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들어 주한미군의 위상에 관한 하지 사령관의 발언이 몇 차례 나왔다. 미군정에 대한 민심의 악화에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임박한 미소공위에 대비하여 미국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3일에는 미군 장병을 상대로 미군 명예 옹호를 강조하는 포고문을 내보냈다.


하지 중장은 3월 3일 전 주둔 군인에 대하여 포고를 내려 악덕군인을 근절하여 미군의 명예를 옹호하고 조선민족 해방과 구제의 신성한 사명 달성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포고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미군의 명예를 훼상하는 사건이 최근 증가한 것을 우려한다. 지난 수일 동안 서울지구에서 미국군 제복을 입는 자로서 행사된 무장강도로 살인사건이 1건, 기타 무장강도 사건과 조선인에 대한 불법폭행 사건이 그사이 수건씩 일어났다. (略) 우리가 지난번 9월에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우리는 구세주로 조선민족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사도로서 왔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인은 모두가 정직하고 솔직하고 믿음직한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떠한 미국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놀랬다. (略) 나는 나의 지휘 하에 있는 모든 지기를 존중하는 군인이 우리 자신의 진열 중에 있는 것을 절멸하기에 전력을 다하여 협력하기를 요청한다. 그대들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이하에 지시한다.(1, 2, 略)

3) 미국인의 범죄행위에 관한 정보나 혐의를 알 때는 즉시 보고하라.

4) 강도질, 가두요리점, 무도장의 싸움 등에 미 군인이 관련되어 불상사가 나거든 관계한 미국인 MP나 그 사령부에 인도하라.

5) 조선인이 어떠한 점으로나 미국인에 떨어지고 그들을 멸시하며 조롱하여도 좋다는 가장 그릇된 관념을 가지지 말라. 조선인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세계의 어떠한 동양 민족에도 지지 않는 4천년의 문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 중의 가장 영리하고 문화적인 민족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대들의 언어를 알지 못하나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그대들의 언어보다 몇 세기나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문화의 역사와 민족의 순수성을 가진 자랑하는 민족이다.” (<중앙신문> 1946년 03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시 금융조합의 간부 한 사람이 기차여행을 하면서 겪은 미군의 횡포를 1월 31일자 일기에 적은 것이 있다. 식민
지 헌병이나 순사 못지않은 안하무인적 횡포다. 하지의 포고문에 그런 횡포까지 제거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강도질이나 싸움질 같은 것이 단속 대상이다. 질서 유지를 위해 주둔한다는 군대가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질서 유지 방법의 폭력성 정도는 문제 삼을 여지도 없는 형편이었다.


6일에는 분할 점령이 군사적 목적만을 위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1일부 뉴욕타임즈 지가 조선의 남북분할은 얄타회담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시사하는 보도를 하였다는 외전에 접한 이래 조선민중으로서는 이것을 신빙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런데 조선주둔미군 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것을 부정하고 38도선은 다만 미소 양군의 군사적 목적에 의거한 것이라고 6일야에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요즈음 조선 언론계의 논조를 보면 조선인 사이에는 38도선이 얄타협정에서 밀약된 것으로 믿는 경향이 농후한데 38도선 설정에는 그런 역사는 전무하다. 번즈 국무장관은 1945년 12월 13일 방송연설 중에 조선을 점령함에 있어서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미소가 남북으로 나눈 것은 순전히 군사적 목적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경계선은 일본 항복이 기정사실로 된 때에 조선 내의 일본군의 항복과 일인을 철퇴시키고 조선인을 귀환시키는 것을 신속케 하기 위하여 설정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내주 서울에서 열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조선인을 위하여 38도 경계선을 철폐하도록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0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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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 점령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표방되어 왔다. 60여 년이 지나 많은 비밀문서가 발굴된 지금까지 이 명분에 대한 반증은 나타난 것이 없다. 강대국에게 점령이 하나의 이권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상식적 사실을 드러내 표시할 필요도 없었다. 한반도에서 이 이권을 두 강대국이 나눠가지는 데 다른 연합국들은 이의를 제기할 힘이 없었다. 다만 점령의 명분을 피점령지 인민을 위한 것으로 명시함으로써 노골적인 세력화를 견제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목적’이라 함은 조선 인민을 위해 일본의 군사력-행정력-경찰력을 해소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둔 반년이 되는 시점까지 명분에 어긋나는 미군의 행태가 너무 많이 드러나 왔다. 소련군의 주둔에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소련군이 조선 인민의 ‘협력자’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만은 분명했다. 반면 미군정은 자신을 “한반도 남반부의 유일한 정부”로 주장하며 조선 인민의 ‘지배자’ 역할을 해 왔다.


