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말 연변에 처음 올 때 나는 꽤 심각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중국사를 전공으로 택한 지 30년이 되도록 중국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던 터였다.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중국의 학술이 부진한 데 이유가 있었다. 학생시절 이래 중국사에 관한 볼 만한 연구 성과가 중국어로 나오는 것이 극히 적었다. 국제학술회의에서 마주치는 중국 학자 중에는 제대로 된 학자로 보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타이완과 홍콩에 몇 번 다녔지만 주된 목적은 영인자료 쇼핑이었다.
중국과 길이 열린 후에도 한 동안 심드렁했다. 가 봐야 내 학술적 관심을 충족시킬 길을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대학에 계속 있었다면 마지못해서라도 다닐 일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자유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2000년을 넘기며 관심이 새로 일어났다. 아카데믹한 관심이라기보다 저널리스틱한 관심이었다. 여러 해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고 지내면서 세계의 진로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 무렵의 칼럼을 모아 낸 책에 <미국인의 짐>(2003, 아이필드)이란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중국의 장래 역할에 흥미가 끌린 것이다. 음(음)이 극(극)에 이르면 양(양)이 일어나는 것처럼, 세상 돌아가는 축이 미국의 일극(일극)으로 모이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축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에 가서 지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조선족사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런 사회가 있다면 그쪽부터 먼저 살펴본 다음에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나라 사람 아닌 한국인 입장에서는 조선족사회를 통해 한민족과 중국 사이의 특수관계를 먼저 파악해 놓고 그 발판 위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2003~2005년 3년간 연변에서 지냈다. 예상보다 긴 기간이었고, 본토에는 들어가 보지 않은 채 귀국했다. 3년 체류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곳에서 든든한 아내를 만나 잘 의지해서 살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조선족 입장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본다면 이런 시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정리해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돌베개)를 쓴 것이다.

 

평생 공부의 키워드로 중요한 것이 ‘문명’과 ‘민족’이었다. <밖에서 본 한국사> 역시 이 두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인데, 꽤 큰 호응을 얻었다. 그 호응에 힘입어 몇 해 동안 한국근현대사 몇 대목을 서술하는 작업을 진행해서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돌베개), <해방일기>(10권, 2011-2015, 너머북스), <냉전 이후>(2016, 서해문집) 등 책을 냈다. 문명의 흐름에 대한 인식 위에서 민족사회의 과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모색한 것이다.

이렇게 10년가량 열심히 글을 쓰며 지내다가 근년 들어 체력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 해온 일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뭐든 할 수 있는 일을 닥치는 대로 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결산이 그리 멀지 않은 상황에서 더 중요한 일, 더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는 ‘선택과 집중’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 위에서 제일 먼저 반성한 것이 한국사에 너무 치중해 왔다는 사실이다. 신문을 통해서든 책을 통해서든 한국에서 글 값을 벌려면 한국사 얘기를 하는 게 유리하다. 그 여건에 맞추다 보니 내 공부 내용을 그 방향에서만 파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2년 전부터 글 장사를 그만두고 “나 자신을 위한 공부(위기지학)”로 방향을 돌렸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입출력(input-output) 기능을 꺼놓고 정보처리(processing)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고 지내던 차에 묘한 인연 하나에 마주쳤다. 마음에 드는 책 하나가 눈에 띄어 번역을 맡았는데, (대니얼 벨, <차이나 모델>, 2017, 서해문집) 베이징의 저자 집에 초대받아 하룻저녁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 전통시대 한-중 관계에 화제가 미쳤는데, 내외 모두가 내 생각을 너무 흥미롭게 듣는 게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리고 1년 후 벨 교수에게서 초청이 왔다. 지난 6월 열린 “천하란 무엇인가?” 워크숍에 와서 발표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워크숍을 계기로 내 활동과 생활에 큰 변화가 시작되었으므로 앞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무척 공교로운 기회였다는 사실만 밝혀둔다.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려면 어딘가에 경비 지원을 신청해야 하는데, 내게는 신청할 데가 없다. 주최 측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하며 불러주는 자리가 아니라면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워크숍이 끝난 후 아내가 먼저 와 있던 연변으로 왔다. 예년처럼 여름을 연변에서 지내고 초가을에 귀국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바로 생각이 바뀌었다. 주된 거주지를 연변으로 옮기기로. 나 따라서 십여 년 객지생활을 해 온 아내는 이제부터 자기 고향에서 살자는 제안에 희색만만. 그래서 서둘러 한국에 돌아가 필요한 일을 살펴놓고 며칠 전에 연변으로 돌아왔다.

거주지 옮길 생각이 든 것은 중국 학계에서 활동할 전망 때문이다. 학교와 학계를 떠난 후 20여 년간 외톨이로 일해 왔다. 문명사에 대한 관심을 폭넓게 공유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워크숍에서는 내 관심 주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고 싶은 선수들이 방에 가득한 것이었다. 그들과 마음껏 토론을 함께 하기 위해 내가 먼저 할 일이 하나 있다. 중국어를 익히는 것.

