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3월 15일 이전에 시작하기로 한 미소공위 본회담이 늦어진다는 군정청 발표가 어제 있었습니다. 미소공위는 카이로 회담 이래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국제적 협력을 구체화하기 위한 회담입니다.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의 노력과 국제적 협력이 합쳐질 때 순조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소공위는 조선 독립을 위해 극히 중요한 회담이지요. 본회담 개시의 지연이 나쁜 징조가 아니기를 빕니다.


안: 소련군 수석대표 슈티코프 대장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2, 3일 입경을 늦췄다고 하니 심각한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이 일본 항복 후 석 달이나 지나서 열렸고,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난 이제야 미소공위가 열리게 된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답답하죠. 그러나 이런 회담에서는 모든 국제관계가 고려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조급한 마음을 억눌러야죠. 포츠담 회담도 독일 항복 후 석 달 뒤에 열렸지 않습니까?

회담 일정이 늦고 빠른 것보다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가장 큰 목표는 임시과도정부 수립이고 가장 시급한 목표는 38선 문제 처리입니다. 임시과도정부 수립 방안을 도출하는 데도 38선의 장벽이 큰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에 회담의 초반부에서 그 처리를 빨리 결정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 문제 정도는 지난 예비회담에서 처리할 수 있기 바랐는데, 그것 때문에 제일 마음이 조급합니다.


김: 분할 점령이 오래 가면서 단순한 ‘분할’을 넘어 구조적 ‘분단’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북에서는 토지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합니다. 식민지시대의 과도한 농민 착취로 인해 오랫동안 이 땅 농민들의 숙원일 뿐 아니라 이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의 과제였던 토지개혁입니다. 이 개혁으로 대다수 인민이 혜택을 입으면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인민의 정부’로서 신뢰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남에서 군정청이 맡은 역할의 대부분을 인민위원회가 넘겨받았으니, 실질적으로 ‘점령’ 상태를 많이 벗어난 셈입니다.

그런데 이남에서는 미군의 ‘점령’이 어찌 보면 식민지시대보다 더 심한 ‘지배’의 양상으로 출발했고, 아직도 그로부터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식민지시대에는 군대 계급으로 바꿔 보면 50세 전후의 장성급이 맡던 기관장이나 관직을 30세 전후의 대위나 소령 급이 맡고 있죠. 조선인의 역할을 늘린다고 하지만, 채용하는 조선인 대부분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자기 스스로도 헷갈릴 만한 사람들 아닙니까?

38선 장벽으로 인해 이북과 이남이 이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잘하는 것이 있으면 이쪽에서 배우고 이쪽에서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저쪽에서 깨우쳐주고 해야 하나의 사회로서 함께 발전해 갈 수 있는데, 이쪽은 우리 길 가고 저쪽은 저희 길 가고, 시간이 갈수록 화합이 힘들어질 것이 걱정됩니다.


안: 지난 달 몽양이 평양 가서 김일성 위원장을 만났을 때 이북만의 토지개혁을 보류해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2> 58쪽) 워낙 중대한 사업이니 조금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북이 함께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남북의 이질화로 인해 건국에 지장이 올 수도 있다는 뜻으로요. 그러나 금년 농사철을 놓치면 실효를 보는 데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일이니 그쪽에서 서둘러 진행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해방 후 반년이 지나도록 거기에 보조를 맞추지 못한 우리 자신을 탓해야죠.

그리고 형편 되는 쪽에서 먼저 진도를 나가 두는 편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지금 이남 사정을 봐서는 토지개혁을 언제나 해낼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이북에서 성과를 거두어 이남에 개혁의 압박을 줄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몽양이 걱정하는 것은 이남의 토지개혁이 이북과 다른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북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지요. 이남에서는 ‘무상몰수’가 불가능합니다. 최선의 방책이 ‘유상매입 무상분배’지요. 이것이 남북 간의 가장 큰 이질적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이질성은 생산적으로 극복할 길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김: 선생님이 ‘유상매입’을 지지하는 까닭이 무엇인지요? 그리고 이질성 극복의 길을 어떻게 내다보시는지요?


안: 나는 지금 조선 상황을 60년 전 일본 상황과 비슷하게 봅니다. 영세농민을 살려줄 토지개혁의 필요가 절실하고, 또 한편으로 급속한 산업 진흥이 필요한 상황이죠. 메이지시대 일본에서는 영주와 대지주가 땅을 내놓는 대신 국채를 받아 산업자본가로 역할을 바꿨습니다. 조선의 지주들이 그런 변신을 꾀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이북에서는 극단적인 산업국유화 노선을 바라보기 때문에 산업자본가 육성의 필요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공업 분야는 민간의 자발적 노력이 극히 중요한 분야입니다. 국유화 범위를 너무 넓게 잡으면 사회의 안정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발전성이 제한됩니다. 이북의 개혁이 사회주의 쪽으로 치우치는 것과 달리 이남에서 자본주의 쪽으로 개혁 방향을 잡아 양자 사이에 선의의 경쟁이 일어난다면 인민의 선택 폭이 더 넓어질 것입니다.


김: 토지개혁의 근본 목적이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는 소작농 등 영세농민의 활로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상분배’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영세농민에게 땅 살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유상매입’과 ‘무상분배’가 양립하려면 국가의 거대한 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재원을 어떻게 만들어내지요?


