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 제5호 공동성명 앞에서 우익 진영이 보인 혼란스러운 반응을 지난 주(4월 19일) 일기에서 설명했다. 어제 얘기한 것처럼 미국 대표단에는 3상회의 결정을 파기하고 미소공위를 좌초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미군정과 밀착관계를 가진 우익 인사들은 그런 기맥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좌초될 미소공위에 협의상대로 참여하기 위해 반탁의 깃발을 절반이라도 접어놓을 필요가 있겠냐는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
김규식, 김병로처럼 5호 성명에 즉각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과도정부 수립을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미소공위를 통해 임시과도정부를 만들면 좌익의 입지가 너무 넓어질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기존 임정의 간판을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미소공위를 좌초시킨 후 미국에 의지해서 남한 단독정부를 만들겠다는 지독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우익의 양대 영수로 김구와 이승만이 병립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착잡한 장면에서 더 주목을 받은 것은 책략가 이승만이었다. ‘임정 법통’을 고집하는 김구는 복잡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종속변수로 전락하고 있던 반면 이승만은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다. 4월 27일의 민주의원 회의에 이런 분위기가 드러나 보인다.
민주의원에서는 27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정례회의를 열고 제5호 성명과 제반문제를 신중히 토의하였는데 동원 의장 李承晩의 귀경이 지연되어 방금 동원 의원 白南薰·비서국장 尹致暎 양씨가 부산으로 李承晩 초청차 출장 중임으로 공식적 발표는 李承晩의 입경 후로 미루고 12시 동원 의원 元世勳·金俊淵·공보부장 咸尙勳 3씨 연석 하에 기자단과 회견하고 제5호 성명에 대한 민주의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민족과 국가대계에 중대한 관계를 가진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대하여 본원의 태도를 가지고 다대한 관심을 가진 사회제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대한 본원의 태도는 제5호 성명 발표 당시에 본원 부의장 金奎植의 방송과 본원 의장 李承晩이 대구에서의 언명한 바에 의하여 대체로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민족과 국가에 중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신중에 신중을 가하여 온갖 각도로 이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모든 점을 보고 본원 내에 의견의 대립이 있다고 본다. 이런 모든 점을 보고 본원 내에 의견의 대립이 있다고 보는 것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때마침 27일 하지 중장의 성명으로 서명 운운에 대한 의운은 일소될 줄로 믿는다. 불일래로 李承晩이 입경할 것이고 따라서 본원으로서의 태도는 李承晩 귀경 후 공식으로 발표하겠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2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민주의원 의원들은 김구와 이승만 두 영수의 공동추천으로 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미소공위의 임시과도정부 수립이 성공하든 말든 일단 협의대상에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김규식이나 김병로처럼 영수의 영도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김구는 반탁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미소공위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들의 미소공위 협의대상 신청을 이끌어줄 영수는 이승만뿐이었던 것이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부의장의 방송과 의장의 언명으로 “본원의 태도는 대체로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각도로 이 문제를 검토할 필요” 때문에 이승만 귀경 후에야 공식 태도를 밝힐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결국 그들은 이승만의 공식 서한을 4월 31일 받은 뒤에야 민주의원의 입장을 결정한다.
좌익은 5호 성명을 일제히 환영했다. 그러나 그 속내를 세밀히 살펴보면 엇갈리는 면이 있다. 온건파는 미소공위를 통해 균형 잡힌 임시과도정부가 만들어지기 바란 반면 이것을 우익 타도의 기회로 삼아 좌익으로 편향된 임시과도정부가 출현하기를 바란 과격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우익이 무리한 반탁운동을 조정해서 미소공위에 참여하기를 바란 반면 과격파는 반탁운동을 우익 배제의 핑계로 삼으려 했다. 5호 성명 발표 직후 공산당 간부진을 취재한 독립신보 기자 고병순의 목격담에서 이 엇갈리는 면을 느낄 수 있다.
