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이름은 걸어놓았지만 엄격한 의미의 반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는 사실을 밝히는 책이 아니라 의견을 내놓은 책이고, 장정일 선생은 서평을 빙자해서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니 나도 반론을 빙자해서 독자들, 특히 장 선생의 서평을 읽어본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견을 내놓는다. 내 의견이 옳고 그의 의견이 틀렸다는 주장은 할 생각 없다. 내 의견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더 많기 바랄 뿐이다.
우선 같은 사안에 대해 분명히 다른 의견이 나온 것들을 짚어본다. 장 선생의 의견만 표시했다.
(1)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국민’을 만들었는데, 조선에는 그런 게 없었다.
(2) 이토는 조선에 대해 확고한 야욕을 가진 자로서 ‘온건파’라 할 수 없다.
(3) 보호국 신세가 식민지 신세보다 나을 게 없었다.
보호국과 식민지의 비교가 나오면서는 보호국이 나을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망해도 험하게 망하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무시무시한 얘기를 꺼낸다. 이 부분은 내 책 내용과 별 관계없는 상상력의 영역인데, “서울-부산에 핵폭탄!” 제목이 여기서 나온 것은 편집을 맡은 K 기자의 취향 같다. 위 세 가지 사안에 대한 내 보충 의견을 낸 다음 상상력의 영역에도 잠깐 동참하겠다.
(1) 전통시대에나 지금이나 ‘국가의식’(국가체제에 대한 참여의식) 수준은 신분과 취향에 따라 큰 편차가 있다. 국가가 국가 노릇 제대로 하면 국가의식을 공유하는 범위는 넓어지게 되어 있다. 임진왜란 무렵 조선사회의 국가의식 수준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국가의식 수준보다 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 기능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리 ‘국민학교’를 다녀도 냉소와 무관심에 빠지기 쉽다.
마침 책상머리에 있는 책 <이산 정조대왕>(이상각 지음, 추수밭 펴냄)을 보니 을묘 원행(1795)으로 시작한다. 그 장 제목이 “제왕의 위세를 보여주리라”다. 백성에게 임금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은 왕조의 주요 사업이었다. 하층민까지도 국가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 원만한 국가 운영에 유리한 일이라는 사실을 근대 이전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
메이지천황의 순행(巡幸)은 이와 다른 맥락에서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수백 년 동안 통치 권력이 천황의 조정 아닌 막부에 있었다. 순행은 중국에서도 왕조 출범을 백성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옛날부터 행하던 것이다. 메이지 순행은 근대국가 건설과 관계없이 정권 교체 사실을 인민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무단적(武斷的) 권위로 군림하던 막부 통치와 다른 형태의 통치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선전하는 의미도 있었다.
장 선생은 성호 이익의 글을 인용해서 정치 참여 계층의 확장이 조선 후기의 시대적 과제였던 것처럼 말하는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성호가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자 한 것은 중인, 평민까지 정치 참여를 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권력 사유화로 인해 전통적 참여 계층까지 소외되고 있던 문제가 성호에게 초미의 걱정거리였다. 산업구조를 위시해 사회의 모든 부문이 ‘근대화’된 뒤에는 참여 계층의 근본적 확장이 필요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조선 후기의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사대부만의 리그”라도 회복시켜 놓아야 다음 단계 변화에 대응할 주체가 확립된다는 데 성호의 희망이 있었다.
(2) 먼저 고백부터. 이토 히로부미 죽을 때의 ‘바가야로 설’이 조작이란 사실을 “지은이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 선생은 감싸 주었는데, 난 사실 몰랐다. 지금도 가르쳐주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 확인할 생각도 없다. 조작된 말이더라도 그런 말이 통용될 만한 맥락이 있었다는 사실로 만족할 뿐이다.
그 맥락이란 당시 일본 정계에서 이토가 조선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와 제일 먼저 비교되었겠는가? 이토에 버금가는 거물은 군부의 수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세계정세를 잘 아는 이토는 합리적 국가발전책 마련에 힘쓴 반면 야마가타는 군부 입장에 유리한 대외정책을 선호했다.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는 두 사람이 함께 가졌다 하더라도, 야마가타는 더 많은 군대를 내보내는 방법을 원했고, 이토는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 했다.
