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는 3월 20일 출범한 직후 공동성명 제1호를 낸 후 대략 1주일에 한 차례씩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특별한 내용이 없더라도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공동성명이었다. 협의대상 신청방법을 명시한 4월 18일의 제5호 성명이 가장 획기적인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이었다. 4월 24일 나온 제6호 성명도 그냥 진행 상황을 밝힌 것뿐이었다. 제6호 성명에서 특기할 만한 내용은 분과회에서 ‘시문서(試問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동위원회 제2분과회 제3분과회에서는 공동위원회와 협의할 각 정당 급 기타 사회단체 대표에 제출할 시문서를 작성중이다. 이 시문서의 목적은 공동위원에서 조선국민의 여론에 대한 광범하고 명확한 이해를 얻는 동시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정부와 및 기 정강의 조직과 원칙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조선국민 권고와 제의를 고려하려는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소공위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회담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한반도에 주둔한 두 나라 군대 사이의 회담이었다. 미소공위 설치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내용을 다시 보자.
조선에 주재한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2주간 이내에 회담을 개최,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美, 英, 蘇, 華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시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에 備할 터인바 신탁통치 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동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 이 신탁통치제에 관한 외상이사회의 제안을 검토키 위하여 美, 蘇, 英, 華 각국정부에 회부된다. (1945년 12월 28일자 일기에서)
국가 간 회담으로 공동위원회를 만든다면 중국과 영국도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점령을 통해 한반도와 관련된 특수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한국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주도적인 입장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의 양해를 얻어 국가 간 회담이 아닌 두 점령군의 회담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조선임시정부 수립” 같은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군대 차원의 회담이라는 것이 어색하다. 회담의 목적과 회담의 주체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미소공위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미소공위의 또 하나 구조적 약점은 다자 간 회담이 아니라 양자 간 회담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다자 간 회담이라면 이견이 일어나더라도 조정하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이 어긋나면 직접 절충하는 외길밖에 없다. 제1차 미소공위가 두 달도 안 되어 무기정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이 약점이 작용했다.
3상회의에서 미소공위의 역할을 너무 쉽게 봤던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두 나라 정책이 화합될 수 있었다면 이런 정도 구조적 약점들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나라 정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형식상으로는 점령군 사령관이 그 결정을 공식화하는 식으로, 미소공위를 기능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관계가 계속 식어가고 있었다. 막후에서 충분한 합의를 이룰 수가 없었다. 미 국무성에서 미소공위 대표단에 파견한 위원들은 강력한 메시지를 본국에서 받지 못했다. 그래서 미소공위의 미국 대표단이 회담에 임하는 자세에는 ‘현지 사람들’의 입장이 큰 비중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군이 북한에서 기계류를 반출했다고 하는 미국 대표단의 주장이 사보타주 전술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미소공위 개막 불과 며칠 후에 하지가 이 주장을 근거로 미소공위의 전망에 대해 재수 없는 소리 한 일을 3월 18일자 일기에 적었다. 미소공위는 문제를 제기하는 기구가 아니라 문제를 처리하는 기구였다. 기계류 반출이 정말 심각한 문제라면 미소공위가 아니라 다른 통로를 통해 다뤄야 할 문제였다. 미소공위의 실패를 바라는 하지의 염원을 드러내 보인 에피소드였다.
