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은 “제1공화국과 친일세력”의 맺음말에 에피소드 하나를 실어놓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2> 230-231쪽)


일제하에서 C씨에게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 부친은 한말의 관찰사 출신으로 경북에서 갑부로 이름이 높았다. 1915년, 광복단 단장 박상진이 군자금을 청하러 갔을 때 C씨의 부친은 형사에게 밀고해서 매복을 하게 하였다. 격분한 박상진이 현장에서 그를 사살해 버린 사건 1막이 있었다.

C씨의 부친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장남은 구한국 관료 출신으로 일제하에서 경북 모 은행장이었다. 차남은 중추원참의를 수차 중임했으며, 대구부의-경북도의-대구상의 회두-총력연맹 평의원-대화동맹 심의원 기타를 한 사람이다. 이러한 계보로서 볼 때 3남인 C씨는 본인의 친일행위는 없었지만, 그 가문이 친일 계층에 속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해방 후 C씨가 군정청 XX청장에 기용됐을 때 몇 사람이 국일관에서 C씨를 만나 말했다.

“이제 군정의 XX권을 가지셨으니 독립운동자에게도 잘해야 안 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C씨의 답변은 냉정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자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동정하겠느냐 말이오.”


임종국이 <중앙일보> “잃어버린 36년” 제29회에서 인용했다는 이 글에서 왜 장택상(1893-1969)을 “C씨”라고 적었는지 모르겠다. 장택상이 임정 인사들을 적대했다는 이야기는 <위키백과>에 《상록의 자유혼》(장병혜, 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1992) 등을 근거로 이렇게 적혀 있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장택상은 전폭적 지지환영을 하여 김성수·송진우·조병옥·김준연·백관수 등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방문하였다. 오후 3시에 경교장에 도착하자 경비원 5, 6명에게 제지당하였다. 경비원들은 문밖에서 기다리라 하였으나 감감무소식이었고 장택상과 일행은 3시간 동안 영하 15도의 혹한에서 경교장 정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한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고자세에 반발한 장택상은 김구를 이후 부정적으로 보게 됐다. 또한 우익 청년단원들이 미군정 경찰청에 감금당했을 때는 김구, 김성수, 조소앙, 신익희 등으로부터 석방하라는 전화를 계속 받으며 장시간 전화 통화에 시달림당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2일 장택상은 환국지사후원회를 국민대회 준비회 대표 송진우와 함께 임정요인들을 예방하면서 후원회 기금 900만원을 전달하였다. 12월 29일 새벽의 반탁운동의 방향에 대한 경교장 모임에 참석했다. 경교장 회의에서 송진우는 미군정에 대항하면 무력 충돌이 발생하거나 정권이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무력 충돌은 자제해줄 것을 촉구했다. 12월 30일 새벽 2시 송진우와 함께 돌아가던 길에 같이 밤을 보내자는 송진우의 요청을 거절하고 수표동의 자택으로 되돌아갔다. 새벽 6시 송진우가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유근배 외 5명의 청년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원서동의 송진우 자택으로 찾아갔다. 송진우의 빈소에서 그는 송진우의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했는데, 이후 그는 임시정부 측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미군정에 의해 조병옥과 함께 경찰의 중책을 맡은 장택상은 조병옥의 엽기적 행각과 쌍벽을 이루는 저돌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화제를 모았다. 이미 소개한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 습격사건은 마수걸이일 뿐이었다. 1946년 5월에는 공산당 전면 탄압의 출발점이 된 ‘정판사 위폐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서북청년단을 공공연히 지원하기도 해서 ‘좌익 탄압의 괴수’로 지목되었다.


우익 내에서도 임정 등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자세를 보인 것은 이승만과 밀착된 파당적 입장으로 보이고, 위에 소개한 일화들은 그 자세를 뒷받침한 것이었다. 1948년의 5-10선거와 이후의 두 차례 보궐선거에서 큰 영향력과 지명도를 가진 그가 연거푸 낙선한 데서 얼마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장택상이 조병옥보다 앞서 나간 분야는 검열이었다. 그가 2월 7일 발포한 극장 및 흥행 취체령의 기준 중에는 “계급투쟁의 의식을 유발 고취하는” 것도 있었다. 좌익을 겨냥한 정치검열이었다. 취체 방법도 경찰관이 공연에 임석해서 중단, 수정, 또는 삭제를 요구하는 강압적인 것이 있었다. 식민지시대보다 더 심한 조치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이 취체령은 한 달 만에 취소되었다.


