받은 개인 정당 및 사회단체는 공동성명 제5호에 포함된 선언서에 서명 후에는 공위의 사업 또는 연합국 혹은 막부협정 이행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선동하거나 교사하지 않아야 된다)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고발 후 제외되지 않거나 또는 제외될 시까지는 자격이 있다. 공동성명 제5호에 포함된 선언서에 서명 후 공위의 업무 또는 연합국 혹은 막부협정 이행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선동 또는 교사하는 개인 정당 및 사회단체는 장차의 공위와의 협의에서 제외되어야 함.

 

제5호 공동성명에서 규정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서에 서명만 하면 협의대상 자격이 되고, 그 후 이에 어긋나는 언행으로 고발되어 부적격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이 자격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 측 주장은 반탁투쟁위원회(반탁투위)에 가입해있는 상태 자체가 실격 요건이라는 것이었다. 7월 21일 소련 측 성명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막부결정을 반대하여 투쟁하려고 특별 조직된 정당 단체 또는 모스크바결정을 반대하여 투쟁하려고 그 단체에 가입한 정당 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소측 대표는 제의했으며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제 정당 사회단체를 협의에 가입시키지 말 것을 소측 대표는 특별히 주장했다. 공위가 재개된 이후 또는 협의규정에 관한 공위결정이 발표 이후에도 반탁투쟁위원회는 공위와 막부결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중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조선민주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사업을 파괴하려고 그 투쟁을 강화했다는 것을 소측 대표는 지적했다. 반탁위원회에 가입한 제 정당 또는 사회단체는 반탁위원회에서 탈퇴함을 성명하기 전까지는 반탁위원회에 대한 책임을 계속 부담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7년 7월 23일)

 

1945년 말 결성된 반탁투위는 그 동안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해체되지 않고 있다가 1947년 2월부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특히 5월 들어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활동이 많아졌으며, 6월 23일의 반탁시위에 앞장섰다. 반탁투위에 가맹한 수십 개 정당-단체가 탈퇴하지 않을 경우 반탁투위의 반탁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소련 측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6월 23일 시위를 다시 돌아본다. 시위대가 대표단 차량에 투석했다는 소련 측 주장을 조병옥 경무부장이 부인한 것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리고 설령 투석까지는 없었다 하더라도 시위가 회담에 지장을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반탁투위는 시위를 공공연히 지지했고 시위로 인해 체포된 사람들도 대부분 반탁투위 간부들이었다. 한민당이 이 시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나려면 반탁투위 탈퇴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 없다.

 

반탁 관계와 거부권, 두 가지 문제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단체’의 정의 문제에서도 미국 측 주장이 어색해 보인다. 소련 측은 조선인을 대표하는 성격이 약한 단체들, 예컨대 전문직종 단체나 특정지역 단체는 제외하자고 주장했는데, 미국 측은 7월 16일 성명에서 “막부협정에는 ‘사회단체’라는 숙어에 하등 해석이 없음”, “지방 및 기타 순전히 1지역의 지방단체와의 협의는 막부협정, 마샬-몰로토프 협정 혹은 공동결의의 여하한 조건에도 금지되어 있지 않음”이라고 일축했다.

 

손님이 너무 적으면 자격을 너무 엄히 따지지 말고 오는 대로 받아주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북 지역에서 38개 단체가, 그리고 이남 지역에서 425개 단체가 참가를 신청했다. 효과적인 토론이 불가능한 숫자다. 그리고 7월 21일 소련 측 성명에서 “용산구자동차협회, 안암청년단, 여수기독청년회” 등 예시한 것을 보면 정말 저런 단체들까지 다 입장시켜야 미소공위에서 조선인의 입장이 제대로 대변될 수 있는 것일까, 한숨이 나온다.

 

협의단체 자격을 둘러싼 논쟁에서 미국 측 입장이 너무나 억지스럽다.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조선 안건을 유엔에 가져갈 방침을 미국이 이 시점에서 이미 세우고 있었던 것일까? 6월 중순까지도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이던 미국 대표단의 태도가 몇 주일 사이에 이렇게 표변한 까닭이 어디 있었을까? 앞으로 더 면밀히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