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7:35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解寃相生의 섬, 제주도
기사입력 오전 11:36:37
동백꽃 지는 계절 지금은 제주에서 동백꽃 지는 철이다. 50년 전의 4월 초에도 그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화전이 '동백꽃 지다'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회의 타이틀 작 '동백은 지다'는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5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것이다. 민중의 수난으로 4·3의 본질을 보는 그의 시각은 6년 만의 전시회에 보태는 신작 몇 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지역의 특정한 사건으로보다 역사 전반의 비극성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역시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길언 씨는 4·3을 '미친 시대의 광기(狂氣)'라 부른다. 광기는 합리적 이해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학술적 접근과 정치적 해법은 4·3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 그 상처를 아물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의 직관적 접근과 정서적 카타르시스에서 그는 더 긴요한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학술에도, 정치에도 그 나름의 몫은 있다. 수십 년간 4·3의 비극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봉쇄해 온 '공산 폭동'론은 독재정권 시절의 유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법적으로는 그 그림자를 치우지 않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위 구성도 의원 과반수의 발의서명을 받아놓은 채 해를 넘기며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학술적 규명도 아직 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50년 전의 4월 3일 새벽 500명 가량의 무장대가 5·10 선거 반대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추방을 내걸고 제주 각지의 경찰지서를 습격한 것은 공산 폭동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간 2만여 인명을 앗아간 내전 내지 학살 사태 전체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지역 주민의 10분의 1이 폭도로 소탕될 수 있었단 말인가. 1년간의 유혈 사태도 비극이었지만, 그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낸 40여 년의 세월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슬픔과 억울함을 펼쳐내기는커녕 연좌제의 피해까지 겹쳐서 겪어야 했던 세월이었다. 아마 이것이 더 먼저 풀어야 할 비극일지도 모른다. 발발 50주년 기념행사 중 '해원상생(解寃相生)굿'이 특히 눈길을 끈다. 4·3은 폭동이고 항쟁이고를 떠나 하나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시비곡직보다 비극성을 더 질실히 음미할 사건은 4·3 외에도 우리 현대사에 숱하게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굿판을 바란다. |
▲ 강요배의 <동백꽃 지다>.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6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이 작품에서 화가는 역사의 비극을 자연에 대비시킨다. 특이한 자연 조건 속에 특이한 비극적 역사를 겪어 온 제주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편안한 자리를 누릴 때 한국 사회도 21세기를 향한 올바른 자세를 갖출 것이다. ⓒ보리출판사 |
제주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변방이었다.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 하고 북방의 오지를 들먹이는 관용어도 있지만, 산으로 막힌 삼수 갑산보다도 더 두터운 격절성을 바다로 막힌 제주는 가지고 있었다. 제주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사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그 역사가 한국사에 통합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05년 탐라'국(國)'이 탐라'군(郡)'으로 바뀌면서 왕제(王制)를 없앴다는 기사, 그리고 1211년 제주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려 조정에서 부사와 판관을 두었다는 기사를 통해 제주가 고려 영토로 편입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주의 역사와 본토의 역사 사이에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1260년대부터 한 세기 동안 지속된 몽골 지배가 제주의 특이한 위치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마지막 저항 세력 삼별초를 1273년 제주에서 진압한 뒤 원나라는 제주를 고려 본국과 별도로 관리했다. 탐라총관부를 두고 일본 정벌의 기지로 삼았다가 후에는 목마장으로 경영했다. 1295년 이후 고려 행정체계에 회복된 뒤에도 원나라는 목호(牧胡)를 통해 제주에 대한 실질적 관리를 계속했다.
1370년대에 원나라가 쇠퇴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난 명나라를 가까이 하는 정책을 취할 때 제주의 목호들이 이에 저항해 난을 일으킨 것은 한 세기 동안 원나라가 제주에 쌓아놓은 체제가 강고했음을 보여준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 조정은 최영을 필두로 하는 2만5000명의 군대를 보냈다 한다. 당시 제주 인구가 5만 이하로 추정됨을 감안하면 '목호의 난'은 일부 친원 세력의 책동이라기보다 제주민의 전면적 저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서는 제주에 안정된 통치가 행해졌다. 1416년 섬 북쪽에 제주 목(牧)을, 남쪽에 정의와 대정의 두 현(縣)을 설치한 것이 5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안정된 통치는 제주민을 본토에 비해 열악한 조건에 묶어놓았다. 조선조 후기 내내 시행된 '출륙(出陸) 금지령'이 대표적인 제약이었다. 인적·물적 차단을 통해 제주는 마치 조선의 식민지처럼 관리되었다. 500년 동안 제주인은 조선 왕조의 정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파견된 목사와 현령들의 통치를 받았을 뿐이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의 상황이 제주에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일본 상인들을 통해 제주 해산물에 수출의 길이 열리면서 경제 발전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공헌을 중시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는 통상 지나치게 극단화하는 경향 때문에 문제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타당한 면이 있다. 제주의 경우는 이 타당한 면이 비교적 큰 편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의 수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수출의 길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영향력과 통치 덕분에 제주 수산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수산물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마음껏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재일동포 사회의 향우회가 제주 출신은 마을 단위로까지 조직되어 있다. 다른 지역 출신 향우회가 군 단위나 도 단위로 조직된 것과 대비된다. 제주 사람들이 워낙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제주의 청년들이 일본과 조선의 여러 고등교육기관으로 유학함으로써 제주의 인적 자원도 개발되었다. 조선조 내내 제주 사람이 성균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던 상황과 비교해 보라.
이런 배경 위에서 일본의 패망은 제주에 민족 해방이라는 기쁨에 앞서 엄혹한 현실 문제를 가져왔다. 해방 당시 제주도에는 약 15만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후 몇 달 동안 외지에 나가 살던 제주인 10여만 명이 귀환했다. 인구는 곱절 가까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산업과 교역이 침체하고 마비되어 극심한 생활고가 만연하고 그 위에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정치의식도 활발하게 작용해 제주도는 미군정의 치안 취약 지대가 되었다.
제주도의 치안 문제가 경찰과 반공단체의 개입을 불러오고, 이 개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끝에 1948년 4월 3일 대규모 민중봉기가 터져 나왔다. 이후 1년간 치열하게 벌어진 이 항쟁을 반공 독재정권이 '공산 폭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제주인들의 질곡은 수십 년간 더 계속되었다.
질곡을 무릅쓰고 제주는 다시 일어섰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소비수준 향상으로 제주의 관광 자원과 특산물이 시장을 찾음으로써 경제적 흥기가 가능하게 된 것이지만 제주의 흥기는 경제적 흥기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가 반공 독재 분위기에서 겨우 빠져나올 때 <제민일보>를 앞세운 제주인들의 4·3 바로보기 운동은 민주화시대 한국 사회의 과거사 정리 사업에 선구가 되었다. 제주의 정신적 흥기가 한국 사회를 선도한 것이다.
▲ <동백꽃 지다>(강요배 그림, 김종민 증언 정리, 보리출판사 펴냄). ⓒ프레시안 |
'제주올레'란 이름의 특이한 움직임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걸어 다닐 길을 확보하자는 소박하다면 소박한 운동이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자는 큰 뜻이 담긴 운동이기도 하다.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육지와 다르다는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고통 받아 온 제주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이 어떤 혜택을 받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 운동의 정신과 함께 제주를 제대로 아끼는 마음이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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