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③
기사입력 2008-11-13 오전 7:44:20
개화파를 미화하기 위한 역사 서술
<대안 교과서>는 2부 2장에서 5장에 걸쳐 개항 이후 합방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했다. <역사비평> 83호(2008년 여름호)에 실린 주진오의 '뉴라이트의 식민사관 부활 프로젝트'는 대략 이 부분에 대한 비평을 담은 글이다.
주진오는 이 글의 4장에서 근대 변혁 운동에 대한 편향적 인식을 지적했다. 특히 문제 삼는 것은 개화파에 대한 일방적 미화, 집권 세력에 대한 악의적 비판, 민중의 저항 운동 무시의 세 갈래다.
개화파의 미화는 정말 심하다. 개화파의 범위 설정부터가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받아들인 집단을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그 노선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전혀 없다. <대안 교과서>에 나타난 '개화파'는 모두 의인이며 현인이고, 그들의 실패는 모두 그들의 결함 아닌 외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특히 상자 기사를 이 목적에 활용한 방식은 집요하다 할 정도다.
한편,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는 개혁적 의미를 최대한 부정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서술이다. 사건의 명칭을 "동학 농민 봉기"라 한 데서부터 이 의도를 알아볼 수 있다. 이 운동에 대해서는 개혁적 의미를 극대화한 "동학 혁명"이란 이름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학계에서나 사회에서나 "농민 운동"이 합당한 호칭으로 통해 오고 있다.
내 책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을 다루지 않았다.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지만 내 책에 필요한 명쾌한 서술을 뽑아내기에 너무 복잡한 양상을 띤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 운동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광범한 계층이 참여했고, 지엽적인 폐단 시정으로부터 국가의 진로 설정까지, 다양한 요구가 뒤섞여 나왔다. 이 사건을 설명한다면 설령 폐정 개혁안 12개조처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 담긴 심각한 의미를 외면할 수 없다. 폐정 개혁안에 대한 의심만으로 이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것은 극히 자의적인 서술이다.
개화파의 미화와 농민 운동의 외면은 동전 앞뒷면이다. 교과서포럼은 개항기 이후의 한국 근·현대사를 자본주의 도입과 발전의 역사로만 이해한다. 일본을 모델로 하여 일본의 도움으로 추진하려 한 '개화'만을 역사의 바른 길로 여기니, 한국 민중의 견해와 요구는 그 길에 장애물로만 보이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그리고 고종의 역할을 신통찮게 보는 것은 나도 교과서포럼과 같은 관점이다. 나는 광무개혁을 "주체 없는 개혁"이라고 혹평했다. 주체라면 누구보다 고종이 주체 노릇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고종은 개항 이후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대응책을 찾는 군주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처해진 상황이 가져올 득실의 계산에만 급급한 책략가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조선 왕조는 개항 이전에 이미 위기에 처해 있었고, 1873년 대원군의 실각 이후로는 이에 대한 진지한 대응이 없었다.
광무개혁의 의미를 크게 보려는 이들은 조선 왕조에게 자립의 의지가 있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을 당한 것으로 봄으 로써 침략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을 때려죽인다고 해서 병약한 사람 죽이는 것보다 살인죄가 중해지는 것이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조선 왕조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여지가 남아 있었고, 그 자발적인 선택이 일본의 침략 의도 못지않게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광무개혁을 같이 폄하하면서도 <대안 교과서>의 서술은 이상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광무개혁의 일환인 양전(농지 측량) 사업이 근대적인 토지 사유제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시주(時主)'라는 표현을 빌미로 황제가 '본주(本主)'였다고 소설을 쓰는 것. 한문을 배웠다는 사람이 글자 해석을 이처럼 자기 뜻대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다.
국권인가 왕권인가
신라 통일 이후 한반도의 국가가 외부 세력의 침공을 받은 일은 얼른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임금이 직접 나서서 항복한 완벽한 정복도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몽골과 만주족 정복자들은 고려와 조선을 없애는 대신 조공 관계를 맺는 데 만족했다. 반도국가를 문명한 나라로 존중했을 뿐 아니라 고유한 문화를 가진 이 지역을 힘들여 직접 통치할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주인이 된 원나라와 청나라는 고려와 조선에 대해 조공 관계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면 길목의 한반도를 확실하게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호란 때 청군이 조선 조정만을 목표로 진군한 반면 왜란 때 일본군이 반도 전역을 침공 대상으로 삼은 차이도 여기에 까닭이 있다.
반도에 대한 섬의 관심은 섬에 대한 반도의 관심이나 반도에 대한 대륙의 관심보다 깊고 클 수밖에 없다. 일본이 한국에 치명적 위협이 된 것은 두 나라의 위치로 인해 정해져 있는 조건이었다.
메이지유신 초기, 아직 본격적 산업화가 많이 진척되지 않았던 1873년 무렵의 일본에서 반도 침략 논의가 일어난 것은 임진왜란과 별 차이 없는 수준의 동기에서였다. 징병제 실시로 역할을 잃은 사무라이 계급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주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홋카이도 개발에 옛 사무라이 계급이 대거 동원된 것도 같은 목적이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은 후 일본이 근대적 산업화를 추진함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수요도 무르익어갔고, 근대국가 체제가 갖춰지면서 식민지 획득을 위한 수단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 때만 해도 일본은 아직 국가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치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1889년의 메이지헌법 제정과 1890년의 교육칙어 반포로 근대 일본의 국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1886년의 통화제도 안정 조치 이후 경제와 산업의 발달도 궤도에 올라섰다.
