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8:01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소인정치의 시대
기사입력 오전 8:37:09
소인정치(小人政治)의 시대 중국의 고대봉건제에서 지배 계층, 즉 제후(諸侯)와 대부(大夫)를 군자(君子)라 했고 피지배 계층, 즉 서인(庶人)을 소인(小人)이라 했다. 군자와 소인은 말하자면 정치사회적 계급의 호칭이었던 것이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고 한 것도 신분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사회 질서의 원리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피지배 계층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반면 지배 계층은 명예를 아끼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자는 도덕성을 기준으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는 관점을 세웠고, 군자와 소인은 도덕적 계급이 되었다. 10세기에 세워진 송(宋)나라는 종래 왕조의 직접적 인신(人身) 지배와 달리 관료 집단 중심의 통치 구조를 만들었다.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떠오른 사대부(士大夫) 집단은 이념에 따라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는 스스로를 군자로 자처하면서 정치 이념과 무관한 피지배 계층을 소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같은 지배 계층 속에서 자기 뜻에 맞지 않는 부류를 사이비(似而非) 사대부라는 뜻에서 소인으로 규정했다. 의리(義理)를 추구하는 군자의 모임인 붕(朋)과 이익을 좇는 소인들의 모임 당(黨)을 구분해서 보는 구양수(歐陽修)의 붕당론(朋黨論)은 지배 계층의 붕당 현상이 정치 구조의 한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순기능과 역기능을 아울러 드러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좋은 붕당은 훌륭한 정치를 가져오지만 나쁜 붕당은 정치를 망치는 최대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정치를 얘기할 때 '당쟁(黨爭)의 폐해'를 누구나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아직도 청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심어준 통념대로 조선 정치사가 소모적-파괴적 당쟁사 뿐이었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겠냐고 당쟁사 연구가 박광용 교수는 반문하며 선인들이 추구한 군자정치(君子政治) 이념의 계승이 현실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의 정당들은 도덕성을 강조한 동양 정치의 전통도, 정책 노선을 추구하는 서양 정치의 원리도 일체 아랑곳 않는 것 같다. 지방대의원의 양식을 못 믿어 중앙당의 공천 심사권을 강화하는 여당이 세(勢) 불리기를 위해 지구당을 조정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권력과 이익을 따라서만 정당이 움직인다면 민주주의는 어느 곳에 깃들인단 말인가. (1998년 5월) |
▲ "말도 안 되는 판결을 거듭거듭 내리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프레시안 |
내가 어릴 적에는 '유교 망국론'이 '당쟁 망국론'과 함께 우리 사회에 상식처럼 통하고 있었다. 지금은 유교와 당쟁이 동아시아 문명과 조선 정치의 핵심이었다는 사실과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들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측면이 밝혀짐에 따라 인식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유교의 도덕 정치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문제에만 몰두해서 민생 등 현실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회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혐의가 일반인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도덕 정치와 대비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현실주의 정치다. 20세기 초반 열강의 침략 앞에서 동아시아의 선구적 지식인들은 서양인의 현실주의를 부러워하며 과거의 도덕주의를 반성했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유교의 일부 문제점을 지적해 주자 그것을 열렬히 증폭시켜 유교와 도덕주의를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주의도 서양에서 절대적 진리로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스트'는 비판의 의미를 품은 말로 통한다. '서양 오랑캐'라 하지만 그들도 도덕의 중요성을 나름대로 이해한다. 특히 공직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명료한 의식이 형성되어 있다.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을 제한하는 도덕성이 공직에서 문제가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공직에는 개인의 힘이 경쟁하기에 너무 강한 공권력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자기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넓은 범위에서 허용된다. 사법적 기준에만 걸리지 않으면 도덕적 기준으로는 별 제한이 없다. 그러나 공직자의 공권력 행사를 이처럼 너그럽게 허용했다가는 사회 질서가 남아날 수 없다.
도덕 정치가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것은 국가의 공권력이 높은 수준까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마키아벨리 시절까지 그런 규모의 공권력이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그 후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공권력 남용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서양의 힘을 너무나 선망한 나머지 과거의 도덕주의에 대한 반성이 지나쳐, 도덕성을 무시하는 풍조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 가운데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을 놓고 한국 대통령이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하냐?" 하는 장면이 이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에서 도덕주의의 힘이 유교의 도덕주의보다 아무리 약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은 나쁜 짓"이란 기초상식은 지켜지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그 정도 기초 상식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미디어 법 관계 헌법재판소 판결은 무엇보다 공직의 도덕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헌법재판소…참 해도해도 너무한다. 법률의 의결 과정에 하자가 있어도 의결된 법률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수도 이전 위헌 판결에서 보인 헌법재판관들의 어처구니없는 수준 문제가 그대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일이다. 아니, "관습 헌법"? 헌법재판소는 헌법 만들어내는 데가 아니란 말야! 국민이 원하는 헌법은 정당한 절차 거쳐서 대충 만들어 놨어! 꼭 고치거나 보탤 게 있으면 또 정당한 절차 밟아서 만들 거야! 재판관 너희들 입맛대로 만들어줄 필요 없단 말야!
이 어처구니없는 수준이란 것이 기술적 수준은 아닐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법률로 밥 벌어먹고 살아온 재판관들에게 기술적 문제가 있다면 더 나은 수준을 누구에게 바라겠는가? 도덕성의 수준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도덕성이란 게 뭔가? 양심껏 행동하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의 질에 얼마간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수준이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사람들이 이해관계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사회가 크게 잘못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이 도덕주의 관점이다.
자기를 희생시켜 국가와 민족에게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이익을 버리면서 남들에게 잘해주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신분과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라는 것이다. 헌법재판관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여러 가지 얘기할 수 있겠지만,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불신을 받지 않도록 애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는가?
"입법 과정에 불법성이 있지만 법률의 효력에 문제가 없다." 온갖 패러디를 즉각 불러일으키는 이런 판결 내용을 놓고 이해관계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호불호를 떠나, 헌법재판소의 기능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판결 내려줬다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헌법재판소의 국가 질서 유지 기능에는 기대감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권 유지 기능이라면 몰라도.
이완용을 생각해 보자. 당대의 어느 누구 못지 않은 교양과 기능을 아울러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의 최고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일합방이 잘된 일이라고 우기는 뉴라이트 논객들조차도 이완용까지는 옹호하고 나서지 못한다. 자기 신분과 역할에 대한 책임을 너무 뚜렷하게 등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을 거듭거듭 내리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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