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드마이어 중장이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과 조선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7월 12일에 나왔다.

 

[워싱턴 12일발 UP 조선]트루만 대통령은 전 중국전역 미군사령관 엘버트 C. 웨드마이어 중장을 대통령 특사로서 긴급 사실조사 사명을 주어 정치 경제 고문을 대동시켜 중국과 조선에 급거 파견하였는데 이는 마샬계획을 극동에 채용하는 제1착 조치로 간주된다. 이 결정은 또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정책이 공산군과의 투쟁에 있어 미국의 장개석 지지를 요청하는 미국 내 및 중국에 있어서의 강력한 압력에 순응하여 미국의 대중정책이 불원간 변경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별사절에 웨드마이어를 기용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마샬과 같이 그도 군인이다. 그는 사실에 있어 대통령에 대하여서 보다도 마샬 국무장관에 보고할 것이다. 그는 전쟁말기에 장 주석이 인면중(印緬中, 인도-버마-중국) 미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에 불만을 표명하였을 때 그와 교대하여 중국전역 미군사령관이 되었으며 국민정부에 동정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웨 씨는 또는 당년 70세의 스튜워트 씨 후임으로 주중미대사에 임명되리라는 설도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는 마샬 씨가 중국에 갔을 때와 같이 대통령특사로 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마샬 씨가 특히 중국내전을 조정하라는 훈령을 띄우고 화평사절로서 중국에 간데 대하여 그는 중국과 조선의 전반적 정세를 사찰하기 위하여 파견된 것이다. 그의 사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상금 발표되지 않았으나 그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1) 중국에 관하여

가. 마샬계획 기타 방법에 의하여 중국에 경제적 안정을 실현케 하는 데는 여하한 조치가 필요한가를 결정할 것. 헤리만 상무장관은 구주 향발 전에 마샬계획을 아세아에 원조할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나. 미국은 중국내전에 대한 중립을 포기하고 장 정권에 대하여 모든 도의적 물질적 지원을 공여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

 

(2) 조선 문제

가.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미소간 교섭의 정돈상태를 분석하고 이 상태가 마샬 장관이 막부회의 당시 시사한 바와 같이 남조선 미국점령지대에 대한 일방적 계획추진이 필요한 정도로 중대한 것인가를 발견할 것.

나. 조선의 군정을 국무성에 이관하여 민정을 실시케 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실행가능한가를 발견할 것. 대 조선 2억 특별원조계획은 상금 고려중이나 당분간 보류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947년 7월 13일)

 

마셜은 국무장관 취임 직전 1945년 말부터 1947년 초까지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을 포괄하는 연립정부를 세움으로써 내전을 막는 일에 노력했다. 이 노력의 실패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지만 장개석의 비협조가 결정적이었다. 장개석은 연립정부를 회피하더라도 군사력으로 공산당을 억누를 수 있고, 미국에게는 결국 자신을 지원하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고 믿었다.

 

1947년 3월 공산당의 오랜 근거지 연안(延安)을 함락시킴으로써 장개석의 승리가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산군은 연안을 전략적으로 포기하고 실력을 정비해 6월 하순부터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6월 30일에는 황하를 건너 전선을 크게 확장했다. 본격적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이 시점에서 웨드마이어 특사가 파견된 것이다. 트루먼과 마셜은 장개석에게 지나치게 휘둘리는 데 염증을 내고 있었다. 장개석 군대에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쏟아 붓고 있었지만 장개석은 원조의 효과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중국에 관계된 미국 관리와 군인들 중 유별난 반공주의자 외에는 모두 장개석에게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위 기사 내용처럼 웨드마이어는 그중 장개석 정권과 관계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 시점에 그를 보낸 데는 장개석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의 뜻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웨드마이어의 임무에 조선이 중국과 함께 들어있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미국의 극동정책 안에서 대 중국 정책과 대 조선 정책이 연계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조치로 관측되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7월 15일) 중국에서 국민당 입장이 약화되는 데 따라 조선에 대한 미국 정책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엊그제 일기에서 미소공위 미국 대표단의 태도가 7월 들어 결렬을 불사하는 쪽으로 표변한 사실을 지적했다. 웨드마이어 특사 파견을 보며 중국 정세 변화가 이 태도 변화에 작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 국무성의 입장 변화 조짐은 7월 16일 하지와 이승만의 회동에서도 느껴진다. 두 사람 사이가 1947년 들어 극히 험악해진 사실에 비추어 이 회동에 뭔가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험악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이승만의 7월 3일 성명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해방이후로 작년 겨울까지 우리가 노력한 것은 하지중장의 정책을 절대 지지해서 한미 협동으로 정부를 조직하여 우리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 중장은 우리 협의를 얻어 시험하여 본 것이 5·6가지의 계획인데 다 실패한 것은 공산지도자들의 협의를 얻지 못한 까닭이요, 이것을 얻지 못할 동안까지는 무슨 계획이나 다 무효로 만들자는 것이 하지 중장의 유일한 정책이다.

