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5. 1945. 10. 30 / 점령군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

김: 한반도 남북에 점령군이 모두 들어온 지 두 달이 되어갑니다. 일본 지배를 벗어난 조선이 자기 손으로 장래를 열어가는 출발점에서 연합국 점령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상황입니다. 선생님은 점령군의 역할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안: 점령군의 역할보다도, 그 역할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떤 기대를 거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의 적이 일본이었는데, 연합국은 일본의 적이니까 우리 편이라는 것이죠.

지난 세계대전을 연합국이 싸운 것은 추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겹쳐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네 권리와 이익을 지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계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카이로선언의 조선 독립 약속에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파시즘의 횡포를 바로잡음으로써 세계평화의 기반을 확충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 목적과 이념적 목적이 겹쳐져 이뤄지는 것입니다.

지금 두 나라의 조선 점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도와줌으로써 세계평화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점령에 비용과 노력을 들인 만큼 각자의 국익에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적, 이기적 목적이 거기에 겹쳐져 있습니다.

두 나라가 조선 점령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목적이 이기적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목적을 나쁜 쪽으로 의심만 하는 것도 좋은 쪽으로 믿기만 하는 것도 그들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에 어려울 것입니다.

 

김: 소련군의 이북 점령은 두 달이 넘었고 미군의 이남 점령도 두 달이 되어 갑니다. 서울에서 미군 병사들의 행동을 보면 자신을 정복자로 여기는 오만과 횡포의 자세가 만연한 것으로 보이고, 소문을 들으면 이북에서도 약탈, 강간 등 도와주러 온 군대답지 않은 태도가 많은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는 일본놈들보다 더 심하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났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안: 군대란 폭력을 위한 조직이니 백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를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물건(兵者不祥之器)”란 중국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 죽이는 전쟁을 하다가 조선을 점령하러 온 두 나라 군인들 중에 치안을 해치는 행위가 전혀 없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 해 지속되어 온 일본 통치가 그런 대로 자리 잡혀 있던 것에 비해 막 도착한 두 나라 군대의 탈선이 더 심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주일 두 주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어지러운 상황은 정리되고 있습니다. 이북의 소련군도 요즘은 행태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김: 점령 초기의 황당무계한 수준은 벗어나고 있지만, 미군이 조선인을 깔보는 자세는 병사 개개인의 소양 문제보다 지휘부까지 포함한 미군 전체의 조선 인식 문제 같습니다.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비난 발언을 보세요. 인공에 아무리 문제가 있더라도 말을 어떻게 그리 막할 수 있나요? 미군이 조선인을 깔보는 자세가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남북 간이 막혀 있어서 북쪽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의 소문으로는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를 도와주는 등 조선인을 존중해 준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간 인구 이동을 보면 남에서 북으로의 이동보다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백성은 덕 있는 정치를 따라 옮긴다는데, 미군이 소련군보다 덕이 있는 걸까요?

 

안: 미군이 조선인을 깔보는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김 선생 말대로 사병 개개인의 태도만이 아니라 지휘부의 정책에서도 느껴지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군의 도덕성 문제로 보기보다는 조선이 저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못한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존중받을 만한 자세를 보인다면 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을 정치의 덕 있고 없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 이북의 공업지대로 일자리를 찾아간 이남 사람들이 많았죠. 공장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만주와 북중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이북을 거쳐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월남하는 일도 많이 있기는 합니다. 반대쪽 움직임보다 훨씬 많죠. 이것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기세를 올리니까 지주와 중산층이 겁을 먹고 일시적으로 피신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싫은 사람들은 옮겨 다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자본주의 무서운 사람들은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겠죠.

 

김: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문제보다,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지원하고 미군은 탄압한다는 차이가 양쪽 점령정책의 제일 큰 차이로 보입니다. 북쪽에서는 적극적 친일파가 아니라도 해방 전의 관리들이 거의 다 쫓겨나고 새 사람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지방행정을 맡게 되었는데, 남쪽에서는 일본인들만 내보내고 그 밑에 있던 조선인 관리들을 친일 행위가 심하던 사람들까지 그대로 두고 있습니다.

