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가 ‘민주주의’를 미국식 민주주의 내지 자본주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사실은 여러 차례 발언에 나타나지만, 그래도 언론 자유가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라는 점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착 직후인 9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맥아더의) 포고를 銘記하라!” 하는 고압적 메시지에 붙여 언론 자유를 언급했을 것이다.
“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 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 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 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12일)
신문이 몇 가지 안 될 때였다. 해방 전 간행되고 있던 신문은 국문의 <매일신보>와 일본어의 <경성일보>뿐이었다. 둘 다 총독부 기관지였다. 그리고 미군 진주에 임박해 엉성하나마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와 <서울타임스>, 그리고 <조선인민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10월 23~24일 전조선신문기자대회에 24개사 대표가 모이고 연말까지 40종 이상의 신문이 나오기에 이른 데는 미군정의 언론 자유 보장 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해방 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언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해방 전이라도 말기의 전쟁기를 말하는 것이지, 1930년대 이전과 비교한다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미군정의 ‘언론 자유 보장’이 허울뿐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11월 10일의 <매일신보> 정간 조치였다.
총독부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과 기업체의 운영을 한국인 종업원들이 ‘노동자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 넘겨받는 ‘자주관리 운동’이 널리 펼쳐지고 있었다. 매일신보사는 자주관리 운동의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해방 직후부터 총독부 기관지의 구태에서 벗어나 국내 최대의 신문으로서 ‘정론지’의 위상을 추구하고 있었다. <매일신보>가 건준-인공을 지지한 점이나 기자들 중에 좌익이 많았다는 점으로 <매일신보> 자체의 좌경화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극단적 편향성을 보인 일이 없었다.
동업 每日新報는 돌연히 10일 오후 아놀드군정장관의 명령으로 정간처분을 받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통신망으로나 또 인원구성으로나 해방해서 자주독립국가 건설로 매진하고 있는 오늘 조선의 권위 있는 보도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다 해야만 하고 무거운 책임이 있는 터임으로 이 기관의 존재와 금후의 발전에 대하여는 일반민중이 큰 관심을 가지고 그 동향을 주시하고 있는 만큼 이번 정간된 것은 사회 각층에 상당한 충격을 준 것이다.
(...) 11일 오후 4시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종로2정목의 조선통신사에서 긴급상임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결과 언론자유의 확보라는 언론계 전체의 과제로 이 문제를 취급하기로 하고 대표 5명을 군정청에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하는 동시에 강력한 진언을 하기로 되었다. 이에 따라 대표위원들은 12일 오전 군정청보도부로 뉴맨 대좌와 녹 소좌를 방문하고 이 사건에 관한 전말을 듣는 동시에 하루 빨리 신문이 발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 날의 회견에서 판명된 것은 10일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정간을 명령했던 것이다. 사실은 매일신보사의 곤란한 현하의 재정 상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임시로 정간을 시켰다는 것이다. 지난 9월 이후 매일신보의 재정 상태가 넉넉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재정 상태를 조사하는 때문에 정간을 시킨다는 것은 양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군정당국에서는 언론을 탄압함은 결코 아니라고 언명했다. (...) (중앙신문 1945년 11월 13일)
당시 사람들은 <매일신보>가 군정청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결정적 사례가 10월 10일의 아놀드 망언 보도였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라며 자신의 인공 비난 발언의 보도를 요구했다. 모든 신문이 이 발언에 비판을 곁들이더라도 1면에 보도했는데, <매일신보>만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발언을 비판하는 사설만 내보냈다.
‘요구’가 어떻게 ‘명령’의 성질을 가질 수 있을까? ‘명령’이 아니니까 언론 자유 침해는 아니면서 실제로는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을 아놀드는 원했다. 우리가 군대에서 익힌 “박으라면 박아!” 정신은 한국 군대만의 것이 아니었다.
11월 10일이라는 날자가 말해주는 것이 또 있다. 아놀드 망언에서 꼭 한 달이다. 미군 지휘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인내는 한 달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아놀드는 군자가 아닌 모양이다.
물론 <매일신문> 정간이 아놀드 일개인의 명예와 복수를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10월 초순 미군정이 매일신문사 접수를 시도하다가 자치위원회에게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뭔가 어떻게 해야 할 신문이라는 공감대가 있던 터에 아놀드의 분노가 지렛대가 되었을 것이다.
며칠 후 아놀드는 신문기자회 위원장과의 회견에서 <매일신보>에 대한 태도를 밝혔다.
(略) 13일 신문기자회위원장 李鍾模가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한 시간 반이나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한 결과 아놀드 군정장관은 (...) 시급히 매신을 계속 발행할 수 있도록 힘 쓸 것과 일 당파나 일 개인에게 이 기관을 주지 않겠다는 것을 공약했다. 여기서 매신의 재출발은 불일 중 실현될 것으로 믿어졌다.
그런데 14일에 이르러 재건 도중에 있는 조선일보가 군정청의 명령으로 매일신보의 관리를 맞게 되었고 동시에 조선일보를 매신 공장에서 인쇄하기로 되었다 한다. 그런데 15일의 군정청 발표로 보면 조선일보는 매일신보 공장에서 인쇄하지만 매신 공장을 접수하는 것은 아니요 일방 매일신보는 재조직하려고 당분간 정간하고 있다는 것과 한 신문사 공장에서 두 신문을 발행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놀드 장관이 언명하였다. 이로써 보면 매일신보는 금후에 반드시 속간될 것이요 또 그렇게 되면 매신 공장에서는 매일신보와 조선일보의 두 가지 신문이 인쇄될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번에 군정청에서는 조선일보는 현재 매일신보 공장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간하게 하고 동아일보는 현재 경성일보 공장을 이용하도록 결정 발표하였다. 아놀드 군정장관은 이러한 조치를 하고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매일신보의 정간은 동사를 재조직하기 위하여 당분간 발간을 정지시킨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 (중앙신문 1945년 11월 16일)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자기 소유가 아닌 당시 최고의 인쇄시설을 쓰며 11월 23일과 12월 1일 재창간하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11월 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속간되었다. <매일신보>의 정간과 제호 변경은 재창간하는 두 신문의 경쟁자를 약화시켜 주는 효과도 가져왔다.
당시 수많은 신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정치색을 강하게 드러낸 것을 놓고 “언론은 정치투쟁의 격렬함을 완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선봉에 서는 당파지로서 갈등을 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강준만의 논평은(<한국현대사산책 1> 158쪽) 미디어학자답게 예리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대중성이 강한 <매일신보>는 중도적 입장을 지켰다. <매일신보>가 제호를 바꿔 영향력이 줄어들고 <동아일보> 같은 극우 신문이 영향력을 늘리면서 당파지 성향이 강화된 것이니, 미군정 언론정책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0월 23일 전조선신문기자대회 선언문에서 정치색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언론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원리의 적용 범위와 방법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색깔론’은 괜찮지만 ‘흑백론’이 문제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문이 흔히 불편부당을 말하나 이것은 흑백을 흑백으로써 가리어 추호도 왜곡치 않는 것만이 진정한 불편부당인 것을 확신한다. 엄정중립이라는 기회주의적 이념이 적어도 이러한 전 민족적 격동기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우리는 용감한 전투적 언론진을 구축하기에 분투함을 선언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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