우리가 이 정책이 성공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협조한 것은 하지 중장이 필경 가능성 없는 것을 파악하고 새 정책을 쓰기를 바라고 기다려 온 것이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 와서는 하지 중장이 그 계획을 고칠 가망이 없는 것을 확실히 인식한 나로서는 하지 중장에게 우리가 더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제부터는 김구 씨와 나는 우리의 자유보조를 취하게 된 것이다. (...)

우리가 하지 중장과 협동이 못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이며 개인의 친분이나 정의(情誼)에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정치상 노선에 차이가 있을 뿐이니 언제든지 하지 중장이 정책을 변경하여 우리가 참아온 주장을 지지해 주기까지는 다른 도리가 없는 터이다. 하지 중장의 정책은 미국 민중이나 정부에서 행하는 바와 위반이므로 우리는 미국의 주장을 우리도 주장해서 한미 동일한 민의를 행하려는 것뿐이니 일반 동포는 이를 철저히 인식하고 언론이나 행동에 일절 악감정을 표시하지 말고 오직 정치상 우리 주장하는 바만 가지고 정당히 매진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7월 4일)

 

지난 1월 미국 체류 중이던 이승만이 하지를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인 이래 하지 역시 이승만에 대해 극도의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미소공위 재개에 임해 이승만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임에 따라 이 적대감이 더욱 강해져 6월 28일에는 이승만에게 테러 행위를 그만두라는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7월 16일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이었을까?

 

미소공위가 재개 이래 처음 보는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한편 이승만을 중심한 민족진영에서는 주여에 걸쳐 민족대표자대회를 열고 있어서 해방 후 8·15기념일을 앞둔 작금 정계의 동향이 미묘한 차제 이승만은 16일 오후 8시부터 하지 중장 관저에서 동 중장과 미소공위위원 제코프스와 장시간에 걸쳐 중요회담이 있었다.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 회담은 마샬 국무장관으로부터 제코프스에게 온 모종 장문전보에 의하여 제씨의 알선으로 회동하였다는데 동 회의에 삼자가 다 같이 조선 문제에 대하여 협조하기를 서로 요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박사는 17일 밤에 랭든 부부와 제코프스를 돈암장에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었다고 한다.

 

◊ 이 박사 담

이 박사는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코프스 씨 알선으로 16일 밤 하지중장 관저에서 최근 마샬 국무장관이 보낸 친전을 중심으로 의견교환을 하였는데 아직 자세한 내용은 발표할 수 없다.” (<동아일보> 1947년 7월 19일)

 

제이콥스는 재개된 미소공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6월 16일 교체되어 입국한 대표였다. 주둔군사령관 정치고문과 미 국무성 사절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6월 17일) 총영사를 겸하고 있던 랜드 대표를 대신해서 그 시점에 그가 새로 파견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재개된 미소공위의 생산적 분위기는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6월 16일에 제이콥스가 대표로 교체되었고, 한 달 후에는 그가 하지와 이승만의 회동을 주선하고 있었다. 한 달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 6월 23일에 이승만과 김구를 받든다는 반탁시위가 있었고, 그 처리 과정에서 경찰은 김구 세력을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다. 그리고 미국 대표단은 협의대상 선정에 무리한 기준을 주장하면서 합의되지 못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7월 16일 밤 하지와 이승만이 의견교환을 했다는 마셜의 친전은 하지가 받은 것이었을 텐데,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승만이 7월 3일 성명서에서 말한 것처럼 “하지 중장이 정책을 변경하여 우리가 참아온 주장을 지지해” 주도록 하라는 내용이었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중에 분명한 것은 마셜 국무장관의 미소공위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 하지 사령관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승만과 밤늦게 뭔가를 의논할 필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