커밍스는 미소공위 출범 단계에서 미국 대표단의 비협조적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서 하나를 소개했다. 국무성에서 파견된 위원 한 사람이 3월 20일에 작성한 비망록을 주한미군 문서철에서 찾은 것인데, 작성자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미국 정책의 목적은) 상당 기간에 걸쳐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을 막아낼 수 있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이고 안정된 한국 정부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의 영향력을 막아내는 것이 완전한 독립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 한국은 힘으로 강제하지 않고 자기 결정에 맡겨놓을 경우 앞으로 예측 가능한 기간 동안 러시아보다 미국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한국의 독립은 부차적인 목표이므로 앞으로 몇 해 동안은 완전한 독립을 누릴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이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는 상당한 보장을 유엔 기구가 제공할 때까지는 미국은 소련과 함께 필요할 경우 한국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영토 지배권을 유지해 나가고 한국의 국제관계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 특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한국 임시과도정부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내든, 적어도 최고위층에 대한 숨겨진 통제력을 미국이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38-239쪽)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01-102쪽에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을 “협상지침”이라는 제목으로 인용해 놓았다. (커밍스는 자료 출처를 “'U. S. Document no. 3, Joint Commission Files,' quoted in 'HUSAFIK', vol. 2, ch. 4, pp. 154-155”로 표시했고, 작성자를 찰스 테이어로 추측했다. 한편 정용욱은 출처를 “미소공위문서철, 롤번호 5, ‘한국정부 구성에 관한 협상지침’(일자미상)”으로 표시했다. 커밍스가 인용한 ‘비망록(memorandum)’이 가공을 거쳐 정용욱이 인용한 ‘협상지침’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 문서를 근거로 정용욱은 당시 미국대표단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위의 인용으로 보아 대표단은 미-소 협상의 출발에서부터 임시정부의 수립보다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의 마련에 골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를 근거로 미국의 미소공위에 대한 입장과 방침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무엇보다도 미국은 철저하게 대소 전략의 관점에서 전 한국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파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기에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설사 정부가 수립되더라도 이 정부에는 제한된 권한만 부여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즉 그 시점에서 한국의 즉시 독립은 친소 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반면 임시정부 수립은 어떤 형태든 일정 기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식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102-103쪽)
이런 내용의 문서가 “협상지침”으로 존재했다면 미국대표단에게 3상회의 결정을 충실히 실행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4월 5일자 일기에서 미국 측의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새어나오고 있던 상황을 소개했는데, 그 정보는 한국의 분단 건국을 바라는 누군가가 간을 보기 위해 흘린 것으로 보인다. 단독정부 추진설에 대한 이승만의 반응이 묘한 것이었다.
8일 하오 1시 돈암장 李承晩은 정례기자단회견석상에서 중대발언이 있었는데, 과도정권 수립의 선결조건으로써 38선 철폐를 주장하였고 만일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상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보도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여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나로는 모스크바 결의를 반대도 아니요 찬성도 아니며 다만 그 결과로 경성에서 개최된 공동위원회의 토의할 기간에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며 동시에 38선을 철폐하여 남북조선이 다시 통일을 회복하기로 이 회의에서 결정되기를 바란다. 제2차대전이 시작된 이후로 연맹국이 연속 선언한 바와 같이 해방된 나라에서 정부수립과 인선에 대하여 그 나라 민중의 공원을 따라서 행한다 한 주의를 우리는 고집하려는 결심이니 남북의 통일도 민의를 따라 1일이라도 속히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서 독립정권을 행케 한다는 보도는 신문지상에서 보아 알았으나 이상에 말한 바 소망을 가질 동안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고로 이에 대하여 아직 나의 의견을 발표코져 아니한다.” (<동아일보> 1946년 04월 0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기자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추진설에 대한 의견 발표 보류를 “강경한 태도”라고 표현했다. 단독정부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당시의 상식에 비추어 이에 대한 의견 발표 보류를 극단적인 태도로 본 것이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6월 3일 ‘정읍 발언’으로 나왔다. 4월 8일 시점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의 공공연한 주장이 “아직은 곤란”했던 것이다.
미소공위의 충실한 역할 수행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6호 공동성명에서 언급한 ‘시문서’ 작성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소공위를 좌초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고, 미소공위는 그런 도전에 취약한 구조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1차 미소공위는 5월 8일 성과 없이 무기정회에 들어가고 임시정부의 형태에 대한 조선인의 의견을 모으려는 시문서 작업은 1년 동안 파묻혀 있다가 1947년 6월 제2차 미소공위에서야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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