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단체의 움직임 두 가지가 눈에 띈다. 그 하나는 11월 15일에 결성된 독립촉성청년연합회 19단체 대표 60여명이 25일 1시에 국민당 회의실에서 합동위원회를 열어 독립촉성중앙위원회로 명칭을 고치고 독립 장애물 제거에 합동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이다. 19개 단체는 아래와 같다.


조선청년동맹단결본부, 상록회, 유학생동맹, 조선청년회, 조선청년건의단, 조선군인동맹, 건설청년동맹, 정의청년회, 무궁회, 만주동지회, 자유청년동맹, 동북청년회, 남화조선인청년연맹, 조선청년동지회, 고려청년당, 양호단, 애국동지회, 국민당청년부, 북선청년회.


이 모임의 대표위원 60명은 며칠 후 김구 주석을 방문하고 주석의 열렬한 훈시에 대하여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여서 신민주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청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겠다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5년 11월 30일)


회의를 국민당 당사에서 열었다는 것으로 보아 국민당 안재홍 위원장의 노선에 동조하는 범위의 단체들인 것 같다. ‘독립촉성’이란 이름도 안재홍의 영향을 보여준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이승만의 조직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이름은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다. 건준의 ‘건국준비’도 안재홍이 제안한 것이었다. 임정이 건국의 주체가 되기 바라면서도 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재홍은 건준과 독촉의 결성을 모두 지지하면서도 그 역할이 기능적 수준에 머물기 바랐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이름을 제안한 것이다.


설명이 없어도 27일 안재홍이 김구를 만났을 때 이 모임 대표들과의 만남을 주선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재홍은 임정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인해주고 싶었고, 또한 자기 노선에 동조하는 범위를 과시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25일에 또 하나 청년단체 연명의 임정 지지 성명서가 나왔다. 22개 단체 중 독립촉성중앙위원회 19개 단체와 겹치는 것은 양호단과 국민당청년부 둘이다. 그밖에 ‘전국청년건의단’과 ‘조선청년건의단’, ‘자유청년동맹무궁회’와 ‘무궁회’도 같은 것이었을 것 같다.


조선건국청년회, 리청천장군동기급후배장교, 전국청년동지회, 국풍회, 양호단, 학도별동대, 광복청년회, 철권단, 한국청년단, 흥국청년회, 백악청년동맹, 조선청년회, 국민당청년부, 유학생동맹총본부, 전국청년건의단, 고려청년단, 자유청년동맹무궁회, 불교청년당, 중국유학생회, 정진청년회, 의열단, 전조선순국학생동맹.


도합 37개 내지 39개 단체가 같은 날 이름을 내걸고 있었으니, 그중에 명확한 실체를 가진 것이 몇 개나 되었을지 의문스럽다. 후자 22개 단체 중 ‘국풍회’, ‘철권단’ 등 호전적 느낌의 이름들이 더 많이 눈에 띄고, ‘리청천장군동기급후배장교’란 것이 어떤 단체였을지 궁금하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조직을 만들고 광복군 이청천(지청천) 장군을 간판으로 내건다? 초급장교 때 탈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청천의 길을 받들 만한 일본 육사 동기와 후배들이 누가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친일파로 몰릴 위치에 있던 일본 육사 출신들이 간판이야 무엇이든 뭉쳐서 이름을 내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22개 단체 성명서는 임정 지지 못지않게 인공 배척에 중점을 둔 내용이었다. 그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 유일의 정통정부이다. 27년간 민족해방을 위하여 혈투를 계속하여 왔으며 국제무대상 우리 민족의 유일한 대변자로 사실상 승인정부로써 활약하여 온 사실은 누구나 부인치 못할 것이다. 其間 국내의 혼란을 이용하여 국호를 참칭한 자 있으나 그것은 대한임시정부의 건국사상 위대한 공적과 오랫동안 이 정부에 歸依支待하여 온 국민적 충의심을 이용하여 이 정부요인의 명의를 임의도용하여 狐假虎威격으로 일시적 국민을 기만한 데 불과하다. (...)

