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30일 발포된 군정청 법령 제19호는 “국가적 비상시기의 선언”, “노무자의 보호”, “폭리에 대한 보호”, “민중의 복리에 반한 행위에 대한 공중의 보호”, “신문 기타 출판물의 등기” 등 미군정의 기본 정책을 밝힌 것이다. 제1조 “국가적 비상시기의 선언” 중에 경제 부문과 관련된 아래 내용이 들어 있다.


군정청의 계획에는 조선민중의 복지를 위하여 가급적 속히 모든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하는 것, 과거 40년간의 절대적 노예상태로부터 노동자를 구출하는 것, 일본인의 간휼배신 행위에 의하여 약탈되었던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하는 것, 농민의 汗과 근로의 결정을 공평 정당한 할당으로 분배할 것, 자유시장의 원칙을 회복할 것, 국내 남녀노소에게 此 미려한 국토에 천부된 대부원의 공평정당한 분배를 향유하는 기회를 주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군이 진주한 후 즉시 일본이 전쟁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선이 기아로부터 쇠약하여지기까지 其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고갈시킨 것을 발견하였다. 소비품의 생산은 거의 다 정돈되었다. 정부의 자금은 대략 횡령 소비하였다. 통화는 고의로 팽창시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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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밑줄에 나오는 “횡령”, 이것이 해방공간의 키워드의 하나였다. 해방 직후 얼마 동안은 일본인 관리들의 횡령 사건이 줄을 이었다. 3월 20일 유죄 판결을 받은 총독부 보호관찰소장 나가사키의 경우가 대표적인 것이다.


조선 해방운동을 탄압하는 데 갖은 포학한 수단을 감행했던 대화숙과 보호관찰소장인 長崎祐三의 횡령사건 제2회 공판이 20일 지방법원법정에서 개최되었는데 전회 공판 시 검사의 1년 6개월 구형에 대하여 李天祥 판사로부터 구형대로 1년 6개월 언도가 있었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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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5일에는 이런 사건들을 다룰 별도의 기구를 법무국 내에 만들기도 했다.


군정청 법무국장 매트 테일러 소좌의 5일 발표에 의하면 전 일본인 관리가 공금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법무국 내에 특별범죄수사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었다 한다. 이 위원회 위원장은 레이푸 힐 대위이고 조선인 위원은 다음과 같다. 대법관 李仁, 조선특별검찰청장 全奎弘.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는 전 일본인 관리의 공금횡령사건이 30여 건이나 되어 동위원회 보고에 의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되리라고 한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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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규모가 큰 사건의 범인은 총독부의 돈줄을 쥐고 있던 회계과장 우에노 다케오와 출납계장 우에야마 도시오였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공금 6,400만 원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야스다은행을 통해 일본에 송금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최대의 부호 중 하나인 박흥식이 자기 재산을 1천만 원 규모로 밝힌 것과 비교해 보라.


일본인 관리들의 횡령은 대개 수백만 원 단위였고, 개인적 범죄가 아니라 총독부의 ‘현금 살포’ 작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개인적 범죄라면 그 작전에서 파생된 ‘배달 사고’일 것이다.


총독부는 8월 15일 이후 기존 통화량의 근 70%에 이르는 엄청난 거액의 조선은행권을 풀었는데, 미군정은 일본에서처럼 군표도 발행하지 않고 조선은행권을 유일한 통화로 인정했다. 소화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쌓여 있던 뭉칫돈을 그대로 살려준 것이다. 식민지시대의 문제로 남아 있던 ‘부의 편중’ 현상이 이로써 더욱 심화되었고, 생산활동과 아무 관계없는 뭉칫돈은 새로 형성되는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박흥식이 받은 5천만 원, 김계조가 받은 1천만 원은 이때 풀려나온 돈 중 빙산의 일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금 횡령에 이어 현물 횡령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공장과 창고에 쌓여 있던 재료와 제품이 그 대상이었고, 범인은 조선인 새 경영자들이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대다수 공장의 경영에 공백이 생겼는데, 직원과 공원들이 운영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경영을 넘겨받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조직이 경영을 맡는 경우 효율성에는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물건을 마구 빼내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자율운동을 공산주의 성향으로 보아 군사력과 경찰력으로 탄압하고 경영진을 임명했다. 갑자기 큰 책임과 권한을 맡은 경영자들 중에 책임을 등지고 권한을 남용하는 풍조가 널리 일어났는데, 가장 뚜렷한 사례가 물자 횡령이었다.