이토가 동양평화론을 내놓은 것이 러일전쟁을 앞두고 조선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는 대목 하나는 장 선생 의견을 분명히 반박하고 싶다.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수십 년 후 ‘대동아공영권’ 주장에 이르기까지 일본 대외정책의 이론적 초석이 되는 것이다. 당시 조선 지배집단의 협조를 얻어내는 데 그런 그럴싸한 이론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약간의 무력시위와 이권 제공으로 충분했다.
조선을 갖고 싶은 ‘야욕’은 당시 일본인들이 모두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그냥 잡아먹으려는 야욕과 키워서 부려먹으려는 야욕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이토는 부려먹는 편이 잡아먹는 편보다 일본의 국익에 더 맞다고 생각해서 병합 아닌 보호국화를 원한 것이었다.
장 선생은 <질문하는 한국사>(서해문집 펴냄)에 실린 현광호의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나"에 “이토의 진면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고 한다. 그 대목을 찾아봤다.
이토는 을사조약을 강요하기 위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결국 그는 고종과 정부 대신을 협박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의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 이토의 동양 평화론이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안중근은 동양 삼국의 독립과 단결을 통해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해야 동양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신념을 품었다. 문제는 이토가 이런 생각을 한국 국민에게 밝히지 않은 데 있었다. 그는 러시아와 벌이는 전쟁에 한국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던지라 속내를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안중근이 이토의 포살을 다짐한 것은 이와 같은 이토의 의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168쪽)
밑줄 친 문장을 보라. 조선 병합에 대한 이토의 신념을 현광호가 판단한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앞에서도 현광호는 “이토의 한일 제휴론은 평등한 나라 간 연대를 뜻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점진적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편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을사조약을 맺고 통감으로 부임할 때까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보호국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는, 병합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은 없었다는 내 의견은 나름대로 상당한 범위의 연구성과를 참조한 결과이며, 현광호의 위 글을 보고 바뀌지 않았다. [글 끝에 관계 내용 덧붙임.]
조선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놈은 모두 나쁜 놈이고, 잡아먹겠다는 놈이나 부려먹겠다는 놈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흑백론도 하나의 의견이다. 그런데 그 차이를 분석하면 일어났던 일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 당시에도 이 차이를 잘 음미할 경우 보다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폭이 더 넓었을 것이다.
예컨대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를 불러온 이 사건으로 인해 이토의 온건책을 위한 여건이 악화되었다. 고종의 밀사 파견은 독립의 회복이 아니라 황제권의 회복에 목적을 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로 인해 민족의 명운에 얼마나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헤아리지 않은 조치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때도 이토는 속으로 “바가야로!” 했을 것이다.
(3) 보호국과 식민지는 다른 것이다.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인데, 여기서는 내가 요즘 중시하는 한 가지 측면만을 얘기하겠다. 인적 자원의 측면이다.
1945년 해방 당시 약 백만 명의 일본인이 조선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중 상당수가 통치 관련 업무를 맡고 있었다. 공무원, 경찰은 물론이고 공기업과 대기업의 간부층 구성에서 일본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지배구조는 철저히 일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제국주의시대 세계 도처의 식민지 가운데 지배구조 장악이 이렇게 철저한 곳은 따로 없었다. 맨 꼭대기는 지배국 국민이 맡더라도 상당한 높이까지의 하부구조는 현지인이 맡았다. 해방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이 인구의 3%가 안 되면서 관공리의 44%를 점한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20세기 초의 일반적 식민지배는 노동력보다 자연자원의 착취에 중점을 두는 것인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이례적으로 노동력 착취가 우선이었다. 조선 농업의 ‘합리적 근대화’를 통해 농업 인구의 상당 부분을 농지에서 유리시켜 유휴노동력으로 만들었다. 그중 약 5백만이 만주와 일본 등지로 유출되어 ‘대동아제국’ 건설에 이용되었다.
식민지배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주민의 소극적인 동의라도 필요하다. 그 동의에 앞장서는 것이 ‘협력자’ 계층이다.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지배자는 산업 발전을 통한 물질적 이익과 함께 우월한 신분을 제공한다. 다수에게 채찍을, 소수에게 당근을 쓰는 것이 식민지배의 요체다.