물의가 분분하던 흥행 및 극장취체방침에 대하여, 경기도경찰부에서는 재검토를 거듭한 결과 7일 제일선 경찰서에 통첩을 띄워 흥행검열제를 일제 폐지하도록 통달하였다. 그리고 만일 흥행 자체가 풍기 도덕을 문란케 하는 경우에는 경찰부정보과와 소관서장이 흥행각본을 신중히 검토하여 확실히 해독을 인정할 때만 비로소 정보과장, 서장의 명령으로 이에 간섭하게 되었으므로 제일선 경관이 자기 마음대로 임석하여 연극을 중지시키거나 취체할 수는 없게 되었다. 앞서 잠시 동안 실시했다는 검열은 어디까지나 3·1기념연극을 중심으로 한 잠정적 조치였으며 현재는 이러한 검열방침은 폐지되고 있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1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러나 장택상은 기자단에게 이 취체령이 법령이 아니라 ‘통첩’일 뿐이었다고 발뺌했다.


“풍기를 문란케 하며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은 흥행을 제일선 경찰에서 적당히 취체하라는 통첩을 띄운 일은 있으나 그와 같은 극장 및 흥행취체령을 공식으로 발표한 일은 없다. 소위 취체령이라고 말하는 10개 조목은 제일선 경찰에서 대략 그와 같은 요령으로 취체하라는 기준 방침이지 이를 법령으로서 적용하라는 명령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중에도 제 10조와 같은 계급, 파벌, 투쟁의식을 유발·고취하는 것 운운은 상식으로는 이해 못할 말이므로 단연 전면적 철폐를 하겠다. 그리고 각본 검열제는 절대로 실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위에 말한 풍기 도덕상 용납 못할 흥행은 때에 따라 각본을 검열할지 모르나 항간에 떠돌고 있는 말과 같은 그러한 몰상식한 연극 금지, 검열 간섭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0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극장 및 흥행 취체령의 포기가 거센 반대 때문일 뿐이지, 민주주의에 대한 장택상의 이해가 깊어진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불과 십여 일 후의 ‘집회 허가제’에서 알아볼 수 있다.


경기도경찰부, 경성부내 집회 허가제 실시
서울 시내에서 시위행렬과 집회를 하려며는 허가원에 발기인의 집회 이유와 성질, 집회일자, 집회장소, 개회시간, 폐회시간, 출석인원수, 대표자가 집회에 경관을 안내하기 위하여 출두하는 시간과 경찰 서명 등을 명기한 서류를 첨부하여 집회시간 48시간 전에 경기도경찰부 정보과에 출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일보> 1946년 03월 19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뿐인가? 장택상은 1년 후인 1947년 1월 31일 '예술을 빙자한 정치선전의 전면금지' 특별고시로 이 취체령을 사실상 다시 부활시켰다. 그 상황을 나중에 검토하겠지만, 이승만이 군정청에 대항하고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완전히 장악된 경찰 또한 군정청의 통제를 벗어난 시점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반탁·찬탁을 에워싸고 민심이 들뜨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앞서 이에 관련된 포고를 내린 제일경무총감부에서는 31일 다시 흥행업자에 대하여 경고의 고시를 내리어 요즈음 오락을 빙자해서 정치적 선전을 일삼는 흥행업자가 있어 경찰은 엄중히 감시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 방법으로써 치안교란을 꾀하는 자는 군정 위반으로 엄벌할 것이다라고(요지) 하였다. 이에 출입기자단에서는 이 고시가 혹 문화의 창달을 구속할 염려가 있지 않은가 하고 질문한 데 대하여 장 총감은 이 고시의 취지는 순전히 군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함부로 흥행의 문화성을 간섭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요컨대 불온한 객관정세에 비추어 고시의 본 취지를 선용함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조선일보> 1947년 02월 0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시의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1947년 1월 군정청 공보부의 검열을 마친 <해방뉴스>와 <조련뉴스>가 서울을 위시하여 대도시의 상영을 거쳐 경남 통영에서 상영되던 중, 광복청년단원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테러단을 처벌하기는커녕 돌려보냈고 필름 탈취도 그냥 방치하였다.

그간 우익 청년단체들이 전담해 오다시피 한 ‘극장 통제’에 경찰도 발 벗고 나섰다. 1월 30일, 수도경찰청장이자 한성극장협회 명예회장인 장택상은 ‘흥행취체에 관한 고시’를 발표하였다.

“최근 시내 각종 흥행장소에서 오락을 칭탁하고 정치선전을 일삼고 있는 흥행업자가 다수한 듯하다. 경찰은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다. 민중의 휴식을 목적하는 오락 이외 정치나 기타 선전을 일삼아 정치 교란을 양성한 자는 포고령 위반으로 고발하여 엄형에 처함.” (<한국현대사산책 2> 71-72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