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동위원회 회의가 어제 시작되었다. 다섯 시간에 걸친 회의의 결과로 공동성명 제1호가 발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본격적인 회의진전과 함께 3천만의 관심은 이에 총집중되어 자못 그 추이를 주시하고 있는데 21일 동 위원회 본부로부터 별항과 같은 공동성명 제1호를 발표하여 동 회의가 자못 순조롭게 협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에 의하여 특히 주목되고 기대되는 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 문제에 관한 막부 결정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이 확립될 때까지 그 임무를 계속할 것은 물론이나 금번 제1차 회의에서는 동 제3조 제2항에 의한 조선의 과도임시정부 조직에 협력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동 제3항에 의하여 금번 조직될 임시정부를 참가시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비롯한 원조 협력(신탁)문제도 협의 성취시키기 위한 회담이라는 것이 명확히 된 것이다. 이로써 금번 회의를 계기로 하여 민주적 과도임시정부 조직을 볼 것은 대체로 명확시되며 금후 정국의 동향은 물론 3천만의 이에 대한 적극적인 추진이 더욱 활발할 것으로 보인다.

◊ 공동성명 제1호

서울시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제2·제3항의 조항을 성취하기 위하여 회담을 시작하였다. 제1차 회의는 1946년 3월 20일 13시에 시작되었다. 하지 중장과 쉬티코프 중장이 개회식에서 연설하였는데 연설은 라디오로 중계되었다. 차 회의에 참석한 기타 위원은 다음과 같다.

소련군사령부 측 대표: 차라프킨 씨, 레버데프 소장, 발라사노브 씨, 카쿨렌케 중좌.

미군사령부 측 대표: 아놀드 소장, 랭던 씨, 데이버 씨, 부스 대좌, 브리튼 대좌.

그 외에 고문들과 전문부문 기술자들과 조선인과 미국인 기자도 참석하였다. 정식개회식이 끝난 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원들은 위원회의 회의진행방법에 관한 회의사항을 토의하기 시작하여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았고 또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본 위원회의 임무를 완수할 최선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제1차 회의는 18시 5분에 종료하였다.

미국 측 수석대표 에이 브이 아놀드 소장

소련 측 수석대표 티 에프 쉬티코프 중장

(<서울신문> 1946년 03월 2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공동성명 제1호의 내용은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정도뿐이었다. 주목할 사실은 ‘공동성명’ 형식으로 중간발표를 열심히 하겠다는 양측 의지가 밝혀진 것이다. 미소공위는 ‘점령국’이 아닌 ‘점령군’ 사이의 회담이었다.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과제의 실행방법을 검토하는 실무적 성격의 회담이었기 때문에 그 진행 과정을 명확히 밝혀 나가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미소공위의 당면한 최대 과제는 과도임시정부 수립이었다. ‘과도’, ‘임시’의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새 국가 건설의 첫 단추였다. 어찌 보면 실무적 성격의 회담에 주어진 과제로서는 무리할 정도로 정치적 고려가 많이 필요한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미소공위의 진행을 살펴봄에는 역시 이 과제의 고찰이 중심이 될 것이다. 새 국가 건설의 과제는 미군 점령 하의(명목상으로는 연합군 점령이지만) 일본에도 있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이 무렵 이 과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 한 차례 살펴본다.


패전은 일본인에게도 ‘해방’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선인에게는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지만, 일본인에게는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일본인은 군국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느 측면을 중시하느냐를 점령자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여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대전 도발의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를 피해자로 인정하고 독일에만 책임을 물었다.