그런데 노동력 착취에 중점을 둔 일본의 조선 지배에는 당근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농업 근대화에서 파생되는 이익의 일부를 지주층에 남겨준 것이 조선인이 얻은 당근의 거의 전부였다. 방직, 광산, 유통 등 산업분야의 이익은 미미했다. 신분 제공은 거의 없었다. 총독부 국장이나 도지사 자리에 앉은 조선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공기업이나 큰 공장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교육, 특히 고등교육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생각해 보라. 하급 관리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가 고작이었고, 유일한 정규대학인 경성제대는 그 존속기간을 통해 겨우 3백여 명의 조선인 졸업생을 배출했을 뿐이다. 교육의 수요와 공급 사이에 이렇게 격차가 컸던 식민지는 20세기 세계에 조선뿐이었다.
십여 년간 일본의 보호국으로 있었던 만주국과 비교해 보자. 조선보다 인구가 조금 더 많고 기존 문화수준으로 보아 고등교육 수요는 조선보다 작았으리라고 생각되는 만주에 200개 중등학교, 140개 사범학교, 그리고 50개 전문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Wikipedia> "Manchukuo" 조. 조선에는 해방 때 155개 중등학교와 11개 전문학교가 존재했다.) 정부를 위시해 모든 기관의 중요한 자리들을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와 사회의 경영 경험을 가진 계층이 조선보다 훨씬 두텁게 형성되었다.
일본 지배에 협력한 자들은 도덕성을 버린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고 경영 능력을 키웠더라도 독립한 민족국가에서 어차피 쓸 수 없는 자들이었다고 말할 텐가? 배부른 소리다. 과장급 이하 하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해방 후 벼락출세로 국가와 대기업 경영을 맡으면서 어떤 폐단을 일으켰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능력은 차치하고 자세만 생각해 보자. 고급 경영의 역량과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 사회의 독자적 운영에 자신감이 없었다. 과도한 외세 의존 경향이 여기에서 나왔다.
식민지시대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 지조를 지키고 있다가 해방 후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수가 너무 적었던 것이 문제였다. 20세기 전반기를 통해 ‘근대화’는 민족 독립과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과제였다. 해방 후 독립 건국 실패의 중요한 이유 하나가 근대화 준비의 미흡함에 있었고, 일본 식민지배의 ‘합방’ 성격에 그 원인이 있었다. 민족 발전의 길이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면 극좌와 극우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는 진정한 정치력이 자라날 여지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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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대신 보호국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장 선생은 작가적 상상력을 일으켰는데, 이 상상력이 내 책을 읽던 중 떠오른 것이라니 나도 상상력을 좀 일으켜 보겠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 같은 것 보내지 않고 훗날 만주국의 푸이(溥儀)처럼 얌전하게 허수아비 노릇을 해서 보호국 상태가 길게 유지되었다고 가정하자. 만주국처럼 입헌군주제가 시행되었을 것이고, 대한제국 지배층은 근대국가 경영의 기술을 점진적으로 습득해 나갔을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서 조선의 발전을 억제하려는 측면과 촉진하려는 측면이 엇갈리는 데 따라 조선 사회의 발전에 굴곡이 일어났겠지만, 철저한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보다는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많이 누렸을 것이다.
조선이 어느 정도 발전을 이뤘다면 일본의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겠지만, 그것까지는 참자. 일본이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패전하는 진행 속에 조선이 만주국과 비슷한 보호국 위치를 지키고 있었을 경우를 장정일은 상상했는데, 나도 거기까지만 따라가 보겠다.
K 기자가 신이 나서 제목으로 뽑은 원자탄부터 생각해 보자. 장정일은 “경성(혹은 인천)과 부산(혹은 대구)에 떨어졌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했다. 확신의 이유는 두 가지란다. 하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같은 강자 담합의 전통, 그리고 또 하나는 서양인의 일본 찬양 전통.