李承晩 박사가 그들 참칭국의 주석이 아니심을 성명하였고 또한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 임시정부를 국내에 맞이한 오늘, 임시정부는 우리 국민의 유일한 정통정부이다. 우리는 민족적 양심에 비추어 우리 임시정부에 수립하는 일체의 조직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유신문 1945년 11월 2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같은 22개 단체가 23일에도 전단으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있다. (똑같은 순서로 이름이 배열되어 있는데, ‘자유청년동맹’과 ‘무궁회’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 둘이 별개의 단체라면 23개 단체다.) 20~22일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를 취재한 ‘악덕기자’들을 경고한 것이다.


惡德기자에게 경고함

吾等이 사기적인 소위 인민공화국을 배격하고 우리 혁명열사들의 혈투로써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만을 유일의 우리 정통정부로서 지지하여 하루 바삐 귀국하기를 고대한다는 것은 이미 성명한 바다. 그런데 자칭 인민공화국은 소위 인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고 인민공화국을 적법화하려 하며 민심을 더욱 현혹케 하려 한다.

吾等은 이 간악한 태도를 匡正하고 소위 대표자들의 숙청을 期하는 의미에서 지난 20일, 21일, 22일, 3일에 亘하여 그들의 회합을 방해하고 만일 不成하면 폭력으로서라도 그것을 저지하려 하였었다. 그런데 불행히 吾等의 계획은 MP의 제지로 성공치 못하고 원한을 후일에 남겼거니와 일부 악덕기자와 신문사는 吾等의 행동을 폭력단이니 모 정당으로부터 금전에 매수되었느니 하여 우리의 의거를 매도하고 자칭 인민대표회의를 3천만 민중의 총의에서 나온 회합이라 한 것은 신문기자의 정의를 옹호하는 양심을 잃어 버렸을 뿐 아니라 인민공화국에 매수된 추악한 행동이 틀림없다.

吾等은 신문기자 중에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로써 皇道主義를 선전하고 총독부관리들의 公私忠犬이던 자로써 소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자가 있음을 숙지한다. 汝等이 前非를 회개한다는 의미에서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면 贖等의 죄악은 일층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汝等은 속죄의 의미로서 공정한 필봉을 들어야 할 것이다. 不然이면 정의의 快刀가 너희를 분쇄할 것이다.

打倒人民共和國

大韓民國臨時政府萬歲

檀紀 4278년 11월 23일

大韓民國臨時政府支持 朝鮮靑年團體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의 절대 지지와 인공의 극한적 배척은 출범하던 9월 초순부터 한민당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같은 주장의 22개(또는 23개) 단체 성명서는 한민당의 사주에 의한 것일 개연성이 있다. ‘독촉’ 이름의 19개 단체가 당당히 김구와 접견한 반면 22개 단체가 성명서 한 장 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도 주도세력이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암중 공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2개 단체 중에는 ‘국민당청년부’ 등 명의를 도용당한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인공의 노선에는 많은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안재홍은 임정의 권위에 도전하는 의미를 가진 ‘공화국’이란 이름 자체에 반발해서 자신이 산파역을 맡았던 건준을 떠났다. 여운형은 안재홍처럼 임정을 중시하지 않았지만, 인공의 조직과 부서 결정을 반대한 것은 역시 임정의 상대적 우위를 인정한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허헌을 앞세운 박헌영 세력은 인공을 임정과 대항하는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온갖 무리한 짓을 다했다.


인공 노선에 대해서는 좌익 내에서도 광범한 비판이 있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정권 획득이라는 결정적 투쟁을 극소수의 전위만으로 결행하는 ‘극좌적’ 경향에 빠져, 9월 6일의 인민대표회의에서 민족 대중의 총의를 완전히 무시한 종파적 구성을 했다고 재건파공산당을 비판하고, 인민대표회의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전후하여 미족문제 해결에서 범한 극좌적 경향을 급속히 청산하여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실현하자고 주장했다.