3월 20일 군정청 감찰부가 산업계의 비리 적발 내용을 발표했다. 엄청난 규모였다. 경인 지역의 110개 회사와 공장을 3개월 동안 조사한 결과 70여 개 회사-공장에서 1억4천만 원의 사취금액을 파악했다고 한다. 각종 공장을 접수한 후 알맹이가 되는 현품을 처분하고 군정청에 보고하여야 할 적산을 거짓으로 보고한 채 감춰두고 방매하는 등 수단이 널리 쓰였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


“조선피혁회사 3천만 원”을 비롯해 수십 개 회사의 적발 금액을 나열한 긴 기사의 끄트머리에 아리송한 내용이 붙어 있다.


◊ 일본인 중역의 횡령액 5천만 원

이 땅의 백성들을 착취하고자 방대한 자본을 가지고 들어온 三井, 三菱 계통의 회사 공장은 그대로 조선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거니와 한 번 이것이 꺼꾸러지면서 그대로 있을 리 없다. 三井, 三菱 계통의 큰 회사 공장의 일인 중역들은 해방 후 무질서한 상태의 틈을 타서 혹은 제 마음대로 회사 공장의 재산을 횡령 처분한 것이 감찰부 조사에 드러난 것만도 실로 49,129,384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발각될까 두려워 대개가 일본으로 도망을 하고 없으므로 회수할 길이 없다.


해방 후 시점에서 현금은 몰라도 물자를 일본인 경영자들이 어떻게 빼돌릴 수 있었을까? 제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 1천만 원 가치의 물자라면 1백만 원 받고 넘겼을 것 같다. 넘겨준 자들보다 넘겨받은 자들의 죄가 더 큰 일이다. 경영을 인수한 자들은 횡령 사실을 모르는 채로 인수받았을까? 결국 경영을 인수한 자들이 대개 횡령 물자도 넘겨받았을 것 같다. 1억4천만 원의 적발 금액 중 5천만 원은 귀국한 일본인들이 뒤집어쓰고 넘겨받은 자들의 책임이 호도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몇 달 동안 전형적 횡령사건의 몇 가지 사례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에서 뽑아 본다.


(1) 관리관을 매수하느라고 70여만 원의 공금을 횡령하여 유흥을 하고 석탄회사의 물건을 정실 배급하여 일반시민의 가정배급은 돌보지 않아 지난 겨울동안 120만 시민을 울려 놓은 조선석탄 사건은 조사가 끝나 6일 중앙청으로부터 전 사장 千應奎(47) 현 부사장 申承均(38)은 송국되었다. 이 사건은 작년 9월 각 석탄업자가 가지고 있던 석탄 1만 3천 7백 톤을 1 톤에 22원에 사들여 가정과 일반에는 배급하지 않고 1 톤에 350원까지 받고 정실로 판매한 것이다. (<동아일보> 1946년 07월 08일자)


(2) 서울 용산에 있는 풍국제분사 지배인 김민홍(42세)는 군정청으로부터 시민에 배급할 밀을 그 공장에서 제분해 가지고 다시 생필영단에 넘기게 된 것을 기회로 그 동안 수천 포대를 시내 상인에게 팔고 그 대금 약 2백만 원을 횡령한 것이 폭로되어 4일 용산서에 검거되었는데 배후에는 연루자가 있을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08월 06일자)