세계대전이란 게 강자 담합의 한계 때문에 일어난 거다. 패러다임 이론에 비유하면, 세계질서의 틀이 유지되는 정상상태의 요소 하나가 강자 담합이다. 세계대전은 정상상태가 깨진 패러다임 전환의 단계다. 일본 항복을 앞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약간의 담합이 있었던 것 같지만, 있었더라도 아주 좁은 범위의 담합이다. 희생양을 대신 골라낼 정도로 넓고 깊은 의논이 이뤄질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 찬양 전통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종전 당시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선교사 등 일본 생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통(old Japan hands)’으로 미 국무성 자문역을 맡고 있었지만 전쟁 중 그들은 정책결정자들의 놀림거리가 되어 있었다. 맥아더가 ‘일본 살리기’에 나선 뒤에야 그들의 의견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장 선생이 나와 다른 의견 가진 것을 꼭 고쳐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원자탄에 관한 생각만은 좀 바꿨으면 좋겠다. 원자탄 투하가 때리는 쪽에게나 맞는 쪽에게나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진 일인지 그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1,700백 톤의 폭탄을 퍼부은 1945년 3월 9-10일의 도쿄 대폭격은 10만 명 이상의 인명을 빼앗았다. 다음 달 시작된 82일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그래도 일본은 ‘무조건 항복’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한 항복 조건을 찾아 눈치를 보며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자탄 두 방 맞고 얼른 손을 들었다. 8월 12일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이 한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하기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나,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이 도운 것이다. 국내정세로 말미암아 전쟁을 그만두는 사태로 이어지지 않고 끝났다. 내가 전부터 시국 수습을 주장한 이유는 적의 공격이 두려워서가 아니며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 때문도 아니다. 단지 국내정세가 우려할 만한 사태라는 점이 주된 이유다. 따라서 오늘 이 국내정세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 565쪽에서 재인용)
국민 동원이 한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도쿄 대폭격 때는 천황이 피해 현장을 시찰하러 갔을 때 마주친 피해 주민들이 경의를 제대로 표하지 않는 해괴한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패배를 껴안고>(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101쪽) 원자탄을 맞았기 때문에 육군 지휘부를 중심으로 한 전쟁 계속 주장을 물리칠 수 있었고, 항복문에 천황이 인민을 아끼는 ‘대어심(大御心)’을 그려 넣어 천황제 존속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경성이나 부산에 원자탄이 떨어져서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핵무기의 문제점이 오늘날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어도 그 특성을 당시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 원자탄을 쓰자는 논의가 나왔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쏘아붙였다고 한다. “당신들 미쳤소? 어찌 그런 끔찍한 물건 얘기를!” (Michael Sherry, <In the Shadow of War> 기억에 의존한 인용 // 나중에 확인하니 기억에 착오가 있었음. 아이젠하워가 이 말을 한 것은 베트남에 쓰자는 제안에 대한 것임.) 원자탄 투하는 전쟁 상황에서 악마시되던 일본인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보호국에도 식민지에도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끝으로, 조선이 보호국으로 남아 있었다면 전범국이 되었으리라는 장 선생의 추측에 대해 한 마디. 그럴 개연성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조선인이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여지가 있었다면 전쟁범죄에 동조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범국이 되더라도 주체적으로 전범국이 되고 그 책임을 추궁당하는 편이 외세에 휩쓸린 분단건국과 전쟁의 길보다 나빴을 것 같지 않다. 일본 경우 보면 책임 추궁이란 게 별것도 아니었고.
[덧붙임] 위의 글 초고를 작성해 놓은 뒤에 이와나미 강좌로 작년에 나온 <동아시아 근현대통사 2 러일전쟁과 한국병합>을 입수했다. 와다 하루키 등 편집위원의 면면을 볼 때 일본을 과도하게 미화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상상하기 힘든 책. 이 책에 실린 마쓰다 도시히코의 “일본의 한국병합”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연구자들의 일반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대목들이 특히 눈에 띈다.
“이 시점에서(1907년 고종의 양위 때) 일본이 병합의 길로 나아가지 않은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뜻을 감안한 것으로 보는 견해, 이토 통감이 합병 단행에 따른 일본의 재정부담 증가를 걱정해서 독자적인 한국통치 구상을 추진하기로 한 것을 강조하는 견해 등이 지금까지 나와 있다.” (336쪽)
“(통감직) 사임을 앞두고 이토가 최후의 민심수렴 방책으로 행한 것이 1909년 초 순종 황제의 조선 남부와 서부 순행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순행은 조선인의 민족주의를 오히려 고양시켜, 남부에서는 결사대의 저항, 서부에서는 일장기 게양 거부 등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338쪽)
“원래부터, 이토 통감이 부임 당초부터 병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고전적 견해도 특히 한국에서는 뿌리가 깊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는 거꾸로 왜 1910년까지 일본이 한국 병합을 결행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충분히 답할 길이 없다. 이 점을 생각하여 보호국 통치에서 병합으로 방향을 바꾼 시기를 이토가 가츠라, 고무라에게 병합 방침을 승인한 1909년 4월,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이 각의 결정된 그 해 7월로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이 견해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최근 나를 포함해서 1909년 시점에서도 한국 병합의 시기와 방식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있었다는 관점이 제시되었다.”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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