북한의 공산당은 1945년 10월 13일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 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에서, “앞으로 수립되어야 할 정권은 친일 반동분자를 제외한 모든 계층을 망라한 정권”이어야 하고, “통일된 유일한 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조서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우리의 과제는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라고 천명하여 사실상 서울에 있는 기존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하였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26쪽)


많은 비판을 모았음에도 인공에는 큰 정치적 가치가 잠재해 있었다. 그 상부조직은 박헌영 일파의 ‘극좌’노선에 휘말려 생산적 기능을 잃고 있었지만, 지방 하부조직인 인민위원회는 인민의 독립 의지를 수렴하는 역할을 키워가고 있었다. 미군정 당국자 중에도 이 가치를 직시한 사람들이 있었다.


(군정사령관의 노동 고문) 미첨은 미군이 인민공화국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하지는 인공을 “소련군이 북한에 세운 공산주의 인민위원회 정부의 남한 지부”라 불렀고,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조종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첨은 여운형을 자유주의자로 보았지만 하지는 “철저히 의식화된 코민테른 공산주의자”로 보았다. (...) 하지는 한국인들이 군정 하에서 참으로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남한에서 반동 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 장군이 부정하지 않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뒤에도 살아남을 만한 민주주의 개혁이 자리 잡았다고 그가 주장하지도 않는다.” 하는 것이 미첨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어 철저한 토지개혁과 경찰의 혁파, 정부로부터 ‘극우파’의 추방과 공정한 선거 과정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이 모든 것이 조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공산주의 이외의 선택이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B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p 440, 김자동 번역판 538쪽에는 스튜어트 미첨의 이름이 ‘미캠’으로 되어 있다.)


안재홍은 전심전력을 쏟던 건준 사업을 인공 때문에 포기했으니 인공과 가장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공을 비판하면서도 인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인공이 노선을 수정해 건국 대열에 동참할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다.


11월 23일 22개 단체 성명서에서 ‘악덕기자’들을 친일파로 몰아붙인 것은 9월 8일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서 건준-인공 인사들을 친일파로 매도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아무 근거가 없는 맹목적 비난이라는 점이 두 성명서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증거고 나발이고”의 뿌리다. 인공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다.


11월 26일 인민위원회 도 대표 몇 사람이 경교장을 방문했으나 김구는 만나지 못했다. 그 기사에서 “개인의 자격”이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임정 요인들의 귀국이 ‘개인 자격’이라고 하지와 이승만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는데, 이제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의 ‘개인 자격’을 강조하고 있으니, 안 좋은 것일수록 배우기 쉬운 모양이다.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던 위원 가운데 서울, 경기, 충북, 충남, 전북, 경남, 함남, 황해 등 각도 대표는 개인의 자격으로 26일 오전 11시 金九의 宿舍를 방문하고 그 일행의 환국을 환영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로 의견을 바꾸려 하였는데 이때 金九는 외출하고 없어 金奎植, 柳東說, 嚴恒燮과 회견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들로부터 “선생 일행의 귀국을 충심으로 환영하는 동시에 선생들의 苦鬪에 경의를 표한다. 현하 긴급한 문제는 우리 민족의 총역량을 집결통일하는 데 있다. 민족통일을 확립함에는 우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할 것을 원칙적으로 해야 된다. 그리고 통일정부는 반드시 전국 각지의 인민대중의 요망을 토대로 출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특히 이 자리에서 38도 이북의 실정 보고는 요인 측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하였고 각 대표의 성의에 감사하는 동시에 장차 국내실정 조사에 있어서 지방 인민대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자고 약속을 한 다음 극히 원만한 가운데 회담은 끝났다. 그리고 이날 방문한 대표는 다음과 같다.

서울 徐重錫 金光洙 / 京畿 朴衡秉 / 忠北 張埈 / 忠南 權寧珉 / 全北 崔鴻烈 / 慶南 尹一 / 咸南 黃鴻霆 / 黃海 宋彦弼

서울신문 1945년 11월 2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임정 요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38도 이북의 실정”뿐이었겠는가? 이남의 지방 실정도 이 사람들보다 더 잘 전해줄 다른 조직이 없었다. 박헌영 일파가 주무르고 있던 인공 중앙이라면 몰라도, 진정한 정치적 가치를 갖고 있던 지방조직 대표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것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