한문을 줄줄 읽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고 대학 졸업 무렵부터는 현대중국어도 읽어왔다. 중국사를 전공 분야로 택한 지 근 50년 된 사람이 여태 중국어 회화를 못하고 있다니 참 한심한 일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게으른 탓도 물론 있지만 ‘시대의 장난’을 또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석사과정 이래 중국사에 관한 연구 성과를 중국어로 읽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 선배들은 일본어에 주로 의존했고 우리 또래부터는 영어로 많이 넘어갔다. 나는 정밀한 공부보다 넓은 공부를 좋아해서 영어에 치중했고, 20-30대에는 우리글보다 영어로 읽은 글이 더 많았다. 그 시절에는 더러 꿈도 영어로 꾸기까지 했다.

< 삼국지연의>를 한문으로 읽던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한자문명권의 후예로 자라나 왔다. 중국사를 전공으로 택한 것도 그 배경 위에서였다. 그런데 학문의 길에 들어서면서는 ‘학문의 언어’로 영어에 매달리게 되고, 중국과의 접촉은 고전 자료의 범위에 묶여 있게 되었다. 중국이 침체에 빠져 있던 시기였고, 나는 ‘서양식’ 학문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6월 워크숍에서 내가 참여할 만한 ‘학계’를 찾았다. 혼자 공부해 온 주제들을 놓고 마음껏 토론을 벌일 상대들과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토론을 중국어로 한다는 것이 또한 마음 설레는 일이다. 나 외의 모든 발표자가 (서양인과 일본인들도) 중국어를 썼다. 사실 “천하” 같은 주제의 토론에는 영어보다 중국어가 더 적합하기도 하다. 어쩌면 이 학계에서는 ‘서양식’ 아닌 학문을 추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연변으로 옮겨 살기로 한 것은 중국어를 익혀 한자문명권의 후예로서 내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뜻이다. 이 뜻을 들은 한 친구가 물었다. “이제 제1외국어를 영어에서 중국어로 바꾸는 건가?” 나는 살짝 과장해서 대답했다. “아니, 중국어를 제2모국어로 회복하려는 거야.”

 

1년 전부터 블로그에 “퇴각일기”란 제목으로 간간이 적어왔다. 활동을 줄이고 지내다 보니 인생으로부터 퇴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욕심 없는 자세로 바라보는 나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그려두는 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꼭 써야 할 이유가 없는 글이니까 쓸거리가 있어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았다. 더 애를 써서 착실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조인스> 기고 권유를 받고, 이 글을 거기 연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주 한 차례 의무감을 조금 갖고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뜻을 알리니 담당자들도 좋다고 해서, 베이징 워크숍이 끝난 후 6월 하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6월 하순이 되었을 때는 생활과 활동의 큰 변화를 궁리하고 있었고 그 준비를 위해 당장 한국으로 서둘러 돌아갈 참이었다.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연재 시작을 늦추기로 했다.

늦추기만 해서 될 일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퇴각”을 표방한 것은 더 이상 새로운 목표를 세울 필요 없이 마음을 비우고 시선을 가라앉힌다는 뜻인데, 지금부터 중국어를 익히고 새로운 학계에 찾아들어가려는 의욕이 넘치는 판에 “퇴각”을 말할 수 있나? “진격일기”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한 달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고 “퇴각일기” 이름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진보’를 너무 좋아하는 현대인은 ‘퇴각’을 공연히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패배’에 따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 이치는 그런 게 아니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설 때가 있는 법이다. 깨어질 때까지 “돌격 앞으로!”만 외치는 것이 전술로는 괜찮을 때가 있을지 몰라도 전략으로는 빵점이다. 퇴각 잘하는 장수가 진정한 명장이라고 병법에서도 말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는 이치는 농사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인생의 가을에 서 있다. 인생을 펼쳐나가던 단계에 비해 선택의 여지가 크게 줄어, 하고 싶은 일보다 꼭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위치다. 기운 넘치던 시절에 비해 재미가 적은 인생이 되었지만, 정작 인생의 보람이 이제부터의 섬세한 선택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하며 긴장을 지킬 마음을 먹는다.

2007년부터 10년간 신문과 책 독자들을 향해 많은 글을 썼다. 2년 전 퇴각로에 접어들었음을 자각하면서 글쓰기가 줄어들어 지금은 블로그에조차 올리는 글이 별로 없다. 이제 ‘퇴각’의 의미를 마음속에 분명히 세우면서, 많지 않은 글이라도 꾸준히 적어 나갈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평생 지어 온 농사 거둬들이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이며 햇곡식의 구수한 맛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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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