미국은 일본을 살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인의 피해자 측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규정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군국주의 국가였다. 모든 죄를 국가에 돌리고 죄 많은 국가를 없앤 다음 새 국가를 세우는 것이 일본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연합군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일본국’의 항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일본국을 대표하는 천황의 8월 15일 ‘항복 선언’이란 국민과 정부와 군에 대한 항복 명령일 뿐, 연합군을 직접 상대로 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국가체제는 그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8월 10일 천황제의 존속을 전제로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일본의 통보에 대한 미국의 회답은 천황제 존속 여부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 회답의 원문 “항복 이후 국가를 통치하는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위는 연합군최고사령관에게 예속된다.” 중 “예속(be subject to)”을 일본 관리들은 “제한 아래 둔다.”고 축소 번역했고, 점령 이후에도 ‘예속’과 ‘제한’ 사이의 애매한 상태가 계속되었다.(빅스, <히로히토 평전>(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 575쪽)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Supreme Command of the Allied Powers)는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감시 역할만 맡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했다. 새 국가 건설까지의 과도임시정부로 기존 정부를 인정한 셈이다. 새 국가 건설도 기존 정부와 의회가 개헌의 방법을 통해 이뤄 나가도록 맡겨놓았다. “앞에서 기술한 제반 목적이 달성되고, 일본 인민이 자유로이 표명한 의사에 따라 평화를 애호하며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정부가 수립될 때에는 연합국 점령군이 즉시 일본에서 철수할 것”이라 한 포츠담선언 제12항이 새 국가 건설의 지침이었다.(<히로히토 평전> 555쪽)


개헌이 전범 재판과 함께 연합국을 만족시키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점령 초기부터 분명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개헌 과제 앞에서 맥아더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10월 25일 정부가 만든 기구의 이름은 ‘헌법 문제 조사위원회’였다. ‘개헌’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마쓰모토 조지 위원장은 보수성이 극히 강한 인물이었다.


마쓰모토 위원회는 56년 전 제정된 메이지헌법에 근본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군국주의의 발호는 헌법의 잘못된 운용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미군이 보다 자유주의적 개헌을 원하고 있다는 충고에 대해 마쓰모토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헌법 개혁은 자발적이고도 독립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므로 나는 미국인들의 의향이 어떤지 떠보거나 사전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458쪽)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현실을 무시한 말씀이다. 하나는 미군이 실제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대다수 일본인들이 대대적 개혁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쓰모토 위원회는 1946년 2월까지 22회의 비공개회의를 거쳐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밖에도 여러 정당, 기관과 개인이 이 무렵까지 13개의 개헌안을 내놓았다. 공산당의 개헌안이 가장 급진적 개헌안의 하나였고, 이보다 훨씬 보수적인 개헌안도 있었지만 마쓰모토 위원회 개헌안의 보수성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당시의 민심과 완전히 겉돈, ‘수구적’ 개헌안이었다.


2월 4일 맥아더의 전격적 명령에 따라 SCAP 민정국이 새 일본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엿새 만인 10일에 작성된 초안이 맥아더에게 제출되었다. 이것이 일본의 ‘평화헌법’이 되었다.


초안이 주둔군사령부에서 작성되었다는 점, 작성에 1주일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화헌법 반대자들은 그 타율성과 졸속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이 초안은 상당히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작성과정을 거친 것으로 존 다우어는 본다. (<패배를 껴안고> 465-483쪽) 초안 작성에 동원된 24인 요인 중 직업군인이 한 사람도 없었고, 일본인들이 그 동안 제출한 개헌안, 특히 진보적 개헌안의 내용이 잘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SCAP의 전격적인 헌법 초안 작성은 맥아더의 정략적 조치였던 것으로 다우어는 해석한다. 연합국의 다국간 구성체인 극동위원회(FEC, Far Eastern Commission) 개회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2월 하순 FEC가 개회하면 개헌 등 중요 사안에 대한 관할권을 SCAP으로부터 넘겨받을 전망이었다. 포츠담선언이 요구한 자유주의적 내용을 담으면서도 천황제 존속 등 일본 국체를 온존시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맥아더의 구상을 실행하기 위해 개헌 작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 다우어의 관점이다.


한국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막할 무렵까지 일본에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 헌법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한국과 일본의 상황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 ‘과도임시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민의 개혁 욕구가 점령군사령부에게도 상당히 원활하게 수용된 반면, 한국에서는 이념적 색안경을 피할 수 없었다. 패전의 피해를 일본보다도 오히려 해방된 조선이 더 많이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