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과 관계없이 마음에 걸려있던 문제 하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정판사사건의 실상에 관한 생각이다.
1946년 5월에 터진 정판사사건은 미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신전술’을 채택했고, 공산당의 뒤를 이은 남로당도 지하활동에 치중하게 된다. 이남에서 좌익과 우익 간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깨뜨려버린 사건이었다.
공산당 핵심간부 몇 사람이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복역 중 전쟁 발발 때 학살당한 사실을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사법살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이 사건의 진행을 더듬으며 사건을 미군정이 조작한 것으로 보이는 ‘심증’을 몇 가지 지적했다. 지금도 더 확고한 ‘증거’를 찾을 희망은 없지만, 여러 정황을 아울러 한 차례 정리해 둔다.
일본 항복에서 미군 진주 사이의 한 달 안 되는 기간 동안 총독부는 약 30억 원의 조선은행권을 찍었다. 당시 통화량의 절반이 넘는 거액이다. 최고액권인 백원권으로 찍어도 정상적 인쇄방법으로 찍어낼 수 없어서 몇 개 인쇄소에 원판을 보내 함께 찍게 했다. 그중 하나가 지카자와(近澤)빌딩에 있는 지카자와인쇄소였는데, 해방 후 이 4층 건물을 조선공산당이 쓰면서 인쇄소에는 ‘조선정판사’란 간판을 달아 활용하게 되었다.
1946년 5월 4일 뚝섬의 수영사라는 조그만 인쇄소에서 위폐단이 적발되었다. 범인 중 김창선이란 자가 정판사 직원이었고, 원판을 그가 정판사에서 빼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5월 8일에 정판사를 수색했고, 5월 15일에 군정청 공보부에서 ‘정판사사건’을 공표했다. 고급간부 몇 사람을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대량의 위폐를 인쇄,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액수는 며칠마다 액수가 두어 배씩 늘어나 1천8백만 원에 이르렀다.
김창선 한 사람이 원판을 다른 위폐단에 가져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뚝섬의 인쇄소 시설로는 작업이 안 되어 정판사에서 작업을 시도하면서 정판사의 다른 직원 몇을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이 사실이 간부들에게 발각되었으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우물쩍거리고 있었을 가능성까지도 희박하나마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위폐의 제작과 유통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완전히 조작된 것이거나 엄청나게 부풀린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조재천과 함께 기소를 맡은 김홍섭 검사의 태도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김홍섭” 조를 옮겨놓는다.
1915∼1965. 법조인. 전라북도 김제 출생.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시작, 1939년에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귀국 후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자 서울지검검사로 임용되어,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담당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 해 9월 검사직에 대한 회의를 느껴 사임하고 뚝섬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 뒤 당시의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의 간청으로 법조계에 복귀, 서울지방법원판사·고등법원판사·지방법원장·대법원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53년 9월 가족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청렴강직함과 구도자적 생활은 법조계와 신앙계의 모범이 되었으며, 죄수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법의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사람’, ‘사도법관(使徒法官)’ 등의 칭호를 얻었다.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인 근거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 중국의 오경웅(吳經熊), 일본의 다나카(田中)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법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교회사적에 대한 관심도 깊어 전주 치명자산에 이순이(李順伊, 누갈다)의 순교기념비를 자비로 세우기도 하였다.
1965년 3월 16일 폐암으로 죽었고, 1972년에 율곡법률문화상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명≫·≪창세기초≫·≪무상을 넘어서≫ 등이 있다.
둘째 문단에서 1946년 9월 검사를 그만뒀다고 한 것은 착오다. 9월에는 사표를 냈다가 철회했다.(1946년 10월 17일자 일기) 미국인 장교의 압력 행사 시도에 대한 항의로 사표를 냈는데, 검사국 전체가 그에 동조해 사과를 받아냈다. 10월 21일 정판사사건 구형 때까지는 직무를 수행했고, 얼마 후 검사를 그만둔 것 같은데 정확한 시점은 확인하지 못했다.
김홍섭은 양심적 법조인으로 널리 존경받은 사람이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56년 1월 이승만의 심복 김창룡을 암살한 허태영 대령이 이듬해 9월 사형당할 때까지 옥중 교유하며 가톨릭 신앙으로 끌어들인 일이다. 두 사람 사이의 편지를 1957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판사와 사형수” 기사는 내용도 감동적이거니와, 서슬 퍼런 이승만 정권 하에서 현직 판사가 그렇게 소신을 드러낸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인물이 정판사사건을 유죄로 판단하여 기소를 행했다면 무슨 근거가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생각되는 것이다. 묘한 일이 하나 있다. 11월 28일 언도가 있은 후 좌익에서 양원일 판사와 조재천 검사 등 관계자들을 비난하는 성명이 쏟아져 나왔는데 김홍섭의 이름은 거기 빠져 있었다. 당시 좌익에서 자기네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때 아무나 붙잡고 무슨 욕이라도 해대던 풍조에 비춰보면 김홍섭의 입장을 좌익에서도 수긍했던 모양이다.
