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7:36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刀筆吏의 시대
기사입력 오후 3:31:38
刀筆吏의 시대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정치 사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였다. 전체적으로는 유가가 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진(秦)나라는 법가를 채택해 부국강병을 이룸으로써 천하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가는 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하게 된 원흉으로도 꼽힌다. 시황제가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해 유능한 인재를 멋대로 죽이고 나라를 망친 것은 법가에 의거한 맹목적 통치체제 덕분이었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형식적 법률체계에 매달려 백성을 편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이 반란군 쪽으로 휩쓸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漢)나라가 법가를 기피한 것은 이런 나쁜 평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율적 통치 방법으로 법가의 매력을 황제들은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무제는 법가 전통을 이어받은 혹리(酷吏)들을 많이 등용했다. <사기> '혹리열전'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장탕이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3공의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신분에 오른 것은 법체제의 정비와 집행을 엄혹하게 한 공로 덕분이었다. 너그러운 정치를 주장하던 순리(循吏)의 대표적 인물 급암(汲黯)은 혹리들의 득세가 민심을 각박하게 만든다고 탄식하여 "도필리(刀筆吏: 기능직 관리)에게 정치를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이 맞음을 장탕을 보면 알 수 있다. 천하 사람들이 외발로 서 있는 듯 불안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했다. 장탕이 후에 모함에 걸려들어 엄혹한 법집행의 대상이 되었을 때 결백함을 밝히려고 발버둥을 치자 오랜 동료 조우(趙禹)가 타일렀다. "자네의 고발로 신세를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네가 쓰던 법망에 이제 자네가 걸려들었는데 이 법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이에 장탕은 체념하고 자살하였으며 덕분에 그의 명예와 자손은 보전되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혹리열전' 서문에서 정(政)과 형(刑)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德)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규제보다 심리적 감화가 질서의 중요한 원천임을 지적하며 법치의 한계를 말한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걸핏하면 '법적 대응'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정치'의 실종을 걱정하게 된다. '법적 대응'은 의혹을 푸는 유일한 길도 완전한 길도 아니며 정치의 사회 지도 기능을 없애는 길일 뿐이다. 무제 때 혹리들은 법치의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도입, 황제의 통치를 쉽게 만들어줬지만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기들 신세도 망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계할 일이다. |
▲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깨뜨렸다고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품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퇴임 후 1년 동안 털어서 찾아낸 '떡'이 왕년의 '떡고물'보다 초라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 국론 분열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해먹어도 치사하게 해먹었다"고 하는 노까들과 "드셔도 참 서민답게 드셨다"고 하는 노빠들 사이에? ⓒ프레시안 |
지난 1월 23일 이 자리에 올린 10년 전 칼럼 "황제의 꿈"은 진시황 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법치 원칙 회복과 함께 지도력 육성과 도덕성 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필요로 한다"고 결론 맺은 것이었다. (☞관련 기사 : 황제의 꿈)
며칠 전 '박동천 칼럼' "'진시황 식 법치'로 가는가?"를 보니 법치를 "법으로 다스림"과 "법이 다스림"으로 구분한 것이 눈에 띈다. 중국 고대에 형성된 법가 사상과 서양 근대에 만들어진 법치 관념을 멋지게 대비한 시각이다.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중국의 황제 제도의 전제적 성격이 이 시각에 잘 포착된다. (☞관련 기사 : '진시황식 법치'로 가는가?)
그러나 현실은 관념처럼 산뜻하게 재단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중국의 경우 "법으로" 다스린다 하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법이" 다스리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당 태종(627~649)은 가장 강력한 전제권력을 누린 중국 황제의 하나다. 태자였던 형을 제거하고 그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는 목숨을 걸고 보필한 심복들이 있었다. 그가 제위에 오른 10여 년 후 심복의 하나인 당인홍(黨仁弘)이 비리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태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현대의 법치에서도 용인되는 국가 원수의 사면권 행사를 위해 막강한 전제군주 태종이 이런 요란을 떤 것을 한낱 제스처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제스처에도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스처라도 이 제스처는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 은밀히 개입하지 않고 판결을 존중하는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태종의 처남이자 중신이던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봉칙 편찬한 <당률소의(唐律疏議)>가 태종 사후 반행된(653) 사실에 이 에피소드를 비쳐볼 수 있다. 당시의 당나라에서는 법치의 확립이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다. 제도적으로 볼 때 당시의 법은 의회 아닌 천자가 정하는 것이었으니, 법이 통치의 주체가 아닌 도구였다고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천자 자신의 노력에 따라 법을 통치의 주체에 가깝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법을 만드는 것이 천자 아닌 의회라 하여 통치의 주체로서 법의 위상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천자가 만들더라도 천자 자신이 지키면 법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요, 의회가 만들더라도 의회 스스로 법을 잘 지키지 않으면 통치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과정 역시 천자의 이름으로 만들더라도 엄정한 절차를 밟을 수 있는 반면 의회에서 만들더라도 날치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법이' 다스리게 하기보다 '법으로' 다스리고 싶은 유혹을 권력자는 느낀다. 진나라에 법치의 뿌리를 심었던 상앙(商鞅)이 권력을 잃고 법망에 걸려 탄식한 이래 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집행하는가 하는 것은 중국사 전개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중세 유럽이 로마제국의 법체계를 잃어버리고 약육강식의 정글에 빠져 있는 동안 수당(隋唐) 제국은 고대 제국의 법질서를 회복하고 발전시켰다. 법의 과용과 남용이 이후 중국사에서 거듭 문제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법치의 원리는 중세를 통해 유럽 문명보다 중국 문명에서 더 큰 비중을 지켰다.
1748년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들고 나올 때는 인간을 초월하는 자연 법칙을 과학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에 뒤따라 인간 세상에서도 불변의 법칙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유럽 사상계에 떠돌고 있었다. 이 불변의 법칙을 법률로 제도화한다면 '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근대적 법치 정신의 출발점이었다.
법치의 전통이 약하던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이상적 법치에 대한 환상을 억제하는 경험이 적었다. 중국에는 진시황 이후 그런 환상이 사회를 지배한 일이 없다. 사마천이 <사기>에 '혹리열전'을 두고 형정(刑政)보다 예덕(禮德)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환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그 태도는 중국 문명의 꾸준한 전통의 하나가 되었다.
예덕이 경시되고 형정만이 힘을 쓰는 '도필리의 세상'에서 법은 과용되고 남용된다. 현 정권에서 현행법을 확대 해석하여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제한하고 정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도필리의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그러던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돈 문제로 검찰의 조사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청렴과 도덕성을 내세우던 노무현 씨의 일이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된 사안이 전임자들의 권력형 비자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경미한 것으로 보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갑남을녀 수준의 돈 문제로 그토록 중요한 상징성을 지켜내지 못하다니. 무제 때 장탕이 걸려든 일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경미한 것이었기에 그토록 억울해 했으리라.
평소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 되고자 하던 노 씨의 염원이 이런 고통을 통해서라도 이뤄지기 바란다. 청렴의 상징성이 깨어지더라도 도덕적 상징성은 살아남을 여지가 있다. 이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일이다. 진정한 도덕은 세속과 등진 성인군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고민과 고통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도필리의 세상을 막는 길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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