미군정이 인공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건준이나 인공이 하나의 단체로서 민의의 일부분을 대표하여 점령군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모르겠는데, 조선인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나서는 것은 조선인으로서도 승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다른 일이지요. 자율적으로 구성한 인민위원회가 그 지역의 민의를 제대로 대표하는 것은 조금만 감독하면서 도와주면 가능한 일입니다. 당장의 행정과 치안도 일제시대의 군청과 경찰을 그대로 두는 것보다 인민위원회를 통해 민의를 수렴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뿐 아니라, 국가 건설의 풀뿌리를 키워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제주도 외의 이남 지역에는 미군 배치가 완료되었는데, 배치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인민위원회 해산입니다. 해방된 이 땅에 국가를 세우는 일은 중앙의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함께 하는 일이고, 그 뜻으로 만드는 것이 인민위원회입니다. 식민지 지배기구를 지키면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것은 미군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겠다는 뜻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의심할 일은 아닙니다. 능력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미군정 간부들 중에 조선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조선을 지배할 야욕이 있다면 그렇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냈겠습니까?

조선 남반부에 주둔한 미군은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의 휘하 부대입니다. 따라서 미군의 조선 점령 정책은 맥아더 사령부의 일본 점령 정책과 같은 틀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행정과 치안을 맡겨놓으니까 주 조선 미군도 총독부 체제를 가급적 바꾸지 않는 방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곳 사정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면 일본과 조선에 다른 정책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이해를 늘리도록 꾸준히 노력해야지요.

 

김: 진주한 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그들이 엉뚱한 이해만 늘려 간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10월 10일 군정장관의 인공 비난 발언, 이건 한민당 삐라를 그대로 베낀 것 같습니다. 인공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아놀드의 황당하고 야비한 언사에는 어이를 상실했죠. 한민당에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그런 놈들이니까, 하고 봐 왔는데, 군정 책임자라는 사람이 그 흉내를 내고 있으니... 뭘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 같습니다.

군정 수뇌부의 한국인 접촉이 90% 이상 한민당 쪽에 치우쳐 있다고들 얘기합니다. 한민당에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 아니라 접대, 선물, 아부 등 온갖 재간으로 미군을 꼬드겨 밑에서는 온갖 이권을 챙기고 위에서는 자기네 유리한 쪽으로 정책을 유도하기 때문에 ‘통역정치’란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조선인의 가장 열악한 측면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리면서 군정 책임자들이 조선의 진짜 사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는 조병옥 씨와 장택상 씨에게 경찰 지휘권을 맡겼죠. 본인에게 두드러진 친일 행적은 없어도 민족의식도 박약하고 인품도 평판이 별로인 사람들 아닙니까? 미국 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인인지 미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를 사람들에게 큰 책임 맡기는 것을 보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 조병옥 씨와 장택상 씨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거야 누구한테건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이 개성이 강한 편이라서 미움을 많이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하는 데는 그것이 장점이 되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선인인지 미국인인지 모를 사람들이라 하는데, 지금 군정 당국과 조선 사회를 연결하는 데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맡을 몫이 있습니다. 군정 당국자들이 나처럼 확실한 조선인과 만나면 태도가 긴장되어서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어요. 그들과 함께 즐기면서 농담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통역정치’는 지금의 조선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고, 그 자체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질의 문제죠. 이권 챙기기나 정책 몰아가기 등 저질 행태는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욕만 한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통역정치를 없애려 들기보다 그 질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언론의 역할이 큰데, 언론 자유 보장은 미군정의 대단히 훌륭한 정책입니다.

지금까지 군정청의 정책 수준을 보며 나도 답답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불만이 있다 해서 상대방을 “나쁜 놈들”로 섣불리 몰아붙이는 것은 사태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길이 되기 쉽습니다. 기술적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하도록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