(3) 조흥은행 두취 鄭雲用과 동 영업과장 申鉉旭은 자본금 백만 원의 동건무역회사에 1천5백만 원을 부정 대부하고 수수료 40만 원을 취득한 사실이 탄로되어, 수일 전부터 검사국 지시 아래 종로서에서 사건을 조사 중 드디어 30일 검사국의 구인장을 집행하였는데 사건 발단은 사기 혐의로 취조 중인 동건무역 사장 康長烈에게서 탄로되었다 하며, 정은 재계의 거두인 만큼 구인장을 집행하기까지는 경찰 사법 양 당국에서 상당히 신중을 기하였다 하며, 정은 해방 후 수많은 일인 재산을 접수하여 애첩을 시켜 요리점을 경영하는 등 경찰에서 압수한 일산만 하여도 4천 점에 달한다. 그리고 취조 결과에 따라 조흥은행을 에워싼 배임 횡령 사건은 의외에 확대될 듯하다. (<서울신문> 1946년 09월 03일자)


(1)에서는 석탄, (2)에서는 밀가루, 생필품이 협잡의 도구가 되어 있다. (3)의 조흥은행은 군정청이 적산(敵産) 관리 사무를 맡겨놓은 기관이었다. 경제 분야의 최대 과제인 적산 처리에서 최긴급 과제인 생필품이 모리배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리배의 난동은 조선에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존 다우어는 이 시기 일본의 암시장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정부는 다섯 가지 주식을 포함한 쉰 가지 생필품의 암시장 가격을 지속적으로 감시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암시장 가격이 얼마나 폭리를 취한 것이었는지를 대충 알 수 있다. 항복 이후 6개월간 암시장 가격은 같은 상품의 공시 가격의 38배에 달했고 그 뒤 조금씩 격차가 즐어들었다. 1946년에는 쉰 가지 생필품의 경우 암시장 가격은 공시 가격의 14배, 1947년에는 9배, 1948년에는 5배 이하, 마지막으로 1949년에는 약 2배 정도로 인하되었다.

하지만 소비재는 암시장에서 유통되던 수많은 상품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석탄, 코크스, 휘발유, 목재, 시멘트, 판유리, 타타미, 선철, 압연강, 아연판, 동판, 알루미늄, 주석, 전선, 모터, 비료, 공업용 화학 약품, 기계류, 타이어, 농기구, 알코올, 페인트, 염료, 직물, 종이 등의 생산재 또한 암시장에서 매매되었기 때문이다. 손수 수확한 쌀이나 감자를 암시장에 유통시킨 농민들은 이러한 상황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생산재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대답이야 분명했다. 군수 물자를 착복해서 숨겨 왔던 군인, 기업가, 관료, 정치가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 이 모든 양상들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힘 있는 자들이 여기서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에 이르러 군수 물자의 착복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기 시작했고, 내무성 관료이자 나중에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는 세코 고이치 주도로 비공식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이 배신행위가 공공연히 알려진 것은 다음 해인 1947년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일단 사건이 불거지자 담당 조사관들은 내각, 중앙 정부 관료, 국회의원, 악명 높은 정치 브로커, ‘졸부들’뿐 아니라 하위직 공무원과 지방 경찰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에 직면해야만 했다. 착복한 군수 물자를 암시장에 흘려보내서 얻는 이익의 상당 부분은 정치 활동 자금으로 전용되었고, 이러한 루트를 거쳐 자금을 확보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보수당과 관련 있는 인물이었다. (<패배를 껴안고> 137-138쪽)


직접 군정이든, 간접 통치든, 일본과 남반부 조선의 최고 권력은 미군이 쥐고 있었다. 미군 가운데 경제범죄에 끼어든 자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미군이 정책적으로 경제범죄를 장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범죄의 주역은 일본인과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미군이 이런 범죄에 어떤 자세로 임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점이 있다. ‘부의 집중’ 자체에 대해서는 미군에게 별 경계심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 사령관의 명령을 빙자해서 박흥식을 석방시킨 것(3월 2일자 일기) 같은 일도 그래서 있을 수 있었던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