안: 메이지유신의 농지개혁 방법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지주에게 채권으로 보상해 주고 채권 만기 기간 중에 그 농지의 수입으로부터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죠. 이훈구 농무국장이 일인 소유 농지의 방매 방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인 농지는 소농가에 방매하는 것이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15년 동안의 시험기간을 두어 아무 고장 없이 잘 경작하면 그 경작인에게 그대로 주는 것이다. 즉 농지소유권은 정부에서 가지고 있고 경작인은 15년 동안 경작권을 법적으로 하가를 받아서 경작하는데 다만 3·7제에 의한 농작물로서의 소작료와 세금, 수리조합비 등을 낼 뿐이고 따로 농지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16일자)

이 방침을 조금 조정해서 모든 분배 토지에 적용하면 됩니다. 지주에게 보상가는 한 해 소출량의 3배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지주와 부재지주에게는 더 낮게 할 수도 있고요. 15년의 임대기간 동안 소출의 3할을 농민이 낸다면 세금과 수리조합비를 그 안에 포함하더라도 2할은 사업 재원으로 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15년에 소출량의 3배를 뽑을 수 있지요.

그리고 영세농민이 토지를 분배받더라도 궁핍 때문에 그 토지를 바로 처분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토지개혁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북의 토지개혁에서도 분배받은 땅을 상당기간 되팔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리고 현물세를 소출의 25%로 한다고 합니다. 15년간 임대제로 하여 임대기간 중에는 임대료 포함 30%를 내게 하고 임대가 끝나 완전히 분배받은 뒤에는 세금과 비용 10%만 내게 하는 것이 농민에게 더 유리합니다.


김: 토지개혁뿐 아니라 이북에 비해 이남 사회의 혼란이 심한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경찰의 역할에 너무 차이가 큽니다. 이북에서는 인민위원회의 통제 아래 경찰이 정상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남에서는 일제시대 악질 경찰을 주축으로 경찰이 자라나 민심에 어긋나는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남의 경찰 인원은 반년 동안 갑절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제 구실 하려면 인원보다 신뢰가 필요하지요. 금년 들어서도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등 경찰이 정치테러에 앞장서는 꼴을 보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조병옥 경무국장이 유치장 개선 지시를 내렸고(<동아일보> 1946년 3월 8일자), 또 엊그제는 러치 군정장관이 고문과 악형 금지 지시를 내렸습니다(<조선일보> 1946년 3월 13일자). 문제가 있으니까 지시를 내린 것이지요. 이것이 일제시대보다 좋아진 경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안: 나는 미군정 정책에 아쉬운 점이 있어도 가급적 선의로 해석하려 애씁니다. 미군은 힘을 가지고 우리를 해방시킨 존재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세우고 힘을 갖춘 뒤에는 미국, 소련, 어느 나라와도 대등한 관계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방식을 그들에게 요구하기보다 그들 방식에 우리가 맞춰야 합니다. 일본을 패퇴시킨 힘도, 우리의 건국을 지원할 힘도, 힘을 가진 것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찰 문제는 정말 잘못됐습니다. 친일파 척결은 건국 뒤로 미루더라도, 지금 당장 그들에게 힘을 쥐어줘서는 안 됩니다. 넓은 범위를 배제할 필요도 없고, 악질 친일파로 이름난 사람들만 빼놓아도 됩니다. 그런데 지난 연초 서울 시내 경찰서장 임명 때 소문난 악질 경찰관들을 줄줄이 앉혀 놓았으니...

다른 관리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총독부에서 일하다가 군정청에 눌러앉은 사람들,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도 옛날 일을 반성하고 심기일전해서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소문난 악질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게 만들면 반성하려던 사람들도 흔들리게 됩니다. 조병옥과 장택상, 일제시대에는 별 악행이 없던 사람들이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갖고는 후세에 민족반역자의 오명을 남길 것이 걱정됩니다.


김: 3-1절 때 평양에서 김일성 등 요인들을 표적으로 한 몇 차례 폭탄테러가 있었습니다.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양욱(김일성의 외종조부로 기독교계 지도자)의 집에서는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지요. 이 테러를 자행한 백의사(白衣社)가 김구 선생의 추종자 집단이라 해서 이북 민심이 임정과 김구 선생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체포된 범인이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의 ‘승차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갖고 있었다니(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 230쪽)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닌가봅니다.

지난 11월 이래 이남 사회에서 테러가 일상화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민 대중은 38선에 막혀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하고 물자 교류의 단절로 경제가 불구 상태인 지금 38선 넘어 보내는 것이 고작 정치테러라니... 이남 상황의 문제점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입니다.

임정과 김구 선생도 문제입니다. 건국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임정이 내부 단합조차 지키지 못하다가 이런 일에 연루되다니, 환국 당시의 여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안: 백의사는 장개석의 비밀조직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만든 것이라더군요. 임정이 중국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일로 남의사의 도움도 받은 일이 있어서 임정 인사들 중에 그것을 부러워한 사람들이 있었나봅니다. 그러지 않아도 해공(신익희)이 그런 의심을 받아 왔는데, 이번 일로 그 의심이 굳어지겠습니다.

하지만 김구 선생에 대한 의심은 무리하다고 봅니다. 그분이 독립운동에 테러를 사용한 일이 있어서 고하(송진우) 저격 때도 그분을 의심하는 말이 일각에서 나왔는데, 그분은 그 시절에 친일파라도 조선인에 대해서는 테러를 쓰지 않는 원칙을 지킨 분입니다. 다른 투쟁수단이 없을 때 부득이 테러를 사용하셨지만, 해방된 지금 그런 수단을 쓰실 리 없습니다. 다만 주변사람들 단속을 더 잘하실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