1894년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청나라가 패퇴한 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양성 과정에 들어갔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3국간섭'(1895)으로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견제했지만, 조선에 관해서는 아무 간섭이 없었다. 그후 합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식민지화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한 열강은 러시아뿐이었다. 그 러시아마저 러일전쟁으로 물러서자 조선은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실질적 망국에 이르렀다.
조선의 망국에는 두 개의 단계가 있었다. 일본의 지배 아래 떨어진 것은 마무리 단계라 할 수 있고, 그 앞 단계는 중국 중심 천하체제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조일수호조약(1876)에서 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관된 주장은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조선 진출의 필수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 '독립'의 주장은 '친일'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매국노' 이완용이 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쇄국을 주장한 조선의 위정척사론자 중에는 일본과 서양을 배척할 뿐 아니라 청나라까지 오랑캐로 몰아붙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중국 중심 천하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당시 조선 지식층의 주류였다. 그들 중 견문이 앞선 사람들은 당시 청나라의 곤경을 이해하고 맹목적 쇄국 대신 선별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모색하고자 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에 보조를 맞추려는 것이었다.
청나라 양무파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친중국 정서를 이용해 조선과의 전통적 특수관계를 자기네 고유자산으로 지키고 싶어 했다. 조선의 개방을 청국의 주도하에 진행한다는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1881)도 그 표현이었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를 둘러싼 열강은 이른바 '만국공법'의 원리를 주장하며 이 특수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을 틈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조정에 직접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이 특수관계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열강에게 배운 외국 통제 방식이며, 전통적 천하체제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나라의 무력 개입은 일본의 '조선 독립'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일본에 기대어 개혁을 꾀한 갑신정변(1884)이 그 결과였다. 청나라의 양무를 따라가려는 온건파의 노력이 청군 주둔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자, 일본의 변법을 배우려는 급진파의 기세가 높아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도 자유주의 성향의 온건파가 동아시아 3국 간의 협력을 제창하는 '아시아 연대론'을 내놓아 조선의 급진 개화파를 고무했다.
청군의 조선 주둔 이후 청나라의 정치 간섭과 경제 침투가 계속되는 동안 조선인들은 개혁 모델로서 청나라에 실망을 느꼈다. 결국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서 물리적 영향력만이 아니라 심리적 영향력까지도 잃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갑오경장(1894)은 일본군의 총칼 앞에 시작된 것이었지만, 10년 전 갑신정변보다는 진보적 조선인의 합의를 널리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중국 중심의 천하체제로 돌아갈 길이 사라진 이제, 일본이 개혁의 유일한 모델로 남은 것이었다.
갑오경장 당시 일본의 의도는 물론 일본의 영향력 확대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아직 태도가 엇갈려 있었다. 결국 현실화된 것은 무력 점령을 향한 군국파(軍國派) 노선이었지만, 조선과 청나라가 일본의 개화를 뒤따르고 자발적으로 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바라는 성향도 있기는 했다. 의도야 어떠했든 갑오경장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이 따라하게 하는 쪽으로 추진되었다.
'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민비의 자주성을 부각시킨 드라마도 있었지만, 갑오경장에 대한 민비의 저항을 자주독립 정신으로 미화하는 것은 정황에 맞지 않는다. 1873년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은 민비 세력은 집권을 위한 집권에 집착할 뿐, 국가 진로를 능동적으로 열어나가려는 노력을 보인 바 없었다.
민비와 고종은 입헌국가를 향한 변화로 왕과 조정의 전제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청나라를 이긴 일본의 기세가 3국간섭 앞에 꺾이는 것을 보며 러시아에 의지해 일본의 압력을 견제할 길을 찾은 것뿐이었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 중 극동 지방에 가장 크게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가 러시아였다. 유럽의 후진국을 면하려 발버둥치고 있던 러시아에게 시베리아를 통한 태평양 진출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독점적 발전 방향이었다.
태평양 길목의 조선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마주쳤다. 청일전쟁 후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3국간섭으로 일본의 전리품을 제한한 것은 러시아의 외교적 승리였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을 견제할 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895년 10월 민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다음 달 고종은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실패하고,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1년간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지리멸렬한 조선의 국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였다.
이 기간 중 친일파 탄압이 있었던 것도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기보다 외세에 편승한 각축전의 일환으로 보아야겠다. 당시 고종을 옹위하던 친러파 가운데 나중에 진짜 저질 친일파들이 나타난 데서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1897년의 이른바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주체 없는 개혁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 등 열강이 바라는 이권 개발을 충실히 대행하는 기구가 되었다. 나라가 어려운 가운데 임금만 '황제'로 승격하고 전제권력 강화에 도취해 수백 년 지켜온 국체를 무너뜨린 조치는 백성의 충성보다 외세의 도움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결과였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말까지 활동한 독립협회를 광무개혁의 한 주체로 보기도 한다. 독립협회는 당시 진보적 식자층의 애국심이 발현된 것이었지만, 또한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독립협회의 독립이란 이미 패퇴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확인하는 것이지, 당시 늘어나고 있던 일본과 러시아의 힘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지도자 대부분은 두 나라 사이의 줄타기에 협회를 이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바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과 만주를 둘러싼 러―일 간의 긴장은 결국 1904∼1905년의 전쟁을 통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열강의 묵인 아래 조선의 국권을 을사보호조약(1905)과 합방(1910)의 두 단계를 거쳐 소멸시켰다.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국권 상실을 슬퍼하고 일부는 적극적 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도 국권 수호의 궁극적이고 거국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을사보호조약에 항의한 헤이그밀사사건(1907)에 대한 책임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기는 했지만, 그 재위 40여 년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수호하려 한 것이 국권이었는지 왕권이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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