10월 21일 구형 공판에서 김홍섭은 논고의 서론부만 제기하고 본론과 구형은 조재천이 맡았다. 김홍섭은 유죄 사실만을 확인하고 양형에는 관계하지 않기로 선을 그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의자들이 검찰에서 한 자백을 김홍섭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피의자들은 경찰과 검찰에서 유죄를 시인했다가 법정에서 번복했다. 법정투쟁의 전술이었다. 그들 자신의 진술로도 고문은 경찰에서만 받았고, 검찰에 송치된 후에는 받지 않았다. 경찰에서 강요당한 허위진술을 검찰 조사 때 바꾸지 않고 법정에서 방청객과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뒤집음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피의자들의 고문 주장을 김홍섭은 마음속으로 믿었을 것 같다. 그러나 피의자들은 기소가 끝난 후 법정에 가서야 고문을 주장했다. 그들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 사실을 주장했다면 김홍섭은 검사로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검사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사표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피의자들은 그런 역할을 그가 맡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받아낸 진술 내용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법정에서 판사를 상대로 고문 사실을 주장했으니 그 확인 책임은 판사에게 있는 것이었고, 판사는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단계에서는 검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그가 곧 검사를 그만둔 것이 이 일에서 검사 역할의 한계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검사 직책을 지키고 있는 한 자신이 정상적 방법으로 받아낸 진술의 효과를 스스로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다가 아직도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곽노현 사건의 1심 재판부(주심판사 김형두)가 생각난다. 이 재판부는 재판 과정을 통해 피고에게 불리한 쪽으로 떠돌던 많은 의혹을 해소했다. 사실 확인에서는 피고에게 더 이상 고마울 수 없는 판사 노릇을 했다. 그런데 양형에서는 매우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다. 그 양형으로 인해 한쪽에서는 극렬한 비난을 받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사법제도의 성실한 담당자로서 많은 고민을 재판부가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곽노현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그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 재판 결과를 바라본다. 나는 재판부의 입장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곽노현의 2억원 증여가 선거제도에 대한 직접 위협이 없는 행위라고 재판부는 판단한 것 같다. 200여 시간을 들여 사실심리에 공을 들인 것은 그 판단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선거 당시 곽노현이 금품제공을 조건으로 한 후보사퇴에 견결히 반대했고 몇몇 사람 사이에 오고간 언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선거제도에 대한 직접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징역형을 내리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재판부가 이례적 수준의 노력을 사실심리에 기울인 것은 피고가 부당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유죄판결과 함께 무거운 벌금형을 내렸다.
법률과 사법에 관한 깊은 지식을 갖지 않은 나 같은 일반인에게 이 과정과 결과가 합쳐져 신뢰감을 준다. 부당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재판부가 최선을 다하고도 유죄판결을 내렸다면 적어도 현행법에 저촉된 바가 없지는 않으리라는 신뢰감이다. 범죄 아닌 행위를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 문제가 현행법에 있다면 그것은 전문가들이 그 사이에서 따질 일이다.
유죄라 하더라도 양형에 또 생각할 문제가 있다. 일반인의 눈에 3천만원은 무거운 벌금이다. 그런데 ‘선의의 부조’로 2억원을 쾌척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큰 액수가 아닐 수도 있다. 이 액수가 당선무효 기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 그 기준에 맞춰 양형을 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된 행위가 실정법상 기술적으로는 유죄라 하더라도 사회질서를 해치기는커녕 보탬이 되는 훌륭한 행위이며, 오히려 이에 대한 처벌이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양형을 최소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 ‘선의의 부조’가 그런 훌륭한 행위인가? 재판부가 그렇게 보지 않은 것에 나는 동의한다.
이 사회에는 금전적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 많이 있고, 2억원이면 많은 사람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돈이다. 그런데 하필 박아무개에게 그 돈을 준 데는 ‘대가성’이 존재하기 쉽다. 최소한 시끄럽게 할 일을 조용히 해주는 정도의 ‘대가’는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증여 행위가 밝혀지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선거 뒤에든 박아무개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곽노현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금전을 쉽게 요구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사회질서를 해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지금 우리 사법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장 이 사건의 항소심에서 검찰 주장을 대폭 받아들여 징역형을 선고한 것도 일반인의 신뢰를 받기 힘든 판결이다. 단 세 차례 공판을 통해 1심 판결을 크게 바꿨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1심 판결이 양쪽 공격을 받은 반면 항소심 판결은 한 쪽의 지지라도 받는 데 목적을 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진영 논리가 극성스러운 이 사회에서 1심의 김형두 재판부가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데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쏟아지는 십자포화를 보며, 66년 전 진짜 억울한 판결을 받은 정판사사건 피고들이 김홍섭 검사의 역할을 양해하던 금도를 그리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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