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붙어 나온 <금단의 역사를 쓰다, 18년간의 대장정>에서 사전 항목 선정기준에서 문학 분야의 기준을 이렇게 제시했다. (149쪽)


1. 시-소설-수필-평론-아동문학 등 문필활동으로 내선일체-황국신민화-대동아공영권 등 일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찬양-미화하고 파시즘 총동원체제를 선전-선동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2. 조선문인보국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조선문인협회 등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 반복하여 참여한 자.


이에 이어 음악-무용, 미술, 연극-영화 등 다른 문화 분야에도 비슷한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식민지배와 파시즘의 이념에 적극 복무하였는가, 친일 활동에 조직적-지속적으로 참여하였는가, 두 가지 방향을 따지는 것이다.


내가 <친일인명사전>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 선정기준에 절제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범죄행위였기 때문에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의식 때문에 그 범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엄정한’ 비판을 시도할 때, 거대한 범죄의 소소한 구성 요소까지 빠트리지 않으려 애쓰게 되기 쉽고, 그러면 범죄성이 애매한 영역까지 포함하게 되어 논란을 일으키기 쉽다. “식민지시대에 숨 쉬고 살기만 한 것도 친일이냐?” 하는 반론이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민족주의는 민족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강경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가치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온건한 민족주의다. 지나치게 강경한 민족주의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가진 것일 뿐 아니라, 쓸 데 없이 많은 적을 만든다는 점에서 민족의 가치에도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강경한 민족주의 앞에서는 온건한 민족주의자도 반(反)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비(非)민족주의 입장으로 몰리거나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의 민족주의 비판은 이런 구조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반민족주의가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반민족주의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도 민족주의 노선에서 온건한 기조를 지킬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 진영이 선명성 경쟁에 치중하는 것은 민족주의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이다.


2009년 11월 12일 <친일인명사전>을 다룬 MBC <100분토론>에서 사전 편찬에 종사해 온 이들이 어떤 고민을 겪어 왔는지, 그리고 그 고민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 들으며 큰 감명을 받았다. ("허물에 매달려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2009. 11. 13) 그 날 출연한 박한용과 주진오가 사전의 의미를 ‘미니멀리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 한국 상황에 적절한 태도로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만큼 물러선 자세로 여유 있게 친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60여 년 세월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 지배가 막 끝난 시점에서는 친일과 일본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데는 적절한 기준을 잡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논리적 판단의 어려움만이 아니었다. 생활 전체를 지배해 온 ‘일본식’ 처리는 논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35년간 일본 지배를 받는 동안 조선은 나름대로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해방 시점 조선의 ‘근대문화’는 일본의 강한 영향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민족문화의 독립은 민족 독립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문화의 배격만으로 간단히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 독립해야 할 민족문화도 전통시대의 민족문화와 달리 근대문화의 면모를 가져야 하는 것이었고, 배격해야 할 일본문화에는 그때까지 조선에 근대문화의 형성을 이끌어온 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래 기사에서 “일본 군국가요 레코드”라 한 것이 보통 일본 음반이 아니라 ‘군국(軍國)’ 성격의 것만을 제한해서 지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생각건대 일본 지배를 막 벗어난 상황에서 ‘군국’풍의 것만이 아니라 일본풍의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이 널리 일어났을 것 같다. 그런데 해방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근대문화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대안이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일본 음반의 수요가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겠는가.


해방 후 일본잔재 일소와 함께 사라졌던 일본 군국가요 레코드는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 거리의 식당, 바, 카페, 카바레, 다방 같은 대중오락장에서 다시 유행이 되다시피 되고 있는데 7일 본정서 보안계에서는 관하 각 음식점 조합에 일본레코드의 사용을 금하라는 통첩을 발하였다.

동서 高淳文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축음기판은 금후 사용치 않도록 조합을 통하여 주의시키는 한편 방금 2·3식당 업자들을 호출하여 주의를 시키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03월 1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문화적 독립을 위해 근대적 민족문화의 성장이 필요했지만, 그 성장은 하루이틀에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그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문화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벗어나면서 다른 외국의 근대문화를 폭넓게 수입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최선의 문화정책 방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당시 문화정책의 한 모퉁이를 보여준다.


경무국에서는 9일 남조선 전역에 亘하여 소련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라고 발포되어 즉일 실시되었다. (<조선일보> 1946년 03월 12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영화는 소련에서 다른 나라와 다른 문화적 무기로서 힘을 가진 존재였다. 그 힘의 근거는 두 가지에 있었다. 하나는 레닌 이래 소련 지도자들이 선전 도구로서 영화를 중시하고 키워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중심으로 한 근대예술로서의 선진성이었다. 당시 소련군이 한국에 어떤 영화를 들여왔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짐작컨대 공산주의 선전성이 강한 것과 예술적 선진성이 뚜렷한 것이 모두 들어왔을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1955년경 정릉동에서 살 때 마을 복판 고아원 마당에서 서부영화 보던 생각이 난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인에 대한 교육이나 선전 목적으로 골라온 것이 아니라 미군 오락을 위해 들여온 필름을 그냥 대민사업에 썼던 것이 아닐까싶다. 영화에서는 미국의 힘이 소련보다 약했기 때문에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소련 영화 상영을 ‘묻지 마’ 식으로 금지했을 것 같다. 분단 점령은 한국 문화의 발전 조건에도 제약을 가했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