현실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음모론이 활개를 친다. 이 때 나온 음모론이 ‘얄타 밀약설’이었다.


지난 12월 22일자 일기에서 이승만의 얄타 밀약설을 언급했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앞두고 미국 반소-반공주의자들의 총대를 멘 일이었다. 그때의 밀약설은 미국이 조선을 소련에 팔아넘겼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모스크바 3상회담 뒤 1946년 들어 나온 밀약설은 미-소가 한국을 갈라먹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이해할 수 없는 정책 때문에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는 데서 나온 음모론이었다.


같은 무렵 중국에서도 다른 내용의 얄타 밀약설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와 연합국으로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국-공 대립이 심화하는 데 따라 중국에 대한 소련의 애매한 태도가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혁명 가능성을 믿지 않고, 국민당과의 흥정을 통해 실리를 확보하려 했다. 얄타협정에서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1905년 포츠머스조약 이전 제정러시아의 영토와 이권 회복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얄타협정은 미-영-소 3국 사이에 체결된 것이었고 중국과 관련된 내용은 장개석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본 항복 후 소련은 중국의 국-공을 상대로 양면 전략에 나섰다. 공개적으로는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면서 암암리에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도와준 것이었다. 만주에서 항복받은 일본군 무기를 공산군에게 넘겨주고 공산군의 진격에 맞춰 만주 철수 일정을 잡았다. 그래서 공산군이 쉽게 만주 지역에 세력을 심을 수 있었다. 공산당의 저항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국민당 정부와의 흥정을 유리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가 중국의 주권을 팔아넘긴다고 비난했고, 과거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당의 유화적 대응방식 때문에 이 비난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 효과를 제한하기 위해 미-영-소 3국은 1946년 2월 10일에 얄타협정 내용을 동시에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발표 내용을 넘어서는 밀약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은 그치지 않았다.


3월 6일에 하지는 미국의 한국 원조 방침도 발표했다.


미 국무성은 건국 도상의 조선 경제와 재정 건설을 독립 원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6일 하지 중장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미 국무장관 번즈도 이 문제에 대하여 동일한 언명을 하였다.

“일본의 악독한 영향의 감염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강력한 경제를 건설하는 데 조선을 원조코자 하는 문제를 미 국무성에서 신중히 고려중이다. 재정적 문제에 대하여도 될 수 있는 데까지 원조하게 되었으며 경제발전정책국의 골든·스트롱 씨가 이에 관한 필요한 정보를 수집코자 조선에 파견되었다. 스트롱 씨는 하지 중장의 경제 농업 고문 번스 씨와 협력하여 활약할 것이다.

조선의 산업계와 운수계를 재건하고 개선하는 데 조선이 재정적으로나 기타 방면으로 필요한 것을 스트롱 씨는 조사할 것이다. 이리하여 수집된 정보는 일반적으로 이 기획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동시에 조선 임시(과도)정부의 요구로서 특별부문에 있어서 원조를 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임시과도정부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수립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방침은 조선의 경제발전을 원조함에 있어서는 조선 임시(과도)정부와의 일정한 조건 하에서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6년 03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이 방침은 임시과도정부가 수립될 경우를 가정하여 남한만이 아니라 한국 전체를 대상으로 할 것을 표방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미군정을 통한 남한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소련과 함께 원조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인데, 소련과 의논하려는 노력은 이 시점까지 없었다.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함께 경제력에 있었다. 군사력에서는 소련에 대한 우위가 원자폭탄 하나에 걸려 있었지만, 경제력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국인 소련은 자국 산업의 소생을 위해 독일과 만주에서 기계를 걷어가야 할 지경이었다.


한국 경제의 자생력은 분단 상황, 특히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크게 손상되었다. 이남 지역의 가장 중요한 생산품인 쌀 시장이 혼란에 빠져 이북과의 물자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해방 당시 한국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기반조건은 아시아 국가 중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군정 기간에 빠진 ‘원조경제’의 수렁이 한국을 수십 년간 미국에 대한 예속 상태에 붙잡아놓게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