1946년 4월 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반탁운동하는 정당-단체는 자문 상대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제5호 코뮤니케 발표 당시 좌익계의 반응을 얻으려고 박헌영을 만나러 갔을 때다. 여운형과 이강국 등 주위의 간부들이 모두 벙글벙글하며 춤출 듯 좋아하는데, 박헌영은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고 그 설명서 내용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10여 분 동안을 되풀이 읽고 나서도 다시 수분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나직한 소리로 “당연한 조치다”라고 한마디 내뱉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토록 간단한 내용의 설명서를 그렇게나 찬찬히, 단 한마디의 대답을 그토록 신중히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19쪽에서 재인용)
10여분 동안 되풀이 읽는 동안, 눈 감고 있던 수분 동안, 박헌영은 어떤 생각을 굴리고 있었을까? 민족의 장래를 위한 큰 생각보다 자잘한 전술전략에 몰두하고 있었으리라고 내가 짐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지나친 선입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무렵 박헌영과 공산당의 자세를 서중석이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그리 지나친 억측은 아닌 것 같다.
공동성명 5호에 김규식, 김병로, 안재홍 등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자 그들에 대해 민전에서는 적극 환영을 표시하는 대신, “엄숙히 자기 비판하라”고 반성을 요구하였다. 박헌영은 4월 25일에 “반동적 정객들은 우리 정부에 하나라도 넣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헌영은 우익반동 거두들의 책동으로 인하여 공동위원회사업이 실패하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그 원인은 모든 민주주의세력과 민전이 강력한 옳은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까닭이라고 피력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81쪽)
하지는 우익의 협의대상 신청을 촉구하기 위해 22일과 27일에 거듭 성명을 발표했다. 27일의 특별성명에서는 “미소공동위원과 협의하기 위하여 선언서를 서명한다고 해서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을 찬성한다든가 혹은 신탁지지에 언질을 준다는 표시는 무함.”이라고 명시했다. 미소공위 참여가 반탁운동의 포기가 아니라고 보장한 것이다.
하지는 선언서 서명의 의미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미국 측 수석대표 아놀드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련 대표단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었다. 소련 대표단은 하지의 4월 27일 성명이 미소공위의 입장을 왜곡한 것이라고 항의했고, 이것이 열흘 후 제1차 미소공위가 좌초하는 원인의 하나였다.
이 견해 차이는 반탁운동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소련 측에서 볼 때 지난 연말 이래의 반탁운동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 조선 문제에 대한 연합국의 결정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일본의 전쟁노력에 동참해 온 조선이 앞으로는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나라로 거듭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연합국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이 3상회의의 입장이었다. 이것을 거부하는 세력과는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협의상대 신청자의 선언서 서명을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의 견해에 형식적인 타당성은 있다. 서명이 요구된 선언서 내용은 3상회의 결정의 지지이지, 신탁통치 지지는 아니다. 그러나 서명 요구의 이유를 묵살한 것이다. 애초에 소련 측은 반탁운동 참여자들의 원천적 배제를 주장하다가 양보한 결과가 서명 요구였다. 그래서 서명 요구에는 반탁운동의 반성이란 의미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가 사적인 자리에서 우익 인사들에게 자기 견해를 설득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을 ‘성명’ 형태로 만천하에 공표한 것은 회담 상대방을 무시한 조치였다.
하지의 4월 27일 특별성명이 미소공위의 좌초에 얼마나 큰 작용을 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걸림돌의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 자신이 초기에 반탁운동을 부추긴 때문에 자가당착의 입장에 빠진 결과였다. 미소공위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는 반탁운동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제 하지의 힘으로 수습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한편 소련 측의 편협하고 완고한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선언서의 서명에는 기존 반탁운동에 대한 반성의 뜻이 완곡하게나마 내포되는 것이다. 하지의 몰지각한 특별성명이 기분 나쁜 것일 수는 있어도, 미소공위의 목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가 뭐라고 하든 상관 말고 협의상대 신청자들의 서명이나 열심히 챙기는 것이 진행을 순조롭게 하는 길이었다.
5월 6일 회담이 중단되고 5월 9일 무기휴회가 발표되기까지 소련 측은 회담의 계속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제1차 미소공위의 좌초는 미국 측에 1차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소련 측의 인내심이나 포용력에도 아쉬움이 느껴진다. 며칠 내로 그 측면도 한 차례 세밀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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